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일조, 말씀

십일조에 관한 의미있는 글(장기려, 그 사람)

제라늄A 2018. 9. 17. 17:37
십일조에 관한 의미있는 글(장기려, 그 사람)  

 <펌글>

필자-조성기전도사님 (십일조를 넘어서 저자  산울교회 전도사  소설가  서울법대  장신대원 졸)


십일조에 관한 교리는 미국 교회와 일부 열성적인 전도단체의 영향으로

한국 교회에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십일조가 아니라 십십조의 전적 헌신이 요구될 뿐임을

아래 글을 통해 다시금 새겨봅니다.

다음은 '장기려, 그 사람'( 저자 지강유철 지음, 홍성사 출간)

455페이지에서 456페이지 일부를 인용한 글입니다.

당시 부산 산정현교회는 예배시간에 박수를 칠 수 없었다.

그런데 로빈슨 선교사의 설교가 끝나자 교인들이 모두 일어나서 기립박수를 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여기저기서 또 모시고 오라고 해서 로빈슨 선교사의 오후 예배 설교는 한 달 정도 계속되었다.

어느 주일엔가 로빈슨 선교사가 복음을 전하고 나니 학생회장 김문찬

(현재 산정현교회 앞에서 소아과 개업 중)이 질문이 있다고 손을 들었다.

 십일조에 관한 질문이었다.

난처한 질문을 받고 선교사님은 한참을 가만히 서 있었다.

사람들이 숨을 죽이고 지켜보고 있을 때 선교사가 입을 열었다.

손동길은 당시 로빈슨 선교사의 이야기를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지금 이 질문에 대해 말을 해야 하는지 안 해야 하는지 고민을 했습니다.

성경말씀을 그대로 전할까 아니면 피할까를 고민한 것입니다.

 

침묵 기도 중에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감동은 성경 말씀 그대로 전하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제가 성경에 있는 그대로 이야기하면

다음 주부터 오지 말라고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만, 그대로 하겠습니다.

 

시간관계 때문에 다는 말하지 못하겠지만

제가 말하는 중간에 그런 말씀이 어디에 있느냐고 끊지 마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묻고 싶으면 끝나고 물어 주세요.

저는 성경 그대로 이야기하는 것일 뿐 제 말은 없습니다.

 

예수님도 율법 시대에 태어나셨기 때문에 할례도 받으시고

성전세도 내시다가 30세가 되어서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예루살렘 성전의 휘장이 위 아래로 찢어졌습니다.

그때 우리는 율법에서 해방된 것입니다.

 

때문에 예수님이 승천하신 이후를 기록하고 있는

사도행전부터 요한계시록까지는 십일조를 거두었다는 기록이 단 한 곳도 없습니다.

이제 구약 시대의 성전은 더 이상 없습니다.

지금은 우리 몸이 성전입니다.

성전 개념에서 건물은 없어졌습니다.

때문에 사도행전 1장부터 십일조가 없고,

이제부터는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제사로 드리라는 말씀뿐입니다.

생활 전부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답변은 끝났지만 질문은 없었다.

선교사에게 점심 대접을 하려고 나가던 길에 손동길은

담임목사에게서

'다음부터는 로빈슨 선교사를 절대 모시고 올 수 없다'는 말을 들었다.

(위 글에 대해 십일조는 율법이 아니라 율법 이전 언약 시대부터 있었던 것이므로

율법시대와 관련이 없다는 주장을 할 수도 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할례도 율법 이전 시대부터 있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율법 이전부터 있었느냐 하는 것은 논의의 초점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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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신도 가정교회는 무엇인가요?

 

오늘날 교회는 결코 종교 개혁 정신 즉 만인 제사장 신앙에 합당하지 않고 세속적 물량주의가 지배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사 도, 선지자, 교사, 목사, 전도자 등의 각종 직분은 우리 주님이 세우시는 것이어야 하는데 돈 내고 신학하면 누구나 목사되고 신학 안하면 현실적으로 목사가 될 수 없는 것은 너무나 비성경적입니다.

