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님의 “산상수훈”의 9복(福) ”
(마태복음 5:1~12 본문생약) 본문 말씀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영적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기록한 말씀인데 오늘날 기독교는 “산상수훈”의 말씀을 썩어질 세상 “복”으로 해석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팔복”이 아니라, “구, 복”입니다. 왜냐하면 마지막에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라는 “복”까지 “9, 복”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9, 복”은 심령이 가난한 자가 받는 복으로 시작하여 하나님의 아들로 거듭나 천국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상급을 받는 복까지 “9, 복”으로 분리하여 말씀하신 것인데 오늘날 기독교는 상기의 “산상수훈”의 예수님의 하늘의 영적인 말씀을 세상의 썩어 없어질 “기복”의 말씀으로 둔갑시켜 예수님의 말씀을 “비 진리”로 왜곡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도 기독교인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 그러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9, 복”의 과정을 구체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기독교인들에게는 “아주중요”합니다.
[첫째]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인데 무엇이 가난한가? 가난하다는 뜻은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는데 여기에 심령이 가난하다라 뜻은 “영”이 가난하다는 것입니다. “영”이라는 것은 원문에 “푸뉴마”곧 하나님의 말씀을 뜻 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말씀이라고 해서 다 같은 말씀이 아니라, 여기서 말하는 말씀은 “생명”(씨)이 있는 진리의 말씀 즉 “죽은 자”를 살릴 수 있는 “산 자”의 입에서 직접 나오는 “음성”생명의 말씀을 뜻합니다. 오늘날 기독교목회자가 말씀을 전한다 해서 다 같은 말씀이 아닙니다. 말씀에는 두 종류의 말씀이 있는데 썩는 말씀과 썩지 않는 말씀이 있습니다.
벧전 1:23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누가복음 8:11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하나님의 말씀은 “씨”(혈통)라고 합니다. 예수님같이 천국을 이루고 있는 “산 자” 안에만 생명(씨)의 말씀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생명의 말씀이 없는 자들이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입니다. 이 생명의 말씀을 갈급해하는 자들이 천국이 저희 것이라는 것입니다.
[둘째]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무엇 때문에 애통하는가? 심령이 가난한 자는 진리의 말씀이 없어서 애통하는 것입니다. 진리가 없기 때문에 마음에 평강이 없기 때문에 애통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이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는 것은 무슨 “복”을 말하는가? 세상의 썩어질 “복”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생의 “복”을 말 하는 것입니다(시133:3) 이 영생의 “복”은 바로 “생명의 말씀”(유로기아)을 통해서 얻어지는 “복”입니다.
[셋째]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란 온순하고 마음이 착한 자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성경을 볼 때 항상 “영”의 차원에서 말씀을 봐야지 “육”의 차원에서 성경을 보면 말씀이 왜곡될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 이 말씀에서 “온유”한 자란, 심령이 가난해서 진리의 말씀의 “복”을 받고 애통해서 위로를 받아서 마음이 그렇게 되서 “온유”한 자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기도나 회개를 해서 얻어지는 “온유”가 아니라, 하늘의 “복”을 받아서 “온유”한 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모든 “복”은 하늘로부터 오는 것이지 인간이나 어떤 종교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음은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는 것은 이 “땅”이란 이런 토지 즉 “땅”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서는 “땅”을 어둠의 존재 즉 거듭나지 못한 존재를 상징하는 말씀입니다.
이사야 1:2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이같이 “하늘”은 기독교 목회자 양육자를 상징하고 “땅”은 어둠의 존재를 상징한 말씀입니다. 그래서 “땅”을 기업으로 준다는 말씀은 어둠의 존재들을 구원받을 수 있게 즉 양육할 수 있도록 기업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넷째]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이 말씀에서 “의”에 주린다는 것은 생명의 말씀이 없어서 주려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땅”을 기업으로 받아서 양식을 팔 때 말씀이 부족해서 “의”에 주리고 말씀에 주려 목마른 자는 그 말씀이 임해서 저희가 배가 부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일하는 “소” 즉 일하는 일꾼에게 양식을 공급해 주신 다는 것입니다. 양육자가 느끼는 것은 그 “의”에 주리고 목이 말라 애통하는 자가 이곳저곳 기웃거리면서 이 교회 저 교회 따라다니면서 말씀을 얻어먹는 거지 나사로와 같은 자들에게 즉 홀로 된 “고아, 과부, 나그네”와 같은 그들에게 하나님은 배부르게 말씀이 넘치도록 채워 주신다는 것입니다.
