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존 예수님

실존예수님은 멜기세덱의 반차로 오신다.

제라늄A 2020. 7. 3. 21:44

 

시편 110:4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치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천국을 가기 위해 이 세상에서 신앙생활을 한다면 기독교의 가감된 “신학”교리로 “유교 병”을 먹는 신앙에서  하루속히 “출 애급”(탈출)을 해서 “광야”로 나와 가감되지 않은 “무교병”을 “7일”동안 먹으며 성장해야 합니다. “7일”이라는 것은 성장하는 단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출 12:15 너희는 칠일동안 무교병을 먹을 찌니 그 첫날에 누룩을 너희 집에서 제하라 무릇 첫날부터 칠일까지 유교 병을 먹는 자는 이스라엘에서 끊어지리라,   이같이 순수한 “진리의 말씀”으로 “7일”동안 장성한 자로 성장하여 “가나안”으로 들어가 “실존 예수님”의 생명의 말씀인 “진설병”을 영접하고 거듭나는 것을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제사장”이 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이 인정하는 천하에 둘도 없는 인간의 몸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거듭나게 되는 과정입니다. 그러면 구약 제단에서 역사적 제사장직으로서 아론의 반차와 여기 창세기에 “살렘 왕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다는 영원한 제사장직은 서로 어떻게 다른가에 잠간 말씀을 드린다면  이스라엘 “12지파”중에 “레위족속”은 제사장직으로 사명을 부여받았는데 아론은 그중에 대제사장으로 발탁되었으나, 그가 받은 십일조는 농산물의 소득의 십일조를 받았습니다. 오직 제사장 직분으로서만 십일조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땅에서 영원한 천국을 이루시는 천국의 주인이신 “실존 예수님”은 대제사장직으로서 화평을 이루어 “거듭난 사람 십일조”를 받으시는 분입니다.

반면에   창세기 14:18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라고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멜기세덱의 반차”는 어떠한가?  멜기세덱은 우선 “살렘 왕”으로 알려주고 있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고 알려주고 있음으로 보아  그는 왕과 제사장으로서 완벽한 천국의 주인임을 명백히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받은 십일조는 “소득의 십일조”가 아니고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오는 아브람으로부터 “전리품의 십일조”를 받았다는 데 큰 의미가 있습니다. 왜 “전리품의 십일조”가 중요한가?  전쟁이란, 오늘날 “진리와 비 진리”가 서로 대적하는 전쟁인데, 그 전쟁을 통해 첫 열매가 추수됩니다. 추수된 첫 열매가 곧 하나님이 귀히 받으시는 오늘의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난 사람십일조”가되기 때문입니다.

멜기세덱은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다고 알려주고 있습니다.“떡과 포도주”는 생명의 말씀을 “비유”한 것입니다. 이는 전쟁에서 돌아오고 있는 아브람에게 주었음을 의미하고, 이것은 아브람에 “떡과 포도주”로 말미암아  오늘의 “진리와 비 진리”의 영적싸움에서 승리한 전리품으로 획득하여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영원한 제사장이요, 살렘 왕인 멜기세덱에게 “사람 십일조”로 돌려드림을 “비유 비사”로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멜기세덱의 반차로 출현하여 전리품으로 “사람 십일조”를 취한다는 것은 그가 천국의 주인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슥 6:12,15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보라 순이라 이름 하는 사람이 자기 곳에서 돋아나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리라 먼데 사람이 와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리니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줄을 너희가 알리라,