 

그리고, 교회의 세속화는 거대 교회 성공주의를 양산하였고 큰 교회 속에 성도간의 생명력 있는 교제는 화석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시 초대교회의 작은 가정교회 운동의 물결과 평신도 주도 사역의 물결이 교회를 새롭게 해야하는 필연성을 갖게 됩니다.

 

작은 교회는 아무래도 전임사역자를 모시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일부 깨어 계신 목사님들이 가정교회를 하다가 어려움에 부딛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니 목회자도 아무래도 평신도가 되어야 그 재정이 대부분 선교와 봉사에 사용될 수 있어서 생명력있는 사역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신학이 도움은 될 수 있지만 예수님의 복음과 그 사랑의 계시 자체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단지 너무 커서 믿지 못했고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계시하시고 성령님께서 능히 깨닫게 하십니다.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 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요일2:27)

 

이제 평신도 가정교회가 일어나서 교회당 건물을 짓지 않아도 되고 전임 사역자 사례비로 헌금이 사용되지 않아도 되고 주님께서 성령님을 통해 각종 은사를 주시는대로 직분이 세워져 질서가 주로 부터 말미암고 오직 주님만 주요 선생이요 지도자이고 모두는 형제 자매로 일컫는 교회가 많이 세워지도록 기도를 모아주시고 격려해주시기 바랍니다.

 

빌라델비아 교 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가 이르시되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

 

보라 사탄의 회당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아니하고 거짓말 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그들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계 3:7,10)

 

이러한 교회 앞에는 열린 문이 있어서 선교사와 NGO가 들어가지 못하는 어떤 곳도 평신도는 비즈니스를 통해 들어가 복음을 전할 수 있고 비록 그 능력은 작으나 선교사라 일컬음 받지 않고 겸손히 주를 의지하므로 주님이 사랑하시어 성령의 역사를 넘치게 하실 것입니다.

 

이방인 교회 시대가 유대인 교회로부터 시작되었듯이 평신도 가정교회 운동이 여기 계신분들처럼 깨어계신 전임사역자분들의 지지로 시작되면 더욱 아름다울 것 같습니다. 그리하여 다음의 가장 영광스런 예언이 성취되길 소망합니다.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알기 때문이라 내가 그들의 악행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31:34)

 

 

                                     성경은 안과 밖으로 기록된 말씀이다.                     

계 5:1-5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책이 있으니 안팎으로 썼고 일곱 인으로 봉 하였더라, 성경책을 일곱인으로 봉했다는 것은 자물쇠로 채워났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어도 비유가 아니면 한마디도 안 하셨습니다, 마 13:34-35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 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선지자로 말씀하신바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 추인 것들을 드러내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그러므로 성경은 신구약 모두 "형이상학"의 말씀을 "형이하학"으로 기록한 것이므로 "비유비사"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문자로 보고 이해하는 것은 곧 우상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은 구약은 인간의 죄를 드러내주는 율법이요 구언약이라고 주장하며 신약은 구원이요 새 언약이라고 주장합니다만 이것은 첫 단추는 잘못 꿰어지고 있습니다. 물론 구약이 먼저이고 신약이 뒤에 왔으므로 단순히 상대적 관점에서는 그런 표현이 가능할 것입니다만,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구약도 신약도 그 모든 성경문자는 동일하게"비유비사"이기 때문에 율법입니다. 구약은 모형의 율법이며 신약은 참 율법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 인간의 본질적인 죄인데 하나님을 모른다는 것은 곧 말씀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니라(요1:1) 말씀자체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말씀을 모르고 하나님을 믿는 것은 우상을 믿는 것입니다.

