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과 영생의 과정

광야에서 외치는 요한의 소리를 들으라,

제라늄A 2023. 9. 4. 17:19

요 1:19-27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 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네가 누구냐 물을 때에 요한의 증거가 이러하니라, 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드러내어 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한대 또 묻되 그러면 네가 엘리야냐 가로되 나는 아니라 또 묻되 네가 그 선지자냐 대답하되 아니라 또 말하되 누구냐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대답하게 하라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 가로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 하니라, 저희는 바리새인들에게서 보낸 자라, 또 물어 가로되 네가 만일 그리스도도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요 그 선지자도 아닐 찐대 어찌하여 세례를 주느냐, 요한이 대답하되 나는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하더라,

상기의 말씀은 “광야에서 외치는 요한의 소리”가 유대인들에게 전파되는 것을 보고  유대인들이 제사장과 레위 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세례요한”의 정체를 알아보려는 장면입니다. 제사장과 레위 인들이 “세례요한”에게 네가 누구냐고 물을 때 “세례요한”은 자신을 밝히 드러내어 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대답을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이 학수고대 기다리고 있는 것은 메시야, 구원자 “예수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세례요한”이 자신은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말을 듣고 유대인들이 그러면 네가 엘리야냐 그도 아니면 그 선지자냐 라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례요한”은 엘리야도 아니고 선지자도 아니며 나는 단지 이사야 선지자의 말과 같이 “실존예수님”이 오시는 길을 곧게 평탄하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라고 대답을 하고 있습니다.

“세례요한”“광야에서 예수님을 증거하며 주의 길을 평탄케 하라고 외치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례요한”의 외침이나 가르침을 듣지 않고는 절대로 “가나안에 계신 “실존예수님”을 알아 볼 수가 없고 따라서 예수님이 구원자라는 것을 믿고 영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초등학생이 대학을 가려면 중, 고등학교를 거쳐야 대학을 가는 것과 같이 “애굽이라는 오늘날 세상기독교의 기독교인들이 가나안”에만 계신 “실존예수”를 만나려면 반드시 거짓된 세상기독교에서 “출애굽”(탈출)을 하여 “광야”로 나와 요단강으로 나아가야 하며 요단강에서 “세례요한”의 외침을 듣고 가르침을 받아야 비로소 가나안”으로 들어가 “실존예수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오늘날 기독교인들도 “가나안에만 계신 “실존예수님”을 만나려면 오늘날의 “세례요한”과 같은 필자 “새사람”“광야에서 주의 길을 평탄케 하는 외치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그 말씀이 진리라는 것을 깨닫고 가나안”에 계신 “실존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상기의 말씀은 제사장들과 레위 인들이 보낸 자가 “세례요한”에게 네가 그리스도도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요 그 선지자도 아닌데 어떻게 네가 “세례를 주느냐고 유대인들이 묻는 것입니다. 이 질문에 “세례요한”은 나는 “세례를 주지만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있는데 곧 너희가 기다리고 있는 메시야 실존예수님이라고 대답을 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세례요한”은 나는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성령세례를 주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로 나는 그의 신 들메풀기도 감당하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그의 신 들메풀기도 감당하지 못한다고 하는 말씀의 뜻은 즉 세례요한“신발 끈”을 풀지 못하지만 내 뒤에 오시는 “실존예수신발의 끈을 능히 풀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신발”은 영적으로 무엇을 상징하며 “신발 끈”을 푼다는 뜻은 무엇을 “비유하여 말씀하는지 알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발은 하나님의 말씀을 “비유한 것이며 신발 끈”을 푼다는 것은 아무도 풀을 수없는 “비유”의 말씀을 예수님께서 영적으로 풀어주신다는 뜻입니다. 오늘날도 “실존예수님”이 없으면 절대로 풀 수 없는 것은 물론 볼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감추신 “비유”의 말씀은 오늘날도 “실존예수님”이외에는 누구도 풀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도 제자들에게 세족식 “발”을 씻기시는 이유는 제자들이 소유한 “생명의 말씀”“비유”하신 것입니다. “복음이라는 신을 신고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악한 자들과 대적하기 위해서는 진리의 말씀으로 무장시키기 위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은 “비유비사”로 보여 주신 것입니다.  엡 6:15-17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계 2:18 그 눈이 불꽃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가라사대,  예수님의 발이 빛난 주석과 같다는 것은, 사도들이 가지고 있는 진리의 말씀이 “발이 되어 가지고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빛난 주석과 같은 “발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의 신, 복음의 신, 진리의 신으로 하나님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진리의 말씀이 하나님의 “발이 되었는데 그것을 빛난 주석과 같은 “발이라 하였습니다. 빛난 주석과 같은 “발로 모든 거짓된 기독교 비 진리들을 심판할 것입니다.  단 10:6 그 팔과 발은 빛난 놋과 같고 그의 말소리는 무리의 소리와 같더라,  오늘날 기독교에도 복음의 “발을 가지고 오신 실존예수님에게는 철장의 권세를 주시면서 주석과 같은 “발이 되게 하여 만국”(교파 교단)을 자기 “발아래 복종시키고 통치하며 다스릴 수 있는 자들이 되게 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실존예수님의 말씀은 일상용어로 기록하고 있으나 모두가 영적인 말씀으로 깊이 “비유”로 감추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례요한”의 말과 같이  세례요한이 주는 물세례가 있고 실존예수님이 주시는 성령세례가 있는 것입니다. 세례라는 것은 오늘날 기독교 목사들이 물 찍어 바르는 것이 세례가 아니라 말씀을 전 하는 것을 세례라고 하고 성령세례생수”와 같은 생명의 말씀을 성령세례라고 합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물과 생수”“비유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생수”성령세례생명의 말씀을 “비유하여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4장에 예수님께서 우물가로 물을 길러온 여인에게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다고 말씀하신 물이 곧 “생수 즉 성령세례 생명의 말씀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목사님들이 주는 말씀은 이며  예수님이나 사도들 그리고 오늘날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난 아들이 주는 말씀은 “생수가 되는 성령세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봉한 비밀의 말씀을 오늘날 실존예수님께서 영적으로 풀어주신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영적인 하나님의 말씀은 밭에 감추어놓은 보화와 같아서 실존예수님이 없으면 절대로 풀 수 없는 것은 물론 볼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원문 출처:새사람 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