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거짓을 실상인 줄 착각하는 기독교인들 ”
고전 10:1~6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그러나 저희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신 고로 저희가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그런 일은 우리의 거울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저희가 악을 즐겨한 것같이 즐겨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라,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거짓을 붙들고 실상으로 나가지 아니한 기독교인들에게 상기의 말씀보다 더 확실한 경고의 말씀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귀를 열고 들으려는 기독교인들이 없는데 사도바울의 외치는 소리도 허공을 칠 뿐입니다. 사도바울은 본문에 “그런 일은 우리의 거울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저희가 악을 즐겨한 것 같이 즐겨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하였습니다. 우선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 애급”과정에서 어디까지가 “애급”이며 어디서부터 “광야”이며 어디까지가 “가나안”이라고 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애급”은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몸담고 있는 기독교회이고, “광야”는 “진리의 말씀”을 찾아 방황하는 “고아, 과부, 나그네”와 같은 자들을 말하며 “가나안”은 구원자 “실존예수”가 계신 약속하신 땅입니다.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은 자기 마음속에 살고 있는 죄와 싸워서 이겨야 “가나안”에 들어갈 땅입니다. 대체로 보아서 홍해를 건너기 전을 “육”의 세계 “애급”이라 한다면 홍해를 건너 “광야”는 “혼”의 세계라 하고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에 이르면 “영”의 세계라고 합니다. 인간의 실체는 “영, 혼, 육”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애급과 광야”와 “가나안”에 있어서의 삶의 모습과 삶의 목적 등에 대해서는 설명하려면 많은 언급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주로 하나님의 말씀 양식(떡)의 문제만 관련시켜 살펴보기로 합니다. 오늘날 기독교 “애급의 양식”은 누룩이 섞인 가감된 “유교 병”이었다면 “광야의 양식”은 누룩이 없는 만나 “무교병”이고 “가나안의 양식”은 “실존예수”께서 직접 주시는 진리의 양식 “진설병”입니다.
“출애굽”의 사건은 단지 이스라엘민족의 역사적인 사실이 아닙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에게 “가나안 천국”으로 가는 길을 하나의 “거울”로 보여주시는 사건입니다. 거울이라 함은 “출애굽”사건 전체를 개개인이 자기 삶으로 살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급 바로 왕”에 의해 자유를 빼앗기고 종노릇 하고 있는 삶도 나의 삶에서 실제적이라는 말이고, 홍해를 건너고 “광야”를 지나서,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에의 입성이 모두 나의 삶에서 실제적으로 일어난다는 뜻입니다. 어쨌거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의 인도에 따라 “애급”을 뒤로하고 홍해를 건넘으로써 비로소 “가나안”을 향한 첫 발걸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애급과 광야”를 갈라놓는 사건이 바로 “홍해를 건넘”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기상천외한 기적을 바울은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즉 “출애굽”한 이스라엘백성들이 홍해바다를 건너게 되는데 사도바울은 이 사건을 “세례”받는 사건으로 “비유”하여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의 신앙생활에 있어 “세례”(침례)라는 것의 의미는 홍해라는 말씀의 바다를 건너는 것입니다. 거꾸로 말한다면 홍해를 건너는 것이 “세례”이지 물을 머리에 찍어 바르는 것이 “세례” 받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예수가 요단강에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것은 말씀의 강(세례)에서 깨끗이 씻고 “가나안”으로 진입하는 의미입니다.
“세례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푸는 사람이라면 요한의 뒤에 오시는 예수그리스도는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는 분입니다. 그렇다면 예수그리스도의 “성령세례”는 무엇이며 요한의 “물세례”는 또한 무엇인가? 요한의 “물세례”는 죄 사함을 향한 방향의 전환이 그 핵심이고 물은 그 형식입니다. “회개”라는 말의 뜻은 지금까지 걸어온 길이나 살아온 삶으로부터 돌이켜 새로운 길을 향하는 것을 “회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지금까지의 삶과는 다른 새로운 삶을 향한 지향이며 당연히 과거의 삶에 대한 포기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세례요한”의 “물세례”는 물 몇 방울 찍어 발랐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과거의 삶으로부터 단절되고 새로운 삶을 향해 나아가는 삶의 구체적인 사건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회개의 세례”인 것입니다.