[다섯째]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이 말씀은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반드시 그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아가페사랑”이 이루어진 자가 그 영혼을 “사랑”으로 구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깐 말씀이전에 자기 안에 저 영혼이 “긍휼히 여기는”마음이 있어야지 “사랑”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것이지 무조건적인 긍휼 한 마음이 없이 복음을 전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오늘날 기독교 목회자들은 윤리도덕인 “필로스사랑”밖에 없기 때문에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없이 복음을 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의 사랑이 글자는 똑같으나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의 “사랑”은 하늘과 땅처럼 다릅니다.
[여섯째]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이 말씀은 위에서 말한 다섯 가지 과정을 마치고 나면 마음이 청결해 깨끗해지는데 이런 자들이 바로 “정결한 처녀”요 “동정녀 마리아”또는 “슬기로운 5처녀”요 “남편이 5명 있는 수가성 여인”들이 마음이 청결한 자들입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거듭나고 “영안”이 열려 하나님을 보게 되고 하늘 문이 열려 “영”의 세계를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일곱째]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이렇게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난 자들은 “영”의 세계가 열려서 하나님의 “아가페사랑”으로 누가 하라고 안 해도 자연적으로 죄로 인해서 하나님과 가로막힌 영혼들을 구원해서 막힌 담을 헐어내어 화목하게 하는 이런 자들이 이때에 하나님의 아들로 일컬음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냥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길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길도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믿기만 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여덞째]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의”(義)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에 관한 것입니다. “의”(義)라는 것은 “생명의 말씀”을 전하는 자들에게 이단이라고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죄로 인하여 화평이 있는 곳에도 화평을 깨고자 하는 것이 세상인 것입니다(계6:4) 어디든지 이러한 죄의 영향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음이 또한 세상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는 자들에게는 어디에 어떻게 처하였든지 “의”(義)의 열매인 화평을 세웁니다. 이는 사탄마귀가 가장 싫어하는 일이니 결코 보고만 있지 않고 기독교인들을 통하여 핍박하게 할 것입니다.
[아홉째]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려 거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슬려 악한 말을 할 때 받는 복 하나님께서 주시는 상급이 큼이라, 예수님의 복음 때문에 핍박을 받는 자는 이미 천국 안에 든 자로서 천국이 자신의 것으로 받는 복(福)이 임하는 것입니다. 예수의 이러한 교훈에 의하여 사는 이들을 향하여 대적하는 무리들은 욕과 핍박과 온갖 거짓으로 모함을 하는 악한 말로 나오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이로 인하여 도리어 하늘에 큰 상이 예비 되는 복(福)이 있으니 기뻐하고 즐거움으로 예수를 위한 자가 되라고 격려로서 9복(福)에 교훈을 일단락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 것은 바로 이러함을 위하여 부르심을 입게 된 것이며, 이는 또 그리스도의 본을 받아 그 자취를 따르게 하기 위함이며 궁극적으론 그 나라에 유업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은 오늘날도 진리를 소유한 자와 비 진리를 가진 자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아홉”가지 복(福)은 예수를 믿는다 하여 누구나 받는 복이 아니라, 심령이 가난한 자들의 한해서 시작되어 하나님의 아들로 거듭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상급을 받는 복(福)까지 차원적으로 받게 되는 복(福)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복이라면 무조건 육신의 썩어질 복으로 오해를 하며 서로 받으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福)은 생명의 말씀으로 죽은 영혼을 살려서 영원한 생명을 주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기독교인들도 이러한 “신령한 복”(福)을 받으려면 반드시 생명의 말씀에 갈급하여 애통하며 찾는 자가 되어 홀로 된 “고아, 과부, 나그네”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말씀을 깨달은 기독교인들은 하루속히 거짓교리에서 빠져나와 진리를 찾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기독교 삯꾼목자들이 주는 말씀은 홍수처럼 차고 넘치지만 “산 자”가 주는 생명의 말씀은 말라버렸기 때문입니다.
(원문 출처:새사람 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