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기준은 예수

※ 자기 십자가가 없는 오늘날 기독교인들 ※

제라늄A 2021. 5. 22. 21:00

마 16:24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오늘날기독교인들은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모두 지고 십자가에 못 박혀 해결하였으니 기독교인들은 예수를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만 하면 구원받는다고 말합니다. 구체적으로 따져보지도 않고 성경을 문자적으로만 읽고 입에 발린 소리로 그저 쉽게 구원을 말합니다. 무엇이 과연 구원의 본질인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애시당초 알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성경에 기록되었으니 그렇게 믿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주장하는 가장 확실한 증거는  로마서 10: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니라, 입니다.

그 마음이 자기 마음인지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인지 알 수 없습니다. 자기 믿음을 가지고 예수의 믿음이라고 해도 그것을 증명할 길은 없습니다. 주는 자와 받는 자밖에는 아무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계2:17)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알 수 있는 것은 그의 열매로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폐일언 하고 자기 부인 있기 전의 마음은 마귀의 마음이라는 사실을 본인 스스로 깨닫지 못하면 그 믿음은 헛것인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사건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성령(신)의 역사하심으로 인해 순간적으로 깨달음의 사건과 함께 기독교인들에게 일어납니다. 소위 회심이라고 하는 회개의 사건입니다. 예수가 지셨던 십자가는 자기 부인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먼저 자신이 부인할 때 하나님께서 기독교인들에게 십자가를 질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그 기회를 피해가고 있습니다. 거듭되는 자기 부인의 고통과 십자가가 두렵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사랑하심과 능력으로 기독교인들에게 회개하는 마음을 주시고 암흑같이 캄캄한 어둠의 세계에 빛을 보내시어 자기를 부인하는 사건을 체험하게 하시지만  그다음 십자가 사건을 거부하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자기 부인의 사건을 계속 반복하며 때로는 포기하고 맙니다. 자기 부인의 사건은 자기 십자가의 사건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예수 가지신 그것으로 끝난 것이라는 굳은 생각 때문에 아예 자기 십자가는 없는 것입니다. 목회자들은 자기 십자가 사건의 거부는 자기 구원의 거부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알고 있다면 왜 그것을 교인들에게 가르치지 않고 예수님의 십자가만 팔아먹고 있는가?

목회자들의 거짓 가르침에 미혹에 빠지지 말아야합니다. 그들은 아직 세상과 결별하지 못한 교인들의 욕구를 충족시켜주고 자기들을 떠나가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항상 은혜와 축복 사랑, 그리고 평안만을 부르짖어서 교인들을 더욱 지옥 자식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마 24:24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  그러면 자기를 부인하는 사건은 누구에게 오는 것인가?  그 문제에서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의 "광야"에서의 시험의 사건을 자기에게 적용해야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나가서 40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 마귀에게 받은 세 가지 시험은 예수의 것만이 아닙니다.

그를 믿는 오늘날기독교인들도 그 시험을 통과해야 합니다. 현실의 삶 속에서 시시각각 계속해서 기독교인들에게도 부닥쳐 오는 이 세 가지 시험은 예수님뿐만이 아니라 기독교인들에게도 자기 부인의 문제를 가름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는 기독교인들의 신앙의 모본이십니다.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후에 "광야"에서 받으신 마귀의 시험은 예수의 자기의 부인의 사건입니다. 이 사건 후에 세례 요한의 역할은 끝나고 예수님의 사역이 시작되는 사실은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 가지 시험을 상기해보면  첫 번째   마 4:3-4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 덩이가 되게 하라,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마귀를 교활하고 치사한 존재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에서 보면 마귀는 아주 대담하면서도 신사적입니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고도 시험하는 것도 대단하지만 예수의 단 한마디 대답에 즉시 알아듣고 물러서는 마귀도 대단한 것입니다. 오늘날 예수를 믿는 기독교인들을 대할 때 성경에 기록된 말씀으로 답변을 대신하면 성경은 풀기 나름이라고 억지를 부리는 것과 비교하면 예수를 시험하는 마귀는 얼마나 인격적이고 신사적인지 모릅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의 현실은 어떤가? "성령세례"를 받아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기독교인들은 마귀의 시험을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주기도문대로 시험에 들지 않도록 해달라고 기도나 할 것인가?

