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 2:18-20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금식하고 있는지라, 예수께 와서 말하되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나니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이사야 58:6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다니엘 10:2-3 그 때에 나 다니엘이 세이레 동안을 슬퍼하며 세이레가 차기까지 좋은 떡을 먹지 아니하며 고기와 포도주를 입에 넣지 아니하며 또 기름을 바르지 아니하니라, 오늘날기독교인들은 “금식“의 뜻이 무엇인지 제대로 아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아니 한 사람도 만나 본 적이 없습니다. 성경의 문자는 문자일 뿐입니다. 성경은 “안팎”(계5:1)으로 “비유비사”로 기록한 책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은 “비유비사”로 된 그 문자 속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참 뜻이 무엇인지 일관되게 알지 못하듯이, “금식”에 대해서도 또한 그렇습니다. 겨우 한다는 소리가 이사야에 나와 있는 말씀.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이것을 줄기차게 외워댈 뿐입니다. “금식”과 결박을 풀어주는 일의 상관관계를 전혀 모르는 채 말입니다. 모든 살아 있는 생물체는 먹어야만 삽니다. “금식”하면 쇠락해져 결국 죽음에까지 이릅니다. 그럼에도 이사야의 “금식”을 앵무새처럼 금과옥조로 외쳐대는 오늘날 기독교인들의 이유는 아마도 문장 서두에 하나님이 “나의 기뻐하는 금식”이라고 장식되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성경문자에 갇혀서 자신을 학대하는 “금식”을 곧잘 행하지만 그것은 죽은 율법을 지키는 “우상”을 섬기는 어리석은 행위이며 “금식”이라는 자기학대가 왜 압제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는 일인지에 대한 설명은 단 한마디도 없습니다. 내가 굶주림으로 인하여 왜 내 이웃이 자유케 되는지를 필히 설명해 내야만 함에도. “금식”이란 과연 무엇인가? “금식”이란 사람들이 먹는 음식물에 대한 문자적 “금식”을 말함이 아니고 오늘날 기독교목사들이 전하는 신학교에서 배운 “비 진리”의 거짓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양식”을 먹지 말라는 뜻에서의 “금식”입니다. “금식”에 대한 성경문구는 많으나 아주 간략히 위의 네 문구만 발췌해 보았습니다.
마가복음에서 신랑이 있는 동안은 “금식”을 하지 않는다는 말씀과 이사야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는 일이라는 말씀과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의 “광야” 40일 “금식”의 말씀과 다니엘에서 세이레 동안 좋은 음식을 금했다는 “금식”의 말씀, 이렇게 넷인데 이 모든 “금식”에 대한 말씀은 결국 하나로 일관성 있게 풀어지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의 “광야” 40일 “금식”도, 다니엘의 세이레 “금식”도 모두 하나의 맥락으로 풀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는 수치상으로 “광야” 40일의 “금식”이나 이방 바벨론인 적그리스도에 사로잡혀간 다니엘의 “금식”이 모두 한 가지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의 유능한 소년인재들이 이방 바벨론 왕을 보좌하도록 뽑혀서 바벨론 왕이 먹는 산해진미인 “비 진리”를 먹도록 규정된 가운데 다니엘은 그것을 거부하고 채소만 먹도록 간청했습니다. 산해진미를 채소로 바꾼 것은 “금식”에 속한 것입니다. 첫째, 사람들이 요한의 제자들이나 바리세인들은 “금식”을 하는데 왜 예수님의 제자들은 “금식”을 하지 않는지 비판하자, 그때에 예수님은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을 하지 않는다고 하셨는데 이는 성경전체를 단 한 마디로 요약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창조를 6일 동안 하셨는데, 창조하는 6일 동안은 “참 진리”의 말씀이 없기 때입니다.
