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과 영생의 과정

※ 산 자의 예배와 죽은 자의 예배 ※

제라늄A 2022. 6. 21. 21:46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는데 과연 그 예배가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인지 안 받으시는 예배인지 꼭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혹시 우상 하나님에게 예배를 드리고 있는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에는 누구나 교회에 가서 예배만 드리면 하나님께서 당연히 받으시겠지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예배 자체의 뜻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산 자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산 자”의 예배를 받으시는 것이지 “죽은 자”의 예배를 받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마22:32)

롬 12:1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는 변화된 너희 몸을 산 제사로 드리라는 것인데 “산 제사”란 신령과 진정으로 변화된 너희 몸이라는 것입니다.  창세기 4장에 가인이 농사지은 땅의 제물은 안 받으시고 양과 기름으로 드린 아벨의 제사를 받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의 진정한 뜻은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생명의 말씀”이 양과 기름이란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생명의 말씀”으로 변화된 거룩하게 구별된 산 자의 제사를 받으시는 것이 “산 제사”이며 이러한 예배 자를 오늘날에도 찾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이시기 때문에 영적으로 “산 자의 제물”을 받으시는 것이지 죽은 자의 제물이나 땅의 제물도 안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죽은 자”란 아직 생명의 말씀으로 변화받지 못한 거듭나지 못한 자를 성경에서 죽은 자라고 하는데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생명”이 없는 자를 “죽은 자”라고 하십니다.  마 8:22 예수께서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   이렇게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하지 못한 자를 성경에서는 “죽은 자”라고 하십니다.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은 자신이 드리고 있는 예배가 “산 자의 예배”인지 “죽은 자의 예배”인지 꼭 분별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죽은 자의 예배는 우상에게 예배하는 것이며 시간 낭비일 뿐인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자신의 존재가 10, 이라고 하면 이 10, 을 다 드리면 좋겠는데 이것을 한 번에 다 드리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1000 번제를 드린 것은 바로 이 때문인 것입니다. 만약에 내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나의 존재가 십 분의 일이 변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것이 되는 것이며 이것이 “제물”인 것입니다. 내 몸 전체가 변화를 받아 통채로 드리는 것을 구약에서 “번제”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기독교인이 드리는 예배가 산 제사냐 죽은 제사냐 하는 말은 목자의 입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본인의 삶이 바뀌었다면 그것이 “산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제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변화된 본인의 자신을 드리는 것이 “산 제물”인 것입니다. 그래서 삶 자체가 예배며 날마다 드리는 것이 “산 제사의 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주일날 교회에 나가서 예배를 드리는 것만이 예배가 아니라 거룩히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사는 것 자체가 “예배”인 것입니다.

그런데 말씀은 많이 알고 신앙생활을 오래 했어도 삶의 변화가 없고 “산 제물”을 하나님께 드리지 않는다면 이것은 “죽은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얼마나 하나님께 큰 죄를 범하고 있는지 조차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영성이 성장하지 못하고 삶이 변하지 않고 안일한 신앙생활을 한다면 먼저 “영의 양식”을 먹여주는 목회자를 냉철하게 점검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목자라 해서 다 같은 목자는 아닌 것입니다.

세상에는 진리와 거짓이 공존해있는 것과 같이 목자도 “참 목자”와 “거짓 목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진리”와 “비 진리”는 세상에서 비 진리를 먹던 사람들은 분별하기가 사실 불가능한 것입니다. 오히려 비 진리가 참으로 보이고 참이 거짓으로 보이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눅 8:11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하나님의 말씀은 “씨”라고 했기 때문에 “진리의 말씀”이나 “비 진리의 말씀”은 거듭나지 못한 자는 그 말씀이나 그 말씀이 똑같기 때문에 분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누누이 자기 제자들인 디모데나 디도에게 하는 말이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항상 살아 있는 말씀으로 되었다는 것이다(벧전1:23) 이와 같이 말씀은 “씨”가 있는 “참 목자”의 말씀과 씨가 없는 “거짓 목자”의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씨”를 분별하는 것은 본인의 “생명”을 좌우하는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거짓 목자”는 자신이 “죽은 자”이기 때문에 죽은 행실로 “죽은 자”들을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산 자의 말씀”은 살아서 운동력이 있기 때문에 산 자가 뿌리는 말씀의 씨앗은, 말씀을 사모하는 성도들의 마음 밭에 떨어지면 싹이 나고 자라나게끔 자연의 원리에 따라 성장하게끔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산 자의 생명의 말씀”으로 변화받기 위해서 성도들은 열심을 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변화를 받아 “산 제사”를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읽는 기독교인이라면 지금부터라도 “참 목자”의 입에서 나오는 “산 자의 말씀”으로 변화를 받아서 “산 제사”를 드리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늘나라에 가져가는 것이며 하나님과 영원히 동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생의 삶은 정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는 것이 인생입니다. 인생이 길고 짧은 것은 무엇으로 비교하느냐 하면 이 짧은 인생의 삶을 하나님 뜻대로 가치 있고 보람 있게 산다면 그것이 길게 값있게 사는 것이고, 그것을 모르는 사람은 백 년 천년을 산다 해도 눈 깜짝하는 사이에 그 경각에 있는 것만도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이란 꼭 영적으로 살아있는 자를 만나야 죽었던 자가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원문 출처:새사람 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