그 기도문은 미혹의 명수 마귀가 자기 기도를 살짝 바꾸어 놓은 것인데  그런 사실도 모르고 그런 기도를 매일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현실의 모든 문제들이 기독교인들에게 시험으로 다가와야 합니다. 이 세상일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기독교인들에게 감당된다면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자녀도 아니고 실력 있는 마귀도 될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성경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성경 어디를 보아도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시험이 올 것이라고 기록되어있는데, 오늘날 기독교인들에게 시험이 없으면 기독교인들은 마귀의 자식이요 사생자라는 것입니다.  히 12:7-8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며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또 야고보 사도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약 1:12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그러면 왜 주기도문에는 우리를 시험에 들게 마옵시고 라고 하였을까?  그것은 번역자들이 우리말 표현의 미묘함 때문입니다. 원문 성경 흐름이나 번역 상으로 시험에 들게 하시되 쭉 빠져버리지 않고 견뎌내어 나올 수 있게 해 달라는 의미의 기도인 것입니다. 주기도문 원어를 살피지 않고 생명의 흐름으로 보아도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면 당연히 세상은 기독교인들을 미워할 것이요, 하나님이 기독교인들을 사랑하시면 징계와 연단의 고통으로 기독교인들을 시험에 내어주신다고 하셨으니 주기도문은 잘 못된 것입니다.  시편 91:15 저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응답하리라 저희 환난 때에 내가 저와 함께 하여 저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오늘날 기독교에서 주기도문이 잘 못된 것이 이뿐인가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해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해달라"는 기도도 완전히 잘 못된 해석입니다. 어떻게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해줄 수 있는 자격이 있는가입니다. 그 잘못된 기도문이 한국기독교의 현실입니다. 세상에서 "출 애급 때"(탈출)의 이스라엘백성의 교회는 "광야" 이었습니다. 그 "광야"는 신약시대의 오늘날의 교회의 상징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인 기독교인들이 시험받아야 할 "광야"는 바로 교회임을 알 때 마귀의 정체를 어렴풋이 이해 할 수 있습니다. 예수가 세례를 받은 후 성령에 이끌리어 "광야"에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은 것처럼 오늘날기독교인들도 세례를 받았으면 성령에 이끌리어 교회(광야)에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을 때에 성경 말씀으로 마귀를 물리칠 터인데, 생명의 말씀을 떡으로 가르쳐도 무조건 아멘 할렐루야로 화답하고 있으니 어찌 그들이 "광야"의 시험을 통과 하겠는가?

오늘날 기독교의 주기도문인 예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가 아니라 마귀가 가르친 기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는 세상에서 박해받으며 피 흘리며 순교를 당해야 하지만 이들은 세상에 속해 있기 때문에 세상만사가 형통하는 축복의 소리만이 가득한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너도 나도 축복받으려고 열심히 교회에 나가고 축복기도 해주시는 목사님들이 최고인 것입니다. 두 번째 시험   마 4:5-7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하였으되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였느니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하였느니라  떡으로만 사는 사람들은 마귀의 시험을 받을 자격도 없습니다. 반드시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자만이 성령에게 이끌리어 "광야"에서 시험을 받을 자격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귀의 실력을 보라 그는 벌써 성경을 꿰뚫고 있지 않은가?  예수가 어떤 말을 할지라도 이미 성경을 잘 알고 있으므로 성경으로 응수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지 않는 사람은 마귀가 거들떠보지도 않습니다. 내버려 두어도 스스로 축복받았다고 믿고 예수의 이름으로 마귀에게 경배합니다.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려면 하나님께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첫 번째 시험에서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마귀에게 인계되어 떡에 대한 시험을 받습니다. 이렇게 되면 사람은 죽지 않으면 마귀가 되거나 환상을 보게 됩니다. 이 상태에서 건져주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떡에 대한 깨달음이 있은 후에 마귀는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인도합니다. 다시 말하면 거룩한 예루살렘 성까지는 마귀와 함께하는 삶입니다. 그 고통스럽고 긴 마귀와의 싸움은 하나님의 말씀의 양식이 없으면 이길 수 없는 것입니다.

