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삶은 과연?

※ 평안을 누리는 길 ※

제라늄A 2020. 5. 24. 04:58

마태복음 11:28-30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인생에 부닥치는 고난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외부에서 오는 고난과 내부에서 오는 고난, 이 두 가지입니다. 보통 고난이라고 부르는 것은 외부에서부터 오는 것입니다. 이는 누구에게나 닥치는 고난입니다. 아무리 행운아라고 하더라도 이 중에서 어느 하나라도 겪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문명이 진보됨에 따라, 이런 고난들을 벗어날 방법이 제법 많이 발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인생은 여전히 고난의 도가니입니다.  불티가 위로 날아가는 것 같이, 인생은 나서 고난을 받게 마련이다”(욥5:7)  이것만 봐도 고난은 인생에게 필연적으로 다가오는 것이요 피할 수 없는 일입니다. 외부에서 오는 고난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서 오는 고난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개의 사람들은 이를 고난으로 인정치 않는다. 그들은 고난이라고 하면 자기 이외의 다른 곳에서 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자기 안에 큰 고민이 있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그러나 내부의 고난은 외부의 고난이 확실히 있는 것만큼 확실합니다. 아니 그것 이상으로 확실합니다. 미움, 질투, 교만, 불평 이 모두가 명백한 고난입니다.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는 것도 고난이겠지만, 사람들을 미워하는 것도 역시 고난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질투도 고난이요 교만도 고난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명예를 손상당했다고 해서 성을 내는 것도 고난입니다. 우리는 성내고 미워하는 것이 자기가 자기를 괴롭히는 것이라는 것을 모르고 삽니다. 손해를 입는 것은 고통이지만, 이를 고통으로 느끼는 것은 손해 이상의 고통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우리 몸에 부닥치는 고난 가운데서 적어도 반은 내부로부터의 고난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 사람은 외부로부터의 고난은 내부로부터의 고난만 제거해 버리면 물리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우리를 미워하기를 중지시킬 수는 없지만, 우리가 그를 미워하기를 중지할 수는 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실패를 면할 수는 없지만 그로 인한 실망을 지워버릴 수는 있습니다. 즉, 내부로부터의 고난은 자신이 없앨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내부의 고난만 물리쳐 버리면 외부로부터의 고난은 없는 것과 다름없이 만들 수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고난에 안팎의 구별은 있지만, 실제적으로 생각하면  내부적인 것이 주(主)이고, 외부적인 것은 종(從)입니다.

만일 내부의 곤란만 없애버리면 외부적인 곤란은 끊어지고 맙니다. 이렇게 보면 곤란을 끊는 길은 내부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구주 예수는 이렇게 하여 세상을 이겼습니다. 그는 원수를 사랑함으로써 원수를 이겼습니다. 그에게는 미움을 받는 고통이 있었으나, 미워하는 고통은 없었습니다. 미움이라고 하는 독소를 그는 완전히 자신 속에서 제거해 버렸습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그에게는 질투의 고통도 없었고 원한의 고통도 불평하는 고통도 없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함으로써, 내부적인 고통을 완전히 없애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내부적인 고통이 끊어져버렸기 때문에 외부적인 고통은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자기 자신에게 요구하는 것이 없는 그에게는 가난은 고통으로 느껴지질 않았습니다. 인간의 명예를 얻으려고 하지 않았던 그에게는 지위가 낮은 것은 고통이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예수는 내적으로 충실했기 때문에 외적인 결핍을 느끼지 아니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자신에게 이겨서 세상을 이겼던 것입니다. 예수가 얻은 평안은 완전한 평안이었습니다. 그는 불안한 이 세상에 거하면서도 완전한 휴식에 들어가 계셨습니다. 우리 범인들이 평안을 얻는 길도 이 방법을 제외하고는 달리 없습니다. 즉,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했던 예수를 본받아 그가 택했던 길을 택하여, 먼저 내부적인 고통을 느끼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제일 먼저 없애야 하는 것은 미움의 고통입니다.

다른 사람이 미움으로 내게 대할 때  이쪽에서도 미움을 가지고 응하면, 내가 저쪽의 미움을 그치게 할 수는 없습니다. 할 수 있는 것은, 내 안의 미움을 없애는 일입니다. 미움의 쓴맛을 사랑의 단맛으로 바꾸면,  나는 내적으로 기쁨을 갖게 되고, 외적으로 원수를 물리칠 수가 있습니다. 사랑으로 미움을 이기는 것 이것이 안팎의 적을 정복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요일 4: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라고 했는데, 바로 그대로입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두려워함은 고통입니다.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에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원수를 대하면, 원수도 원수가 아닙니다. 참된 용기는 완전한 사랑에서만 나옵니다. 만일 기독교 국가가 이런 단순한 진리를 깨닫기만 한다면 그들은 오늘 당장 군비를 철폐할 것이며, 그리하면 세계평화는 당장 이룩될 것입니다. 만일 오늘날의 자칭 기독교회가 이처럼 명백한 예수와 사도들의 교훈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신자의 일치는 오늘 실현된 것입니다. 기독교 국가도 기독교회도, 이는 이로 갚고, 눈은 눈으로 갚는 이 세상적인 주의로 나가기 때문에 항상 적에 대한 대비를 해야 되고, 그 공격에 대처할 필요성이 생기는 것입니다.

