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6일창조의...

“태초”라는 단어의 잘못된 해석

제라늄A 2023. 11. 30. 18:45

요한복음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니라,  말씀의 실체가 곧 하나님이십니다. 태초는 원문에 헬라어 “아르케”로 기록되어 있으며 히브리어는 “베레스트”로 기록되어 있는데  “태초라는 단어는 근원 우두머리 최상의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태초라는 뜻은 시간의 개념보다는 “성부하나님”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시공을 초월해 계신 분으로 시작 안에 갇혀계신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글성경이나 영어성경에 “태초를 시작의 개념으로 in the bigjning으로 번역하여 어느 기점이나 시작하는 때로 오역을 해놓은 것입니다. 
이렇게 “태초”는 시작이 아니라 “성부하나님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요 1:1이나 창 1:1의 “태초의 뜻을 모르면 성경전체를 모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엘로힘)이라는 단어는 단수”가 아니라 “복수이기 때문에 엘로힘이라는 단어는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창세기 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라는  말씀의 뜻은 “태초(하나님) 안에 있는 성자하나님들(엘로힘)들이 땅을 하늘로 창조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는 예수님은 “독생자”한 분이라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독생자라는 뜻은 유일하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의미입니다.  
창세기 1:26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이렇게 우리라는 복수형의 하나님들이 창조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부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창조의 사역, 즉 구원과 심판을 직접 하지 않고 모두 “성자예수님”에게 위임하셨기 때문입니다. 성부하나님”께서 말씀이 육신 되신 분이 “예수님”이신데 평범한 인간으로 성장하다 나이 30세에 육신 안에 말씀(성령)이 임하여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을 때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리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받고 오신 “예수님”을  오늘날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기 때문에 충분히 마리아가 남자의 를 받지 않고 성령이 잉태되어 예수가 태어났다고 믿고 있는 것이 오늘날 기독교 신학교리입니다.  
이렇게 무지막지한 교리가 오늘날 기독교의 교리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이 육신 되어 오신 “실존예수님”이 유대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유대 땅에 오셨으나  유대인들이 “실존예수님”을 알아보는 사람은 물론 믿는 사람조차 없었고 오히려 이단으로 배척하고 결국은 죽이기까지 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물론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12제자들도 예수를 알 수 없기 때문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할 때 예수께서는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하느냐고 제자들을 책망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통해서 자신을 드러내어 증명하신 것입니다. 때문에 예수는 곧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형상이라(고후4:4)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 자신을 예수님의 몸을 통해서 드러내셨기 때문에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며 하나님의 실체인 것입니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예수”의 몸으로 오셨는데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보고도 몰랐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비밀이 곧 예수님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비밀은 모두 예수님 안에 감추어져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 알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예수를 아는 것이 영생이라(요17:3)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예수를 아는 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것이 곧 영생에 이른 자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영생에 이르러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오신 “실존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의 “씨로 오늘날까지 낳고 낳고의 역사를 통해서 오늘날도 계신 것입니다.  
눅 8:11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하나님의 말씀이 씨”라면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을 낳는 것이 “씨의 본질입니다.  요 12:24 예수께서는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셨습니다.  씨앗과 열매는 성분이 똑같은 것입니다.  히 2:11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 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이같이 한 알의 밀알에서 똑같은 많은 형제들을 탄생시키신 것입니다.  롬 8:29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기 위하여 미리 정하였으니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께서 “맏아들”이라는 것은 “형제”들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는 “독생자”가 아니라 그 “씨”로 여러 형제들이 오늘날까지 내려오기 때문에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유대인들과 똑같이 영안이 없어 “실존예수”를 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난 하나님의 아들들만이 알 수 있고 증명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알려면 먼저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난 오늘날 “예수”를 먼저 찾아야 합니다. 그러면 오늘날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을 분명하게 알 수 있고 하나님을 직접 보고 얼굴과 얼굴을 맞대며 볼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영안이 없으면 하나님을 보여 주어도 보지 못하고 하나님에 대해서 아무리 설명을 하고 증명을 해도 들을 수조차 없다는 것입니다. 
소경은 보석을 손에 쥐고 있어도 보지 못하는 것과 같이 아직 하나님이 생명으로 거듭나지 못한 자들은 하나님을 알려고 논하는 자체가 무리이며 하나님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영안이 없어 보지 못하고 있을 뿐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을 보려고 하지 말고  오늘날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난 “실존예수님”을 구하고 찾고 두드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구원은 “실존예수가 있어야 구원이지 예수가 없는데 누가 구원을 시키겠습니까?  2000년 전에 “실존예수는 유대인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오셨으나 그들은 영접하지 않고 죽였고 오늘날 기독교안에도 “실존예수는 계시나 유대인들과 똑같이 영접하지 않고 배척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때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실존예수가 없다면 절대로 구원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기독교목사는 구원을 시킬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모두 예수에게 나타내셨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실존예수님”이 지금 기독교인들 앞에 와 계신다 해도 영안이 없으면 알아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실존예수님”은 지금 여러분 옆에 계십니다. 그러므로 필자(새사람)이 만난 “실존예수”를 이 사람이 “실존예수”다 알려 드려도 믿을 사람은 한 사람도 없고 그분의 말씀을 영접하여 성장하게 되면 그때 그분이 누구신지 본인 자신이 시인하지 말라 해도 자신이 시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원문 출처:새사람 블로그) 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