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말씀 1

물고기를 잡으러 가는 시몬베드로 *

제라늄A 2021. 6. 2. 21:03

요한복음 21:3~11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매 저희가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이 밤에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 신줄 알지 못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가라사대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이에 던졌더니 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내리더라, 다른 제자들은 육지에서 상거가 불과 한 오십 간쯤 되므로 작은 배를 타고 고기든 그물을 끌고 와서 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 하신대 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올리니 가득히 찬 큰 물고기가 “153마리”라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

상기의 말씀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의 한 장면입니다. 베드로는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 허탈한 마음으로 나는 “물고기”잡으러 가겠다고 말하니 다른 제자들도 우리도 함께 가겠다고 하여 나아가 배에 올라 “물고기”를 잡으려 하였으나 그 밤에 한 마리도 잡지 못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본래 “물고기”잡던 어부였기 때문에 다시 “물고기”를 잡으려고 디베랴 바다에 그물을 던진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잡으려는 “물고기”는  실제로 “물고기”가 아니라, “애급”이라는 세상에서 종교생활을 하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비유”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는 "바다"는 이 세상을 “비유”해서 말하며 “물고기”는 아직 육신에 속한 하나님의 백성들을 “비유”하여 “물고기”라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기독교는 “애급”이라는 세상에서 종교 생활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신앙생활을 하는 “물고기”들이 거짓된 종교에서 “출애굽”(탈출)을 하여 “광야”로 나오면 “들짐승”이 되는 것이며 “광야”“들짐승”이 거짓된 종교에서 받은 “비 진리”로 형성된 거짓된 자들이 “광야”에서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징계와 연단”을 받아 깨끗해지면 “육 축”의 영적 상태로 거듭나게 되는데 “육 축”(양)은 곧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르는 육 축 “양”들 즉 예수님의 제자들의 영적 상태를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내 “양들”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물고기”“짐승들”이나 “육 축”들은 모두 하나님의 백성들의 영적 상태를 분류하여 “비유”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어둠의 존재들을 모두 “물고기”나 각종 짐승으로 “비유”합니다.  욥기 12:7 모든 짐승에게 물어보라 그것들이 네게 가르치리라 공중의 새에게 물어 보라 그것들이 또한 네게 고하리라 바다의 고기도 네게 설명하리라,  이같이 성경에서는 어둠의 존재를 “짐승”이나 “물고기”“비유”합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물고기”를 잡으려고 그물을 바다에 던졌지만 밤새도록 한 마리도 잡지 못한 것입니다. 시간이 흘러 날이 새려고 할 때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 베드로가 “물고기”잡고 있는 바닷가에 나타나셨으나 제자들이 부활한 예수이신 줄 알아보지 못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때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물고기”가 있느냐 물으니 없다고 대답합니다. “물고기”가 없다는 말을 들으신 예수님은 그러면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고 말씀하시어 그물을 오른편에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이 잡혔는데 그물을 들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잡혔다고 본 문장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모두 “비유와 비사”의 말씀이듯이 배의 “왼편”은 넓고 평탄한 멸망의 길을 가는 자들을 “비사”로 말하는 것이며 “오른편”은 좁고 협착한 생명의 길을 가는 자들을 “비사”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오른편”강도가 구원받는 말씀과 똑같은 말씀입니다.

베드로가 그물을 “오른편”에 던져 잡으려는 “물고기”는 좁고 협착한 생명의 길을 찾고 있는 거짓된 종교에서 탈출한 “고아, 과부, 나그네”들을 “비유”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물고기”를 잡고 있는 제자들에게 모습을 드러내어 말씀까지 하셨으나 제자들은 그분이 예수님인 줄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왜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몰라보았을 까요?  아래의 문장을 잘 관찰하시기 바랍니다. 

요한복음 20:15 예수께서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 기인 줄로 알고 주여 당신이 옮겨 갔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말하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 가리이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나타나셨는데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혹시 당신이 예수의 시체를 가져갔는지 내가 알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마리아”가 이 말을 하고 뒤를 돌아보니 “예수”의 서신 것을 보았으나 “마리아”“예수”를 보면서도 그가 “예수”인지 알지 못했다고 합니다. “왜” 마리아가 부활한 예수를 몰라보았을까요?  이 말씀을 오늘날까지 기독교 신학자들도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것입니다.

