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과 영생의 과정

거짓을 진리로 착각하는 기독교인들,

제라늄A 2023. 11. 11. 00:56

고전 10:1-5 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모두가 같은 신령한 음식을 먹으며 모두가 같은 신령한 음료를 뒤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니,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그러나 그들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셨으므로 그들이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거짓을 붙들고 진리로 나아가지 아니한 기독교인들에게 이보다 더 확실한 경고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귀를 열고 들으려는 사람이 없는데 사도바울의 나팔소리도 허공을 칠 뿐입니다.

사도바울은 본문에 이어지는 6절에서  "이러한 일은 우리의 본보기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그들이 악을 즐겨한 것 같이 즐겨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우선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 과정에서 어디까지가 애급이며, 어디서부터 광야이며, 어디까지가 가나안이라고 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애급은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몸담고 있는 교회이고, 광야는 진리를 찾아 방황하는 고아 과부 나그네와 같은 자들을 말하며, 가나안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이지만 그냥 들어가는 곳이 아니라 싸워서 침노해야만 들어가는 땅입니다.

여호수아와 그 군대는 가나안 땅에 살고 있는 토착민들과 싸워서 정복했지만,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은 자기 마음속에 살고 있는 죄와 싸워서 이겨야 들어갈 땅입니다. 대체로 보아서 홍해를 건너기 전을 애급이라 한다면 요단강을 건넌 후의 땅을 가나안이라고 합니다. 홍해와 요단강이 애급과 광야 그리고 가나안을 구분 짓는 경계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애급과 광야 그리고 가나안에 있어서의 삶의 모습과 삶의 목적 등에 대해서는 설명하려면 많은 언급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주로 양식(떡)의 문제만 관련시켜 살펴보기로 합니다. 애급의 양식이 유교병 가감된 말씀이었다면, 광야의 양식은 무교병 율법의 말씀이었고, 가나안땅의 양식은 진설병 생명의 말씀입니다.

출애굽의 사건은 단지 하나의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적인 사실이 아닙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에게 있어 천국으로 가는 길을 하나의 거울이 되는 사건입니다. 거울이라 함은 출애굽 사건 전체를 개개인이 자기 삶으로 살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급 왕 바로에 의해 자유를 빼앗기고 종노릇 하고 있는 삶도 나의 삶에서 실제적이라는 말이고, 홍해를 건너고 광야를 지나서,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에의 입성이 모두 나의 삶에서 실제적으로 일어난다는 뜻입니다. 어쨌거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의 인도에 따라 애급을 뒤로하고 홍해를 건넘으로써 비로소 가나안을 향한 첫 발걸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홍해를 건너지 못하고 애급 왕 바로가 보낸 군대에 의해 붙잡혔다면 헛일이었을 것입니다.

애급과 광야를 갈라놓는 사건이 바로 홍해를 건넘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기상천외한 기적을 바울은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았다고 해석하였습니다. 즉 출애굽기 13장 마지막의 구름기둥 불기둥의 인도하에 이스라엘 백성은 14장에서 홍해를 건너게 되는데 사도 바울은 이 사건을 세례 받는 사건으로 신약에서 해석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의 신앙생활에 있어 세례(침례)라는 것의 의미는 홍해를 건너는 것입니다. 거꾸로 말한다면 홍해를 건너는 것이 세례이지 물을 찍어 바르는 것이 세례 받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예수가 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것은 홍해를 건너 광야로 진입하는 의미입니다.

세례 요한은 로 세례를 베푸는 사람이라면 요한의 뒤에 오시는 이(예수그리스도)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는 분입니다. 그렇다면 예수그리스도의 성령세례는 무엇이며, 요한의 물세례는 또한 무엇인가? 요한의 세례는 죄 사함을 향한 방향의 전환이 그 핵심이고 물은 그 형식입니다. 회개라는 말의 뜻은 지금까지 걸어온 길이나 살아온 삶으로부터 돌이켜 새로운 길을 향하는 것을 회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지금까지의 삶과는 다른 새로운 삶을 향한 지향이며 당연히 과거의 삶에 대한 포기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의 물세례는 물 몇 방울 찍어 발랐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과거의 삶으로부터 단절되고. 새로운 삶을 향해 나아가는 삶의 구체적인 사건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회개의 세례인 것입니다.

홍해를 건너는 사건이야말로 가장 확실한 회개의 사건이 아닌가!  애급의 삶을 포기하지 않고서는 건널 수 없는 경계가 곧 홍해입니다. 홍해를 건넜다는 것은 애급의 포기며 가나안을 향하여 일보를 내디딤입니다. 세상에서 하나님에게로의 대장정의 시작입니다. 다시 말한다면 세례는 애급과 광야 사이에 놓여 있는 홍해라는 것이지 결코 애급에서 선한 양심의 사람이 되려고 몸부림치는 일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제 세례 요한이 말한 바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거니와 그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리라"(막1:8)는 말과 예수가 니고데모에게 말할 때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3:5)고 한 말을 기억해야 합니다. 선한 양심을 달라고 호소해서 받는 것이 바로 성령세례입니다.

물과 성령의 세례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과 같은 개념입니다. 물세례가 홍해라면 성령세례는 요단강입니다. 물론 성령세례가 어디라고 성경이 일러주지는 않습니다. 물세례와 성령세례, 물과 성령의 거듭남을 하나의 표로 만들어 보면 아래 도표와 같습니다. 거듭 반복하는 말이지만 신앙생활의 목적지는 광야가 아니라, 가나안에 들어가야 합니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기독교인이라면 광야는 거짓된 애급이라는 세상교회에서 탈출하여 진리를 찾아 방황하며 이 교회 저 교회로 문전걸식하는 거지나사로와 같은 자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위의 표에서 본 바와 같이 광야(교회)는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하여 우리가 거쳐야 하는 과정입니다. 이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다만 본인 스스로가 그러한 과정을 알고 지나느냐 모르고 지나느냐의 차이는 있겠지만 누구나 예외 없이 거쳐야 하는 과정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받는 세례는 물세례입니다. 그것도 세례의 실체가 아니라 의식에 불과한 것입니다. 마치 유대교에 있어서의 할례가 육신적 할례가 아니라 마음과 귀의 할례였듯이 기독교의 세례 역시 그러합니다. 교회에서 목사에게 물로 세례 받은 것을 가지고 홍해를 건넌 줄 착각하면 곤란합니다. 물세례의 실체는 홍해를 건너는 것입니다. 그동안 정든 애굽(세상) 산천 다 버리고 다시는 올 수 없는 곳으로 기약 없는 나그네 길을 떠남입니다. 물론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생활을 하는 동안 애급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운동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현실적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습니다.

애급에 대한 실질적인 포기와 가나안을 향한 출발이 세례지 물 몇 방울 적셨다고 세례 교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바울이 육신의 할례를 철폐하고자 했듯이 오늘날 우리도 그림자 세례를 벗어버리려야 합니다. 홍해를 건너는 세례는 그러한 형식이 아니라 가르침을 통한 성경의 깨달음입니다. 의 세계에서 의 세계로의 돌이킴입니다. 어떤 형식을 가졌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삶의 내용이 어땠느냐가 중요합니다. "목숨이 음식보다 중요하고 몸이 의복보다 중요합니다"(마6:25)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허상을 붙들고 실상을 외면하는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입니다.

(원문 출처:새사람 블로그) 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