자기 곳에서 “순”이 돋아난다는 것은  타인과의 연관성을 갖지 않고, 오로지 자기 고유의 “독자적인 창조성”으로 나타남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자기 곳에서 “순”이라는 “싹”이 돋아나서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한다는 것은  오늘의 “독자적” 존재인 오늘날의 “실존 예수님”이 자기 고유의 독창적인 창조성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하나님의 천국을 건설하신다는 뜻입니다. 즉 그 누구일지라도 추종을 불허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혜와 지식과 총명함으로 독자적으로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한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실존 예수님”만이 자기만이 “순”이 돋아나서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한다고 했는데, 그 사람을 “순”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먼데 사람은” 곧 오늘날 “실존 예수님”을 뜻합니다. 그분이 왜 “먼데 사람”이 되는가? 오늘날의 예수님은 “땅 끝”에서 오시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오늘날 “실존 예수님”만이 자기 곳에서 돋아나서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한다고 했는데, 그 사람의 이름이 “순”이라고 했으며 “먼데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과거 유대 땅에 오셨을 때는 예수지만 지금은 예수가 아니고 “순”이기 때문에 “새 이름”이라고 한 것입니다.  사 5:26 또 그가 기치를 세우시고 먼 나라들을 불러 땅 끝에서부터 자기에게로 오게 하실 것이라,  왜 “실존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는 “땅 끝”에서 오게 한다고 성경에 기록했는가? “땅 끝”이라는 말은 지구의 “땅 끝”이 아니라 “땅”이라는 “육”의 개념으로 표현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땅 끝”은 바로 예수님 자신의 이 땅에서 태어나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장해 몸 안에 “성령”(말씀)이 임(잉태) 한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에서는 “땅 끝”까지라는 말을 오해하여 사도행전의 말씀의 근거로 “땅 끝”까지 해외로 선교사를 파송하는 것입니다.

​행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지구는 둥근데 “땅 끝”은 어디인가?  이 말씀을 오늘날 기독교는 상기의 말씀을 근거로 각 교단마다 선교사를 양성해서 “땅 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라”고 예수께서 명령하셨다고 “문자 성경”으로 육신의 안목으로 착각을 하고 큰 교회마다 선교사를 해외로 파송하는 교회들은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오늘날 기독교는 정말 어처구니가 없는 하나님께서 웃으십니다. 이렇게 엄청난 착각으로 오늘날 기독교는 “비 진리 신학”으로 왜곡된 것이 오늘날 “신학”교리입니다. 이 “땅 끝”의 진정한 의미는  예수님의 제자들 자신이 “땅”의 시작이며 거듭나는 때가 “땅 끝”입니다.

그러므로 “땅 끝”은 바로 예수님의 제자들 몸 안에 “성령”(말씀)이 임한 자를 말하며  성령이 임한 자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성령”(말씀)이 임하지 않은 생명이 없는 “죽은 자”들이 “선교”한다고 선교사들을 파송하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사 41:9 내가 땅 끝에서부터 너를 붙들며 땅 모퉁이에서부터 너를 부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나의 종이라 내가 너를 택하고 싫어하여 버리지 아니하였다 하였노라,  이와 같은 기록들을 볼 때, 하나님의 선민인 유대인들에 예수님은 유대 땅에 오셨으나  오늘의 예수님은 “땅 끝”이요, “땅” 모퉁이에 속하는 오늘날 한국 땅에도 한국인 “실존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오늘날의 “실존 예수님”은 독보적으로 한국에서 태어난 “순”이 된 사람을 뜻합니다. 오늘날 예수님 때는 유대 땅이 아니고 “땅 끝”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듭난 “땅 끝”이 되기 때문에 이제는 “순”이 된 사람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사 53:11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히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라고 했습니다.  자기 곳에서 “순”으로 돋아난다는 것은 독창적 자기 지식을 뜻합니다. 그런데 그의 이름이 “순”이라고 합니다. “순”“새싹”을 말함이요, “새싹”은 오늘날의 “실존 예수님”이 됩니다.“어린양 예수”이므로 그가 가진 말씀이 진리의 “새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오늘의  진리의 “새 말씀”을 가지고 천국의 문을 열은 자가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오시는 오늘날 한국인 “실존 예수님”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한국 기독교인들은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오시는 한국인 “실존 예수님”을 영접해야  그 말씀으로 거듭나야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원문 출처:새사람 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