상기의 말씀은 “예수”께서 부활하시어 무덤에서 나오실 때 “예수”의 무덤을 지키던 “마리아”가 부활하신 “예수”를 보고 그 모습이 십자가전 “예수”의 모습이 아니라 전혀 다른 사람의 모습으로 부활하신 것을 보고 동산지기로 알고 혹시 당신이 예수를 옮겨 갔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말하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예수”가 죽고 “예수”가 부활하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왜” 다른 사람의 몸을 입고 부활하셨는지를 아는 사람은 오늘날까지 기독교인들은 한 사람도 없다는 것입니다. 또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 바닷가에 제자들 앞에 나타나셨는데 제자들도 “예수”를 알아본 자들이 한 명도 없었습니다.  요한복음 21:4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인 줄 알지 못하는지라,  이같이 “예수”께서 다른 사람의 몸으로 부활했기 때문에 제자들도 아무도 예수를 못 알아본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 “다른 사람”의 몸을 입고 “부활”하신 분은 십자가 전의 예수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듭난 다른 사람이 거듭나서 예수로 “부활”하셨기 때문에 “부활”하시기 전의 예수의 모습과 “부활”하신 후의 “예수의 모습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제자들이 그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소리를 가만히 듣고 보니 예전의 예수와 똑같은 말을 하기 때문에 베드로가 주님이시다 하면서 베드로가 놀라서 "겉옷을 두르고 바다로 뛰어내렸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베드로가 놀라서 급히 "겉옷을 두르고 바다로 뛰어내렸다"는 말도  베드로가 본능적으로 순간적으로 옛날 세상에서 소유했던 "비 진리의 옷"을 입은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21:8~11 “다른 제자들은 육지에서 상거가 불과 한 오십 간쯤 되므로 작은 배를 타고 고기든 그물을 끌고 와서 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었느니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 하신대 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올리니 가득히 찬 큰 물고기가 153마리라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  이런 말씀들이 일상용어로 기록되어 있지만 모두 “비유 비사”로 깊이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내용만 해석해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의 몸을 입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준비된 “생선”이나 “떡”을 드시지 않고 제자들에게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드셔야 할 “물고기 생선”은 우리가 먹는 “물고기 생선”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져 잡은 생명의 좁은 길을 가는 자들인 거짓된 기독교를 탈출한 “고아, 과부, 나그네”들인 “물고기”“비유”한 자들에게  말씀을 전하는 것이 예수님이 먹어야 할 “양식”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물고기”들도 먹어야 할 “양식”은  예수님의 말씀을 먹는 것이 “물고기”들이 먹어야 할 “양식”이 되는 것입니다.  ※  요한복음 4: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베드로가 달려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올리니 가득 찬 큰 “물고기”“153 마리”나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153마리”의 숫자도 영적 의미가 깊이 숨겨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153”이라는 숫자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양육한 “물고기”들이 예수님의 제자들과 같이 “애급, 광야, 가나안 3일”길을 통과한 완성된 자들을 “120”으로 “비유”한 것입니다. 이들이 오순절 날 다락방에 “120”문도들을 “비유”한 것입니다. 그리고 “30”이라는 숫자는 예수님의 나이 “30세”에 요단강에서 침례를 받고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도 “애급, 광야, 가나안 3일” 길을 완성한 숫자를 “비유”한 것이고 또 예수께서 “3일”“부활”하신 것도 “애급, 광야, 가나안 3일” 길을 “비유”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합계가 120+30+3=153 입니다. 이같이 숫자에도 영적으로 깊은 뜻이 감춰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21:12~13 예수께서 가라사대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주(예수) 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예수께서 떡을 가져다가 저희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와서 조반을 먹으라고 말씀하시니 제자들이 이제 예수의 말씀을 듣고 보니 십자가 전의 예수님의 말씀과 똑 같이 말씀하시기 때문에  아!  이 사람이 다른 사람의 몸을 입은 예수이신 줄 이 때야 알았기 때문에 당신이 누구냐고 다시 묻는 자가 없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주는 떡과 생선을 앉아서 받아먹기 전에 예수님이 먼저 일어나 제자들에게 떡을 가져다가 주시고 생선도 주신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이런 글을 읽으시면서 예수님이 주시는 떡과 생선이 무엇인지 이해를 하시고 읽으셔야 합니다. 이런 말씀들이 일상용어로 기록이 되어있지만 모두가 “비유 비사”로 기록된 말씀이라는 것을 아시고 성경을 읽으셔야 합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섬기면서 사랑하신 것입니다. 때문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몸소 본을 보이면서 제자들에게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에 따라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행하신 일들과 같이 이웃에 죽어가는 영혼들을 사랑으로 섬기며 구원의 사역을 감당하신 것입니다.   

(원문 출처:새사람 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