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의 근본사상은 부활이요 불교의 근본사상은 해탈이라 말합니다. 그러면 부활과 해탈은 어떻게 다른가? 계란에서 부화되어 나오는 병아리를 보고 기독교인들은 부활이 되었다고 말을 하고 불교인들은 해탈되었다고 말한다 해도 그 의미나 상황은 다르지 않습니다. 이렇게 부활이나 해탈은 용어만 다르지 모두 동일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이라 부르고 불교인들이 반야라 부른다 해서 유일신이 두 신으로 나누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기독교와 불교는 유일하신 하나님과 반야를 각기 자기들의 신(神)이라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에서 하나님이라 말하는 것은 신(神)은 오직 한 분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이와 같이 만물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신(神)은 오직 한분이신 하나님 한 분뿐이시며 다른 신(神)들은 잡신들입니다. 단지 예수님은 하나님이라 말씀하신 것이며 부처님은 반야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한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이며 불교는 자비의 종교라 말합니다. 이렇게 사랑은 기독교의 전매특허처럼 되었고 자비는 불교의 독점물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의 사랑은 기독교만의 소유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하며 부처님의 자비가 불교만의 소유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어둠을 비추는 태양이 지구의 모든 곳을 고루 비춰주듯이 예수님의 사랑과 부처님의 자비는 용어만 다를 뿐 무명가운데서 죽어가는 중생들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한 반야의 빛이며 생명입니다. 반야께서 인간들을 사랑하는 마음은 바다보다 깊고 하늘보다 넓습니다. 자비와 사랑은 모두의 것이며 어느 특정한 종교나 특별히 한정된 사람의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사랑은 기독교의 소유물이 되어버렸고 반야의 자비는 반야의 이름으로 불교의 소유물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사랑이라는 기독교 안에는 사랑이 없고, 자비라는 불교 안에는 진정한 자비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참사랑은 예수님 안에만 있고 자비는 부처님 안에만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진정한 사랑(아가페)은 부활된 예수님 안에만 있고 자비는 오늘날 해탈된 부처님 안에만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오늘날 기독교 안에는 살아있는 실존예수님이 없고, 불교 안에는 살아있는 실존부처님이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기독교인들은 재림하실 실존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으며 불교인들은 지금도 다시 오실 실존미륵불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오늘날 기독교 안에 살아있는 실존예수님이 계시고, 불교 안에 살아계신 실존부처님이 계신다면 무엇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재림예수를 기다리며 불자들은 무엇 때문에 미륵불을 기다린단 말입니까?
불교가 부처님의 형상을 만들어 놓고, 기독교는 예수님의 십자가 형상을 만들어 섬기고 있는 것은 오늘날 불교 안에 실존부처가 없고, 기독교 안에 실존예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실존부처가 없고 실존예수가 없다면 어느 누가 해탈을 시키고 부활은 누가 시킨단 말입니까? 불자들을 해탈시킬 수 있는 분은 오직 반야의 생명을 소유하고 있는 오늘날의 살아있는 실존부처님이시며 기독교인들을 부활시킬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하신 오늘날의 살아있는 실존예수님 뿐입니다. 이 때문에 오늘날 불자들이 해탈이 되지 않는 것이며 기독교인들은 부활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불자들은 누가 해탈을 시키며 기독교인들은 어느 누가 부활을 시킨단 말입니까? 그러나 부처님이나 예수님이 불교나 기독교 안에는 없지만 불교나 기독교 밖에는 항상 실존으로 계시기 때문입니다. 단지 중생들이 불교와 기독교의 틀 속에 갇혀있고 또한 욕심과 탐심 때문에 눈이 멀어 오늘날 살아계신 실존부처님이나 살아계신 실존예수님을 보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불교나 기독교가 해탈이 되고 부활이 되려면 하루속히 거짓된 기독교나 거짓된 불교의 교리의 틀에서 탈출해 오류 없는 진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살아계신 실존부처님을 만날 수 있고 살아계신 실존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반야(般若)로부터 오신 현생의 부처를 만나서 그를 믿고 따른다면 해탈이 되고 부활이 될 것입니다.
죽은 영혼을 구원할 수 있다면 부처면 어떻고 예수면 어떻습니까? 죽어가는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 진정한 부처이며 예수가 아닙니까? 부처님의 자비는 죽은 영혼을 구원하여 영원한 반야(般若)의 생명을 주는 것이 진정한 자비이며 예수님의 사랑 역시 죽은 영혼들에게 하나님의 생명을 주는 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불교의 스님들이나 기독교목사님들이 죽어가는 영혼들을 구원하여 살리지 못한다면 불교는 자비의 종교요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라 말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죽어가는 영혼을 살리는 것이 예수님의 사랑이요 부처님의 자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 안에는 사랑이 메말라 버렸고 불교는 자비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사랑과 부처님의 자비는 지금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기독교인들은 사랑이 성경 속에 있다는 생각으로 날마다 성경을 읽고 불교인들은 자비가 불경 속에 있다는 생각으로 불경을 열심히 보고 있지만 경속에서도 자비와 사랑은 찾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중생들 안에 있는 욕심, 즉 탐, 진, 치(貪, 瞋, 癡)때문에 마음은 화인(火印)을 맞았고 눈은 탐욕으로 가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무명의 중생들이나 기독교인들이 갈 바를 알지 못하고 지금도 방황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창세기의 6일 천지창조를 통해서 천국으로 가는 길을 반드시 알아야 하고 불자들은 반야심경의 6 바라밀 창조를 통해서 천상(天上)으로 가는 길을 반드시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불자는 생로병사의 윤회에서 벗어나 부처가 되려면 먼저 지옥계에서 나와야 합니다. 지옥계에서 보시 행을 통해서 아귀계로 나온 자들은 부처님의 계율을 지키고 행하여 축생계로 나아가야 하고 기독교인들은 세상이라는 바다의 물고기에서 육지로 나와 짐승의 상태에서 축생의 상태로 또 여자의 영적상태에서 남자의 영적상태인 예수로 이렇게 여섯 번 거듭나 6일 창조를 이루어 하늘에 이루고 불교에서는 6 바라밀의 과정을 통해서 한 단계 한 단계 올라가 천상계에 이르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기독교의 6일 창조와 불교의 6 바라밀의 창조의 길을 기독교인들이나 불자들이 지금까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등한이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기독교인들과 불자들은 예수님과 부처님의 뜻을 올바로 깨닫고 예수님과 부처님이 가르쳐주신 육일 창조와 육바라밀을 통해서 모두가 부활이 되고 해탈이 되어 예수가 되고 부처가 되어야 천국과 극락을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부처님께서 오늘날 기독교인들과 불자들에게 그동안 감추어져 있던 창세기와 금강경의 깊은 뜻을 이렇게 자세히 드러내어 보여주신 것은 무명의 중생들이 하루속히 생로병사의 윤회에서 벗어나 예수가 되고 부처가 되라는 마음에서 입니다.
(원문 출처:새사람 블로그) 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