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독교는 전생과 윤회를 부정하는가? ”
도마복음 84절, 예수께서는 너희가 너희의 모습을 볼 때에 너는 기뻐하지만 너희 죽는 것도 아니고 드러난 것도 아닌 전생에 존재하던 너희 형상(혼)을 볼 때 너희는 얼마나 답답할 것인가? 예수님은 오늘날 기독교가 부정하는“전생“에 대해서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신약성경 복음서를 통해서도 이미“전생“에 대하여 말씀하셨고 성경 여러 곳에서“전생“에 대해서 이미 말씀 하십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을 믿는 오늘날 기독교신학자들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전생“과”윤회”를 부정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전생“과”윤회”에 대한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말 4:5-6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말라기 선지자를 통해서 선지자“엘리야”가 다시 온다고 예언 하였으며 예언한데로“전생“에 존재했던“엘리야”선지자가 예수님 당시에”세례요한”의 몸을 입고 다시 오신 것입니다. 때문에 예수님은 너희가 오리라하고 기다리는“엘리야”가 이미”세례요한”의 몸을 입고 왔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러한 말씀 즉“전생“의 대한 말씀은 들을 귀가 없는 자는 들을 수 가 없다는 것입니다. 마 11:14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세례요한)이니라 이 말씀은 말라기 선지자가 다시 오리라고 예언한“엘리야”선지자가”세례요한”의 몸으로 와 있다는 말씀입니다. 즉 예수님은“전생“에 있었던”엘리야”가”현생”에 다시”세례요한”의 몸을 입고 이미 와 있다고“전생“과”윤회“를 말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 17:11-1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일을 회복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였도다.
인자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으리라 하시니 그 제서야 제자들이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이 세례 요한인 줄을 깨달으니라, 이렇게 성경은”엘리야”가“윤회”하여”세례요한”으로 왔다고 분명히 기록되어 있는데도 기독교“신학”이“윤회”를 부정하기 때문에 오늘날까지“윤회”를 부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상기의 본문 말씀에 예수님은 너희가 현제 너희의 모습을 보고 기뻐하지만 너희가 죽은 것도 아니고 산 것도 아닌 존재 곧“전생“에 존재하던 자신의 모습을 볼 때 너는 어떻게 감당하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이 말씀을 이해 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도 없다고 생각 합니다. 왜냐하면 기독교인들은“내생”에 천국에 간다는 것은 믿으나“전생“이 있다는 것은 기독교에서부정을 하고 있기 때문에 처음 들어보는 말씀이라 이해를 못하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 때문에 기독교”신학“은“도마복음서”를 인정을 하지 않기 때문에“도마복음서”를 신약성경에서 삭제한 이유 중에 한 대목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전생“에 대한말씀을“도마복음서”에만 기록하신 것이 아니라 신약성경 4복음서를 통해서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기독교인들이“전생“의 말씀을 부정하고 이단시 하는 것은 곧 예수님과 하나님을 이단이라고 말하는 것과 똑 같습니다. 때문에 예수님은 너희가 현실에 존재하는 모습만 보고 좋아 하지만“너희가 전생의 네 모습을 본다면 어떻게 감당하려고 하느냐“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만일”현생“에서 자신의 존재의 모습을 정확히 볼 수 있다면“전생“의 자신의 모습과”내생“에 나타날 자신의 모습 까지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어디로부터 와서 이 세상을 살고 있으며 또 어디로 가는지도 전혀 모르면서“전생“을 부정하는 것은 아직 자신의 존재 자체도 모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도”어제”가 없으면 “오늘“이 있을 수 없고“오늘“이 없으면“내일“도 있을 수 없듯이“전생“이 없는”현생”이 있을 수 없고”현생”이 없는“내생”도 존재할 수가 없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이치이며 자연의 원리이기도 한 것입니다.
오늘날 불교인들도“전생과 윤회“을 인정하는데 기독교만“전생과 윤회“를 부정하는 것은 하나님”신”(神)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근본사상은“부활“이요 불교의 근본사상은”해탈”이라 말합니다. 이렇게“부활과 해탈”은 용어만 다르지 모두 동일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기독교인들은“하나님”이라 부르고 불교인들이“반야“라 부른다 해서 유일신이 두 신으로 나누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에서 하나님이라 말하는 것은 신(神)은 오직 한 분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이와 같이 만물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신(神)은 오직 한분이신 하나님이시며 예수님은 하나님이라 말씀하신 것이며 부처님은 반야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한 기독교는”사랑”의 종교이며 불교는“자비“의 종교라 말합니다. 이렇게”사랑”은 기독교의 전매특허처럼 되었고“자비“는 불교의 독점물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사랑”은 기독교인들만의 소유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하며 부처님의“자비“가 불교인들만의 소유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어둠을 비추는 태양이 지구의 모든 곳을 고루 비춰주듯이 예수님의 ”사랑”과 부처님의“자비“는 용어만 다를 뿐 무명가운데서 죽어가는 중생들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한 반야의 빛이며 생명입니다. 그러므로 “자비와 사랑”은 모두의 것이며 어느 특정한 종교나 특별히 한정된 사람의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사랑”이라는 이름은 기독교의 소유물이 되어버렸고 반야의“자비“는 불교의 소유물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런데“사랑“이라는 기독교 안에는“사랑“이 없고”자비”라는 불교 안에는 진정한”자비”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진정한“사랑“은 예수님 안에만 있고”자비”는 부처님 안에만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진정한“사랑“(아가페)은 부활된 예수님 안에만 있고”자비”는 오늘날 해탈된 부처님 안에만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오늘날 기독교 안에는“실존예수님”이 없고, 불교 안에는“실존부처님“이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기독교인들은 구름타고 재림하실“실존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으며 불교인들은 지금도 다시 오실“실존미륵불”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오늘날 기독교 안에 살아있는“실존예수님”이 계시고, 불교 안에 살아계신“실존부처님”이 계신다면 무엇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구름타고 오시는 재림예수를 기다리며 불자들은 무엇 때문에 미륵불을 기다린단 말입니까? 불교가 부처님의 형상을 만들어 놓고, 기독교는 예수님의 형상을 만들어 섬기고 있는 것은 오늘날 불교 안에“실존부처”가 없고, 기독교 안에“실존예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불자들은 누가 해탈을 시키며 기독교인들은 어느 누가 부활을 시킨단 말입니까? 그러나 부처님이나 예수님이 불교나 기독교 안에는 없지만“불교와 기독교”밖에는 항상“실존”으로 계시기 때문입니다. 단지 사람들이“불교와 기독교”의 틀 속에 갇혀있고 또한 욕심과 탐심 때문에 눈이 멀어 오늘날 살아계신“실존부처님”이나“실존예수님“을 보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불교나 기독교가 해탈이 되고 부활이 되려면 하루속히 기독교나 불교의 교리의 틀에서 벗어나 오류 없는 진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살아계신“실존부처님”을 만날 수 있고 살아계신“실존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원문 출처:새사람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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