고후 13:5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하나님께 버림 받았는데도 버림 받은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하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면 그보다 더 어리석은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들은 참으로 자신의 “생명”을 중시한다면 자신의 신앙을 자주 점검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상기의 말씀에서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는 말씀은 “시험하고”라는 말은 “알아보다”의 의미이고 “확증하다”는 “증명하다”의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구원”을 받았는지 못 받았는지 자신이 스스로 하나님께서 내 안에 계신지 “알아보고 자신을 확증하라”는 것입니다.
요 1:1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니라, 말씀의 실체가 곧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내가 깨달았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내 몸 안에서 “안식”하시고 계시므로 “말씀”의 실체이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몸 된 성전 안에 계시는 것이 확증되면 구원된 자요, 그렇지 않으면 버림받은 자라는 것을 상기의 본문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이런 사실을 확인하지 않고 막연하게 예수를 믿으니깐 당연히 내 몸 안에 하나님이 계시겠지 하는 생각으로 신앙생활을 한다면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그를 검증하실 때 그의 아들인 이삭을 모리아 산에 하나님께 번제로 드림으로써 그가 참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임이 판명되었습니다. 세상 모든 일에도 그 진실 여부를 판별하는 검증 절차가 있는데 하물며 어떠한 것보다 차원이 가장 높고 귀한 자신의 “생명”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일에 그 믿음의 검증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검증도 없이 무조건 예수를 믿는 신앙이라 목회자나 교인들이 언젠가는 사후에 천국에 들어가겠지 하는 막연하게 안일한 신앙생활을 한다면 그것 같이 어리석은 일은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검증은 누가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스스로 선한 양심에 따라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스스로 깨닫고 행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검증 없이 신앙생활하다 사후에 “지옥문 앞에서 이를 갈며 통곡”하기 전에 살아있을 때 검증을 받는 것이 현명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리의 성령”이 자신 안에 계신 사람은 이렇게 증거를 해주십니다. 요 16:13-14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요일 2:27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리니,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진리의 성령”이 성전 된 내 몸 안에 계시면 “성경”의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해 주시며 내 몸 안에 계심을 확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확증받는 사람은 “애급, 광야, 가나안”을 통과 한 사람은 자신이 깨닫고 자신이 확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확증이 없이 기독교 목회자들의 무조건 믿으라는 맹종의 유혹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자신 안에 “우상 예수”가 점거하고 있는 사실조차 전혀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무조건 믿는 신앙으로 믿어집니까? 믿어지지 않기 때문에 죽음 앞에는 두려움이 앞서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스로 버림받은 자, 즉 자신이 자신을 구원에 합당치 않은 자로 판정한 자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에 구원자로 오셨지만 예수님 자신에 대하여 이르시되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마21:42)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예수님 자신이 유대인들을 구원하러 오셨으나 유대 종교지도자들인 “제사장 서기관 바리새인”들과 같은 건축자들에게 예수를 건축에 적합한가를 검증받았는데 거기서 예수는 부적합하다는 판정을 받아서 이단으로 배척을 받고 결국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밖아 죽여 버린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판정 잣대는 “구원자 메시아”는 구름을 타고 오시며 기적을 베푸는 전능자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도 유대인들과 동일한 기준으로 오늘날 기독교인들도 “예수”를 전능자로 보기 때문에 구름 타고 오시지 않은 오늘날의 “실존 예수”를 이단으로 배척해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유대인들을 원망하면서 자기네들을 구원 하러 오신 예수를 죽였다고 유대인들을 원망합니다. 그러면서 오늘날기독교인들은 유대인들이 십자가에서 죽인 그 예수를 모두 잘 영접하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왜” 유대인들이 이단으로 배척해서 죽인 그 예수를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모두 다 잘도 영접하는가? 유대인들이 오늘날 기독교인들보다 믿음이 없어서 예수를 이단으로 배척해서 죽였다고 생각하십니까?
오늘날의 구원자 “실존 예수”도 유대인들과 똑같이 예수는 모퉁이돌이 되어 계십니다. 기독교 건축자들에게 버려진 오늘날의 “예수”는 모퉁이의 머릿돌이 된 반면 오늘날 기독교 신학자 건축자들의 의해서 영원히 버림받은 자가 되었습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이유는 오늘날 기독교 목회자들의 세상 지혜자의 지혜와 명철자의 총명이 곧 하나님께 대해서는 어리석음인 까닭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전이나 오늘날이나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 29:13-14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그러므로 내가 이 백성 중에 기이한 일 곧 기이하고 가장 기이한 일을 다시 행하리니 그들 중에서 지혜자의 지혜가 없어지고 명철자의 총명이 가리워지리라,
이러한 말씀을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실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자신이 성령으로부터 직접 들은 것이 없는 기독교인들이 기독교 목회자들의 가르침을 받아 “영”을 분별하는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영”이 시기 때문에 인간을 구원하시려면 하나님 자신이 말씀이 육신을 입고(요1:4) 어느 때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항상 “실존 예수님”으로 오셨을 때 “구원”이 성립되는 것인데 2000년 전 유대인들의 구원자 “실존 예수”를 믿는 것은 곧 “우상 예수 다른 예수”를 믿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구원자 “실존 예수님”도 기독교인들 주위에 계시면서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마8:20) 이렇게 오늘날의 구원자 “실존 예수”는 2000년 전 유대교 때나 오늘날 기독교에도 발 부칠 곳이 없어 주위에서 맴돌고 있으면서 한탄하고 계십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들인 기독교인들은 “왜” 이러한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가?
(원문 출처:새사람 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