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4:17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오늘날 기독교인들의 “회개”는 윤리 도덕적으로 무슨 잘못한 것을 교회에서 눈물 콧물 흘리면서 하나님께 고백하는 것이 “회개”를 하는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는 것은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지금 잘못 가고 있는 거짓된 기독교 신앙의 “길”에서 바로 돌아서면 너희 앞에 오늘날의 구원자 “실존 예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정반대의 “길”을 즉 “지옥”의 “길”을 가면서 천국을 가는 “길”이라고 착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천국을 갈 수 있는 “길”은 지금까지 기독교에서 신앙생활해오던 그 “길”에서 반대의 “길”로 돌아서면 바로 그 “길”이 “천국의 길”로 가는 구원자 오늘날 “실존 예수”가 그 앞에 펼쳐지는 것입니다. “실존 예수”를 영접해야 구원을 받습니다.
왜냐하면 오늘날까지 기독교인들이 가던 그 “길”은 기독교의 “비 진리 신학”의 “길”이요 거짓의 길이요, 참 진리가 아니니 지금까지 공들여 쌓은 “비 진리”의 말씀으로 건축한 자신의 육체의 성전을 반드시 헐고 새로 성전을 지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2000년 전 유대인들에게 당시에 46년 동안 지은 “예루살렘 성전”을 가리키며 이 성전을 헐면 내가 “3일”만에 다시 짓겠다고 “비유”로 말씀 하신 것을 기억하십시오(요2:19) 이것은 과거의 “비 진리”의 잘못된 말씀에서 잘못 형성된 “내 육체의 성전”을 헐고 다시 지으라는 것입니다. 헌 집을 헐지 않고 새집을 지을 수 없는 만고의 진리입니다. 막 2:21-22 “새 옷(말씀)에서 한 조각을 찢어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이요 또 새 옷에서 찢은 조각이 낡은 것에 합하지 아니하리라” 눅 5:37-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 라는 데서도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셨던 사실은 영적으로 죽고 영적으로 부활의 그림자요 예표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예수를 믿는다면 예수께서는 막 8:34 “너가 나를 따라오려거든 네 자신을 부인하고 네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현제 기독교인들의 신앙의 “길”에서 돌아서서 반대의 길로 옮겨 가는 것을 말합니다. 곧 “육의 세계”에서 “영의 세계”로 건너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현제 눈으로 보이는 기독교 목사의 말을 더 신뢰함으로 “영”의 세계는 보지 못하고 잘 보이는 “육”의 세계를 선택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짓과 사람들이 한 몸을 이룬 것이 자신의 존재인 “자아”(自我)입니다.“자아”는 물질적 육체의 사람이 되어 버렸습니다. 물질 외에 영적 세계를 전혀 볼 수 없는 “소경”이 된 것입니다.
본래 사람의 생명은 하나님의 것인데 이제는 “자아”가 그 사람의 생명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첫 사람(겉 사람)은 세상에 속한 자기를 사랑함으로 행복을 느끼고 그에 필요한 모든 것을 따라 욕망으로 살아가는 인생이 되었으며 또한 “자아”가 자기의 의지이고 또한 자기의 존재이며 또한 자기에게 행복을 주는 자기의 하나님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아”를 지키기 위하여 사람들은 육체의 생명을 죽음에 까지 던지는 것입니다. 죄의 종이란 “자아”의 종입니다. 사람이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욕망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사도바울도 자신의 육신을 쳐 복종시키며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저 낼꼬! 하고 사도바울은 탄식하였던 것입니다(롬7:24) 자기를 고집하는 것은 새로운 생명이 없다는 것이고 “죄의 종”이 되어있다는 증거입니다.
“자아”는 세상에 사는 육신 곧 “육체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에 바탕을 두고 그것들에 뿌리를 내려 유착되어 있습니다. 또한 그것들을 소유하고 누림으로 “자아”는 살찌고 견고하여 져서 강한 진을 쌓아 성벽을 두르고 그 안에서 자기를 보호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리고 성벽에 둘려 싸여서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여리고 성의 왕 자신의 “자아”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스스로 높고 유명하고 큰 자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리고 성(자아)이 허물어지지 아니하면 “가나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기를 말씀 앞에 세워서 “자아”의 어떠함이 밝혀짐으로 하나님의 심판이 임해야 소망이 있습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이 곧 사람 속에 있는 마귀의 죽음 곧 자신의 “자아”의 죽음임을 발견하여야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세상의 정욕들과 자기의 실체를 밝히 보고 이를 미워하기에 이르면 이 때를 곧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자기 자신까지 미워하지 아니하고 자신을 부인하지 않으면 나를 따를 수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눅14:26) 육신인 사람이 즐거움이나 고통은 “자아”로 인한 즐거움이나 고통인 것입니다. “자아”가 자기 자신인 줄 알지만 “자아”는 내가 세상과 하나가 되어서 낳은 “죄의 존재”입니다. 곧 죄가 형상을 이룬 죄의 원함입니다.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롬7:15) 그러나 사람 속에 사람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가 들어와 사람과 하나로 투명하게 접착되어서 자기를 숨기고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의 원함을 행하게 함으로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하도록 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즐거움을 찾는 것입니다. 악한 마귀는 악을 행하는 것을 즐기고 그것을 사람으로 하여금 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가 그 사람 안에서 그 사람이 악을 행하게 함으로 자기를 만족케 하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몰래 먹은 떡이 잠시 즐거운 것은 사람 속에 죄가 즐거워하는 것인데 사람은 참 자기가 즐거워하는 것으로 속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죄에게 속아서 죄의 원함을 반복적으로 들어주면서 쾌락을 즐기지만 그러나 그 사람이 자기 자신이 홀로 있을 때는 고통스러워하는 것입니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속에 거하는 죄니라(롬7:16-17) 이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과 자기를 미워하지 못하는 것은 세상과 자기의 실체가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좌우에 날 선 검과 같아서 감추어진 것을 찔러 쪼개는 것입니다. 영과 혼과 육체 까지를 밝히 드러내는 것입니다.“회개”는 세상과 이혼하는 것입니다. 세상과 이혼하지 아니하고 예수를 영접하는 것은 남편 있는 여인이 다른 남자에게 시집가는 곧 간음하는 것입니다.
“자아”는 세상을 주관하는 “육”과 내가 결혼하여 낳은 존재이므로 주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요8-44) 말씀하심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의 십자가는 우리의 “자아”가 못 박혀 죽은 현장입니다. 여기서 “자아”가 죽지 않으면 하나님에게 돌아갈 길은 없습니다. 그리스도가 열어 놓은 새롭고 산 길로 인하여 이제 하나님과 우리가 한 몸이 되어서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 안에 태어난 것입니다. 이 “새 생명”은 진리와 선과 이웃을 자기보다 더 사랑하는 생명입니다. 처음 태어난 옛사람은 거짓과 악을 사랑하는 마귀의 생명이었고 이제 새롭게 탄생한 생명은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진리로 즐거워하고 선으로 만족하는 생명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는 기독교인들이 지금 가고 있는 신앙의 “길”에서 바로 돌아서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회개”한 사람입니다. 기독교인들이 현제의 신앙에서 돌아서면 살아날 수 있습니다. “죽는 자는 살고, 살기를 원하는 자는 결국은 죽습니다”
(원문 출처:새사람 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