창조 여섯째 날까지는 오늘의 “실존예수님”이 오시지 않고 있는 때이므로, 성경을 창세로부터 “비유비사”로 “안팎”(계5:1)으로 감추어진 진리의 말씀을 풀어주시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지금까지 진리에 대해서 굶주리고 있어야 하는 “금식”의 때인 것입니다. 결코 음식물에 대한 “금식이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성경에서 “금식”을 하도록 하는 율법을 주셨는데 그것을 음식물인 문자적으로 율법적으로 지켜야 하는 때는 성경이 감추어진 구약 때이며 또 더 나아가 유대교에 예수님이 오셨다고 하더라도 그분이 구약 성경 한 줄 풀어주신 일이 없는 때는 계속 율법적 “금식”을 하고 있어야 하는 때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기독교에까지 기독교 교인들이 모두 율법적 문자적 음식물 “금식”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오늘날에도 “실존예수님”이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을 하지 않는다고 대응하신 것은 그분 자신이 오늘의 “실존예수님”으로 오셨을 때를 의미하고 있는 말씀을 하신 것이며, 이 또한 당시 예수님을 오늘날의 예수님으로 승격시켜 낸 “비유”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실존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창세부터 말씀을 풀어주심으로써 사람들이 하나님을 온전히 알게 됨으로 더 이상 진리에 대한 “금식”은 없으며 진리에 대한 “금식”이 없기 때문에 영생을 할 수 있는 혼인집 잔치가 있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동안 진리의 말씀이 없기 때문에 오늘날 기독교는 “비 진리”로 배불리 먹고 있었는데 그 “비 진리”를 금하라는 뜻에서 “금식”하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창조해 오신 창세기의 “6일 천지창조”를 하는 동안 누가 과연 제대로 된 “금식”을 했단 말인가? 아무도 없었습니다. “금식”은 “금식”이지만 그것은 문자 그대로 행하는 율법적 “금식”을 했기 때문에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기는커녕, 자유케 하는 모든 멍에를 꺾어주기는커녕, 오히려 자신과 타인에게 고통을 가하는 압박과 학대의 문자적 음식을 안 먹는 “금식”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을 유대교 때 예수님이 행하셨다고 그분이 문자적 “금식”을 하지 못하도록 하셨던가? 그분이 문자적 “금식”을 하지 못하도록 해주심으로써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모든 멍에를 꺾어주셨던가? 아닙니다. 그분은 여전히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은 예수님의 말씀을 먹어야 하는 “금식”할 필요가 없다는 뜻만 밝혀주심으로써 “금식”에 대해서도 여전히 “비유”를 베풀고 계셨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은 “금식”을 하지 않기 때문에 신랑을 빼앗기게 되면 아무것도 먹지 말아야 하는 “금식”을 하게 된다는 뜻이며, 그것은 신랑이 없을 때는 “금식”을 해야 함을 말씀하신 것이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너희의 “멍에”(율법)를 가볍게 하신다고만 하셨지 멍에를 완전히 풀어주신다고 하시지는 아니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말씀도 여전히 “비유비사”로 말씀하시기 때문에, 그 “비유”의 멍에에서 아직 벗어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도 유대교 때는 이사야에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금식”을 완전히 이루신 분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은 오늘날의 “실존예수님” 때 기필코 이루셔서 사람들의 결박을 풀어주시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면 오늘날 “실존예수님”만이 오늘날 “말씀”을 풀어주심으로 말미암아 더는 기독교 “비 진리”가 발붙이지 못하도록 하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의 멍에를 풀어주시고 따라서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광야”에서 40일 “금식”하신 끝에 시험받으셨는데 “광야”의 40일 금식이란 40수는 고난의 길을 상징하는 숫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시켜 이스라엘민족을 “광야”로 “출 애급”시켰습니다. “애급”에서는 비록 종살이지만 먹을 것이 풍부했던 반면 “출 애급” 한 “광야”에서는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겨우 만나로 목숨을 부지해야만 했고 맛이 없는 “무교병”과 쓴 나물로 유월절행사를 치르며 무려 40년간 고난의 길을 가면서 “광야”에서 온갖 고초를 겪었습니다.
그러한 고난의 민족적 “광야” 40년 행군을 예수님은 공생에 시초에서 광야 40일 “금식”으로 대입해서 보여주셨습니다. “광야”의 상대적 의미는 엄밀히 말해 하나님의 “지성소”가 됩니다. 성전도 둘이 있으나, 넓은 의미에서 첫 “성소”는 “광야”에 속하고 둘째 “지성소”에서 하나님이 마침내 영생을 주시는 구원을 이루시는데, 그 “지성소”만이 진정한 “성소”가 되고 나머지는 모두 성전 밖 “광야”가 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창조 “6일 천지창조”에서 오늘의 “실존예수님”인 그분이 오시기 직전 여섯째 날이 되기까지는 모두 “광야”이고, 그 “광야”에서는 하나님을 아는 “참 진리”는 없고 모두 “광야”에 살고 있는 뱀과 온갖 악한 짐승들의 “비 진리”인 거짓된 오늘날 기독교 문자 성경 “신학교리”만 있기 때문에 그 “비 진리”를 멀리하라는 뜻에서 “금식”을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원문 출처:새사람 블로그) 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