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참 좋은 말씀입니다. 어떤 종교단체이든 “사랑”은 교리 중의 으뜸이며, 인간세상의 기본이 되는 모든 윤리 도적인 가르침이 또한 “사랑”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사랑”도 이와 같은 인간의 윤리도덕적인 “사랑”을 말하는가? 하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음이 또한 성경의 기록입니다. 지금까지 수없이 밝혔듯이, 성경은 율법과 구원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율법의 말씀은 문자 그대로 보는 성경 관이요, 구원의 말씀은 그 성경 문자(율법)를 오늘날 낱낱이 해석된 진리의 새 말씀으로 거듭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비유와 비사"로 상징이며 그 "비유"가 오늘날의 풀어져야 한다는 뜻에서 이중적인 것입니다. 즉 겉 말씀이 있고 속 말씀이 있는데 이것을 성경에서는 “안팎”(계5:1)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랑”이라고 하는 단어가 또한 겉 “사랑”이 있고 속 “사랑”이 있다는 뜻입니다. 겉 “사랑”에 대해서, 즉 인간은 윤리 도덕적인 “사랑”에 대해서 오늘날도 기독교인들이 많이 인용해 쓰는 고전 13장은 “사랑”장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사랑”은 인간의 “사랑”과 전혀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22:37-40)
예수께서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인간에 대한 “사랑”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즉 성경의 가르침이 “사랑”이 으뜸이며 핵심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일이야말로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실천을 가장 먼저 하신 분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구원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즉 “사랑”이 곧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성경 문자 그대로 고전 13장에서 말한 “사랑”의 개념이나 인간의 윤리도덕적인 “사랑”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신 본질적 구원의 “사랑” 이 되는 것인가? 절대로 아닙니다. 이것은 인간 모두 율법적인 “사랑”이요 인간의 “사랑”일뿐입니다.
따라서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은 지금까지 윤리 도덕적 “사랑”을 하며 “처음 하늘 처음 땅”인 율법 시대를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처음 하늘 처음 땅”인 율법 시대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인 구원 시대로 넘어가야 하는 과도기에 있는 것입니다. 모두 우리의 생각을 바꾸는 정신적 가치의 과도기에 있습니다. 예전의 “사랑”은 인간 도덕적 “사랑”이고 육적 “사랑”이었으며 그것이 구원이라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 “사랑”에 대한, 그 구원에 대한 생각을 바꿔야 합니다. 인간의 도덕적 “사랑”과 육적인 “사랑” 은 인간 역사상 수 천 년 동안 교계에서나 세상에서나 우리의 몸과 영혼을 온통 점령해 왔기 때문에, 바꾸기가 힘들겠지만 과감히 바꿔야 합니다.
인간의 윤리 도덕적 “사랑”은 하나님을 아는 “진리에 대한 사랑”으로 바꿔야 하고, 인간의 “육적인 사랑”은 “영적인 사랑”으로 바꿔야 합니다. 그러면 “영적인 사랑”은 무엇인가?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이 “영적인 사랑“입니다. 사람들은 “사랑”을 말하고 그 “사랑”을 실천하기 위하여 살신성인의 경지에 오른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특히 "천주교 테레사 수녀, 이 태석 신부, 주 기철 목사" 등 인간의 “사랑과 선”을 행하는 이들의 “사랑과 선”함은 그 누구도 따라 할 수 없는 희생의 베풂인 것이나 그러나 이들의 “사랑과 선”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사랑과 선”이 아니며 오직 땅의 소산으로 베푸는 육신의 윤리도덕의 “사랑과 선”인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베푸는 “사랑”은 본질이 아닌 것을 행하고 모르고 있으니 그게 허공을 치는 “사랑”이 아니고 무엇인가? 고전 13: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하나님의 “사랑”은 바로 인간을 구원하는 “사랑”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의 윤리도덕의 “사랑”이지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사랑”인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인간의 “사랑”만 있을 뿐 하나님의 “사랑”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인 베드로나 다른 제자들에게도 없던 “사랑”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은 원문이 아니면 알 수 없는 것입니다.“사랑”이라는 글자는 똑같으나 내용이 전혀 다른 것입니다. 이 장면은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실 때에 내가 주를 사랑 하나이다. 세 번이나 똑같은 질문과 대답을 하면서 서로 다른 차원의 “사랑”의 문답을 하고 있었던 것은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시고 베드로는 하나님의 “사랑”이 없으므로 즉 인간의 윤리도덕적인 “사랑”으로 예수님에게 “사랑”한다고 세 번씩이나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대답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 하느냐고 물으신 예수님의 질문과 “사랑”한다고 대답한 베드로의 대답은 글자는 똑같으나 전혀 뜻이 다른 차원의 대답인 것입니다. 원문을 통해서 이 “사랑”이 어떤 “사랑”인지 알 수 있는 것이지 한글만 보는 사람은 “사랑”이라고 하니까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윤리도덕의 “사랑”으로 불쌍한 사람을 도와주고 이웃을 찾아다니며 “사랑”이라는 명목 아래 도와주기도 하고 구제도하는 것이 하나님이 하라는 “사랑”인 줄 착각하면서 율법이 완성된 줄로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서로 “사랑”하라는 “사랑”은 인간에게는 이웃을 “사랑”하고 싶어도 예수님께서 소유하고 있는 “사랑”자체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하라는 “사랑”은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을 아는 진리에서는 인간의 도덕적 “사랑”과 육적 “사랑”만을 외치고 그것이 구원이라고 기독교에서는 주장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오늘날 그 속뜻은 하나님이 동산 각종 나무 열매(이웃)를 임의로 먹으라고 하신 말씀과 맥을 같이 하는 것입니다. 쓰디쓴 동산 각종 나무 열매를 임의로 먹을 때(이웃) 성경이 풀리고, 해독된 그 진리의 새 말씀만이 살려 주는 말씀이 되고, 살려 주는 말씀이 곧 하나님의 “사랑”이 되기 때문입니다.“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영적인 “사랑”을 말하나 인간은 육적인 “사랑”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아니 계신 데 없이 무소부재하십니다. 무소부재하시다 함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고 그 안에 계심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도덕적 “사랑”이나 육적 “사랑”은 비 본질적 “사랑”이며 하나님을 아는 온전한 지식, 즉 영생케 해주는 진리의 새 말씀은 본질적 하나님의 “사랑”입니다(요1서4:8~16)
인간의 육적 “사랑”에 달콤함을 느끼며 만족하는 자, 우물 안 개구리입니다. 이제 하루속히 진리의 새 말씀을 깨달아 그 진리의 새 말씀을 서로 전해줌으로써 서로 살려 주는 넓고 큰 하나님의 “사랑”으로 수용하고 이해해야 합니다. 내 이웃에게 냉수 한 그릇 주었다고 해서 그게 “사랑”이라고 말하지 말라. 또 내 이웃에게 내 재산 전부를 주었다고 해서 그게 “사랑”이라고 말하지 말라. 내게서 물질이 빠져나갔을 뿐이고, 그 이웃들은 그 물질을 쓰면서 죽어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물질이 영생을 주진 않습니다. 이 모든 행위들이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사랑”이긴 해도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본질적 “사랑”은 아니라는 것입니다.“사랑”은 영생을 주는데 그 본질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본질적 최상의 “사랑”은 나와 너를 영원한 생명으로 살려주는 오늘의 새 말씀에 있습니다.
(원문 출처:새사람 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