홍해를 건너는 사건이야말로 가장 확실한 회개의 사건이 아닌가! “애급”의 삶을 포기하지 않고서는 건널 수 없는 경계가 곧 홍해입니다. 홍해를 건넜다는 것은 “애급”(세상)의 포기며 “가나안”을 향하여 일보를 내디딤입니다. 종에서 자유자로, 세상에서 하나님에게로의 대장정의 시작입니다. 다시 말하면 “세례”는 “애급과 광야”사이에 놓여 있는 홍해라는 것이지 결코 “애급”세상교회에서 선한 양심의 사람이 되려고 몸부림치는 일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제 “세례요한”이 말한 바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거니와 예수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리라”(막1:8)는 말과 예수가 니고데모에게 말할 때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3:5)고 한 말을 기억해야 합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은 “물세례”는 하위개념이라면. “성령세례”는 상위개념인 “가나안”에 입성했을 때 “실존예수”에게 생명의 양식을 먹는 것이 “성령세례”입니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기독교인이라면 “광야”는 거짓된 “애급”이라는 세상기독교회에서 탈출하여 진리를 찾아 방황하며 이교회 저 교회로 문전걸식하는 거지나사로와 같은 “고아, 과부, 나그네”들이 구름기둥과 불기둥(연단과 징계)으로 훈련을 통과함으로 “가나안”에 입성하는 자가 진리를 만나 “생명의 양식”을 먹을 때 예수님의 “진설병 성령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광야”는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하여 우리가 거쳐야 하는 과정입니다. 다만 본인 스스로가 그러한 과정을 알고 지나느냐 모르고 지나느냐의 차이는 있겠지만 누구나 예외 없이 거쳐야 하는 과정입니다.
오늘날 기독교회에서 받는 세례는 “물세례”입니다. 그것도 세례의 실체가 아니라, 의식에 불과한 것입니다. 마치 유대교에 있어서의 할례가 육신적 할례가 아니라, 마음과 귀의 할례였듯이 기독교의 “물세례”역시 그러합니다. 교회에서 목사들에게 물로 세례 받은 것을 가지고 홍해를 건넌 줄 착각하면 곤란합니다. 육신의 세례는 마음에 대한 그림자요 모형일 뿐입니다. 그림자는 그림자로서 가치가 있는 것이지 그림자가 실체의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비극입니다. “물세례”의 실체는 홍해를 건너 “광야”를 거쳐 “가나안”에 입성할 때 “성령세례”를 받는 것이 “물세례”의 실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동안 정든 “애굽”(세상기독교) 산천 다 버리고 다시는 올 수 없는 곳으로 기약 없는 기독교를 “출 애급”하여 “고아, 과부, 나그네”길을 떠남입니다. 물론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생활을 하는 동안 “애굽”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운동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현실적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습니다.
“애굽”에 대한 실질적인 포기와 “가나안”을 향한 출발이 “세례”이지 물 몇 방울 적셨다고 세례 교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바울이 육신의 할례를 철폐하고자 했듯이 오늘날 기독교인들도 그림자 세례를 벗어버리려야 합니다. 홍해를 건너는 “세례”는 그러한 형식이 아니라 가르침을 통한 성경의 깨달음입니다. “혼”의 세계에서 “영”의 세계로의 돌이킴입니다. 어떤 형식을 가졌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삶의 내용이 어땠느냐가 중요합니다. “목숨이 음식보다 중요하고 몸이 의복보다 중요합니다”(마6:25)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가짜허상을 붙들고 실상을 외면하는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들은 현 위치에서 하루속히 세상기독교에서 “출애굽”하셔야만 구원받을 수 있지 그대로 머물러 있는 한 100% 멸망입니다. “귀”가 있으신 분만 들으시기 바랍니다.
(원문출처:새사람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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