"광야"에는 바벨론이라는 성이 있습니다. 그 견고한 바벨론 성이 무너져야 새 예루살렘을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마귀는 오늘날 기독교인들을 성전 꼭대기에 세웠습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뛰어내리라,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자녀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지금 마귀는 스스로 뛰어내려 죽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뛰어내려야 합니다. 새 예루살렘 성은 첫 사람이 죽어야 들어갈 수 있는 곳입니다.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자녀라면 떨어져 죽어야 합니다. 마귀도 예수도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자신을 바닥으로 던질 때 비로소 죽음과 삶이 정리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약 1:13-15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오늘날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가 화려하고 네온사인으로 치장하여 번쩍거리며 높이 달려있습니다. 마치 마귀가 예수를 성전 꼭대기에 세워놓은 모습 그대로 꼼짝도 못 하고 있습니다. 온통 하나님을 시험하는 교인들뿐인 한국교회의 앞날을 걱정이라도 하는 듯 그렇게 서있습니다. 십자가는 예수 만지고 자신들은 그 은혜로 구원받고 축복이나 받아 화려한 인생을 즐기려 합니다. 마귀는 어떤 돈이라도 좋으니 "온전한 십일조"를 바쳐 부자 되게 하나 하지 않나 시험해보라고 합니다. 이제 제발 교회 꼭대기에 세워진 십자가에서 예수를 내려드리고 기독교인들 자신이 그 십자가에 달려야 합니다. 그 길만이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하늘에서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으로 기록되는 일입니다.

세 번째 시험은   마 4:8-9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가로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사람이 사는 세상에는 "신"이 없는 곳이 없습니다. 사람이 스스로 만들어놓은 무수히 많은 "신"(神)들을 섬기면서 살아왔습니다. 기독교도 예외는 아니어서 오늘날 그 많은 "신"들 중 십자가에 하나님이라는 새로운 "신"을 만들어 놓고 경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자들은 축복받아 부자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병든 자들은 건강하게 오래 살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아이 못 낳는 자는 아이 낳게 해달라고, 사업하는 사람은 사업 잘되어 돈 벌게 해달라고, 수험생의 부모는 자기 자식 합격해달라고, 매일 같이 교회에 나가 새벽기도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많은 "신"들 중에 하나님이 되시어 초라하게 인간들의 코 묻은 돈 몇 푼 받으시고 축복해주시기 바쁜 하나님입니다.

무엇이 "우상 하나님"인가?  단군상이 우상이라고 때려 부수지 말고, 절간에 가서 불상 때려 부수지 말고, 바로 오늘날 기독교인들의 머릿속에 있는 그 하나님이 바로 "우상 하나님"이 아닌지 확인해 보시라,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마귀에게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달라고 조른 사람이 아닌가?  이제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마귀를 따라서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야 합니다. 노아의 방주가 머물렀던 그 산으로 올라가야 합니다. 그곳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곳은 마귀에게 경배하는 곳이 아니라, 다만 주 하나님만 경배하고 그를 섬길 것이라 했습니다.  계 21:10-11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하나님의 영광이 있으매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같이 맑더라, 이 세상에서 오늘날 기독교인들의 현실은 계속 시험의 연속입니다.

그 고통의 연속이 기독교인들의 신앙이요 신앙은 끝없는 거듭남의 삶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의 시험은 기독교인들의 시험이요 예수의 십자가도 기독교인들의 십자가인 것입니다. 그래야 예수의 영광 또한 기독교인들과 함께하는 영광이 됩니다.  고전 10:12-14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그런즉 내 사랑하는 자들아 우상 숭배하는 일을 피하라 당신을 시험한 마귀는 누구며 어디에 있습니까?

(원문 출처:새사람 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