 

율법이란 하나님을 비유로 알려주심으로써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을 찾아내라는 명령이 됩니다. 인간이 그 율법을 수행하면,성경의 비유를 풀어내면 죄가 없겠으나 성경의 비유를 풀어내지 못하면 그것이 죄가 되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기록한 사도요한이 봉해진 책을 열어서 볼 사람이 없어 크게 울었다고 하는데 오늘날 봉해진 책이 열린 지금은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의 말씀을 "비유비사"로 아무도 보지 못하게 감춰났을까? 그 이유는 사탄의 무리를 잡고 알곡들만 구원하기위한 계략입니다. 고전 2:9-10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눅 8:11  비유는 이러하니라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 벧전 1:23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오늘날 기독교인들도 하나님께서 감추신"비유비사"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면 죄 사함도 구원도 받지 못합니다.  막 4:11-12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 이는 저희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오늘날 기독교인들도 하나님께서 감추신 비유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면 죄 사함을 받지 못하니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풀어내지 못한 죄인임이 드러났기 때문에 이제야 예수님은 다시 오셔서 비유문자인 성경을 낱낱이 풀어주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오셔서 성경문자를 낱낱이 풀어주신다는 약속이 됩니다.

 

성경을 풀어주시기 때문에 오늘날 예수님만이 율법을 완성시키시는 분이며 예수님만이 구원주가 되시는 이치입니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인들은 여전히 구약은 율법이고 신약은 구원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유대인들을 구원하기위해 오신 그 예수의 복음으로 이미 구원받은 상태이기 때문에 하늘로 데려갈 일만 남았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으니 답답할 노릇입니다. 성경문자는 우리가 하나님을 스스로 찾아갈 수 없는 죄인임을 깨달으라고 주신 비유였습니다. 그럼에도 기독교인들은 비유문자를 어느 한쪽만 택해서 믿고 있으면서도 조금도 거리낌 없이 당당합니다. 성경을 가감하면서도 어리석게 구원받은 줄 착각하고 있습니다.

 

성경문자는 구원이 아니고 인간의 죄를 드러내주는 율법임에도 구원이라고 착각하며 열심히 성경문자에 매달려 달달 외우며 지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해 성경을 상고하나 성경은 인자에 대한 기록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5:39) 이는 성경문자의 계명을 아무리 지켜도 그것은 영생을 받을 수 없고, 오직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고 그 예수님을 만나야 영생을 받게 된다는 뜻입니다. 왜 예수님을 만나야 구원일까요? 하나님은"영"이시기 때문에 구원하실 수 없기 때문에 어느때 어느시대를 막론하고 항상"실존예수"를 보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예수님은 성경문자를 풀어주실 분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경은 인자인 예수님에 대한 기록이라고 하셨을 때 인자는 오늘날 "실존인간예수님" 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예수라는 사실은 아무도 모릅니다,그분의 말씀을 받고 깨달은 자는 그분이 누구신지 본인자신만 알게 되어 있습니다(계2:17)오늘날은 혼탁한 종교세상이라 자칭예수가 한국 땅에도 몇 명이 있지만 진짜 예수도 섞여 있다는 사실을 기독교인들은 꼭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날은 성경문자가 곧 영적으로 복합적으로, 입체적으로 풀어지게 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와 같이 궁극적으로 성경문자"실존예수"께서 풀어지게 되어 있고 그것을 깨닫는 것이 영생입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과거 성경문자의 계명을 지키는 행위는 하나님이 노하시는 가증한 우상숭배입니다. 오늘날의 기독교의 우상은 성경을 문자로 이해하고 그대로 믿고 있는 행위입니다. 그것은 마귀를 섬기는 악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새 말씀새 양식새 창조거역하고, 과거 성경문자의 계명을 지키며 구 양식을 먹고 있는 행위가 마귀를 섬기는 죄악이며 우상숭배가 됩니다. 지금은 성경문자가 풀려서 새로운 새 양식이 공급되는 때임에도 여전히 어제의 성경문자의 구 양식에 매달려 있다면 그런 자들에겐 성경문자는 하나님이 노하시는 가증한 우상이 됩니다. 오늘의 기독교의 우상은 성경문자이며 이제 우상인 성경문자를 과감하게 버려야 합니다. *성경은 신령한 영적인 말씀을 물질세계의 육의 말로 주셨던 것입니다.*

 

  (원문출처: 새사람 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