신자들이 주장하는 무저항주의는 단순히 저항하지 않는 것만은 아닙니다. 능동적으로 적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이런 용기만 있으면 어떠한 적도, 싸우지 않고 격퇴시킬 수가 있는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고 예수는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그 짐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맡기지 못하고 모두가 수고하고 있습니다. 인류 전체가 지쳐 있고 특히 기독교 국가라고 일컫는 나라들이 지쳐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중과세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그런가? 이웃 나라를 미워하고 무서워하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군비는 세계를 장악하기 위함입니다. 중국의 군비는 미국을 대비하기 위함입니다. 비단 국가들뿐만 아니라, 교회도 그렇고, 개인도 역시 그렇습니다. 오늘날 한국에서 사교육비 문제로 고통을 치르고 있는 것은 그것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습니다. 남에게 지지 않겠다. 먹히지 않겠다고 하는 경쟁 심리로 만사가 진행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걱정이 많고 불안이 그치지를 않고 낭비가 중첩됩니다.

그러고도 긍정할만한 효과는 없습니다. 바야흐로 인류 전체가, 기독교 신자라고 일컫는 이들까지 경쟁으로 고민하고 있습니다. 무거운 짐을 잔뜩 지고 쓰러져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에게 예수는 말씀하신다.내게 오라. 내게 배우라. 나의 온유와 겸손을 너희들의 것으로 만들라라고,  예수의 길은 세상의 길과 전연 딴판입니다. 이것은 사랑의 길입니다. 경쟁의 길이 아니라, 사랑으로부터 나오는 도움의 길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움이 없고, 불안이 없고, 틀림없이 목적지에 이를 수 있는 길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리라라고, 예수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 사랑의 길에는 완전한 안식이 있습니다.

아무리 일을 해도 고단치 않은 휴식이 있습니다. 내부에 미움과 질투와 불평의 고통이 없기 때문에 영원한 평안이 넘치며, 나아가서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는 용기와 힘이 나고 이야말로 참으로 행복한 생애입니다. 예수는 그 제자들의 목에 멍에를 메우고, 그 등에 짐을 싣고 그 멍에는 쉽고, 그 짐은 가볍습니다. 그 멍에는 사랑의 교훈입니다. 그리고 그에게 배우면 그 교훈을 실행에 옮길 수가 있습니다. 예수는 이 사랑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이를 실천 실행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사랑을 실천에 옮기기가 어렵다고들 하지만, 예수는 쉽게 실천하십니다.

사랑은 결코 하기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미워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미움은 영구히 끊을 수 없는 고통입니다. 미움에는 감당하기 어려운 무거운 짐이 꼭 따릅니다. 가장 쉬운 길은 사랑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이를 체험해 보고 이것이 사실임을 압니다. 미운 사람이 없는 사람, 행복한 사람이란 이런 사람입니다. 전 세계에 나의 원수라고 생각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는 사람, 이 사람이 가장 부러워해야 할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인생의 괴로움이란 없습니다. 만사가 행복이고 모든 일이 즐거움이 됩니다. 가난도 부요도 추위도 더위도 원수도 동지도 죽음도 삶도 모두가 행복한 것뿐입니다. 감사가 있을 따름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렇기 우리도 하나님을 본받아 사랑 안에서 이 복지를 분양받을 수가 있습니다. 예수께서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라고 말씀하신 것은 이런 평안입니다. 이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가장 확실하고 가장 든든한 평안입니다. 이 세상에서 불행한 사람은 누구인가? 예수를 영접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서 행복한 사람은 누구인가? 예수를 영접한 사람, 그에게 배우는 사람입니다. 돈은 있지만 신앙이 없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머지않아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다만 영화의 꿈을 꾸고 있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돈과 지식은 있지만 신앙이 없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돈과 지식의 무가치함을 알았을 뿐이며, 알 가치가 있는 것은 아무것도 모른 채 일생을 보내고 말았음을 느낄 때가 올 것입니다. 하나님을 소유하고 그가 보내신 분을 아는 것이 참된 지식입니다. 그밖에는 모두가 바람이요 꿈이요, 헛되고 헛될 뿐입니다. 모든 사람이 어서 이것을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모든 인류가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예수 그리스도멍에를 메고 그에게 배우라,

(원문 출처: 새사람 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