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과 영생의 과정

구원(삯)을 받은 자는 노력 없이 수고한다.

제라늄A 2021. 9. 27. 20:50

요한복음 4:35-36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니라, 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 내가 너희로 노력하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 노력한 것에 참예하였느니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는 곡식을 거두는 것은  사람이 먹는 곡물을 거두는 것이 아니라 구원해야 할 하나님의 백성들을 “비유”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 말씀이 무슨 뜻인가?

곡식을 거두는 자는 구원자이신 예수님과 사도들을 말하며 이미 받았다는 “삯”은 “생명의 말씀”으로 구원을 받았다는 의미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할 때가 되었다는 밭도 사람들의 마음을 밭으로 “비유”하여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과 사도들은 영생에 이르는 열매 곧 기름(성령) 곧 말씀을 준비한 자들을 모으고 있는데 이는 말씀을 주는 자와 영혼을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는 것은 “광야”의 모세가 심은 것을 요단강의 세례요한이 거두고 요한이 심은 것을 “가나안”의 예수님이 거둔다는 말이 옳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내가 너희로 노력하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니 이미 다른 사람들이 힘들게 심어놓은 것을 너희는 거두는 수고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구원과 영생”은 예수님을 믿는다 하여 단번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심고 가꾸는 노력이 있어야 하는데 이것은 세상이라는 오늘날 기독교의 "애굽"의 "신학"교리와 기복신앙에서 벗어나 “광야”에서 모세를 통해 사십 년 동안 불기둥과 구름기둥 즉 시험과 연단의 과정을 거쳐 “가나안”으로 들어가야 이 때 오늘날 “실존 예수님”으로부터 생명의 말씀을 먹고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세상이라는 "애굽"교회에서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 받았다고 안주하지 말고 하루속히 거짓된 기독교에서 “출 애급”(탈출)하여 “광야”로 나와 기독교에서 받은 거짓된 것을 구름기둥과 불기둥 즉 징계와 훈련의 과정을 거쳐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 오늘날 “실존 예수님”이 주시는 생명의 말씀을 먹고 하나님의 아들로 거듭나야 합니다.

요한복은 4장에 수가 성 여인이 우물가에서 예수를 만나서 예수로부터 복음의 말씀을 듣고 깨닫는 순간에 기쁨이 충만하여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는데 과연 노력이 필요했을까요?  그렇게 영적 목마름 때문에 매일 우물(교회) 물을 길어 먹었어도 갈급한 심령으로 “고아, 과부, 나그네”와 같이 이 교회 저 교회를 전전하던 사람이 직접 예수를 만나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풍족히 얻어 마셨는데 그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일에 노력이 필요했겠는가?  생명의 말씀을 얻는 것은 댓 가를 치르는 것이 아닙니다.  잠언 23장:23 “진리를 사고팔지 말며 지혜와 훈계와 명철도 그리 할 지니라  그렇습니다. 어찌 하나님에게 거저 받은 것을 돈을 받고 팔 수 있다는 말인가?  이미 생명의 말씀으로 삯(구원)을 받은 사람은 절대로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요 10:12 삯을 받는 자는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고 분명히 말씀하시지만  성경을 수 없이 읽는 사람들도 선악의 열매를 따먹는데 정신이 팔려서 이런 말씀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입니다. 이렇게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맛보지 못한 사람은 노력을 강조합니다. 땀 흘려 일해야 먹을 수 있음을 강조합니다. 세상의 원리는 최선을 다 해서 노력해서 소유를 얻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노력 없는 수고를 말씀하셨습니다. 사랑을 따라서 수고하는 세계, 진리를 따라서 수고하는 세계를 말씀하셨습니다.“진리, 사랑, 천국, 생명, 부활”은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굼벵이가 매미가 되는 것이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듯 죽고 다시 산 생명이 아니면 부활을 얻을 수 없습니다. 만물은 진리가 수고하고, 어머니는 사랑으로 수고하고, 인격은 인격으로 수고하고, 행복한 사람이 행복으로 수고하는 것입니다. 선악으로 수고하는 사람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수고해야 먹을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고 결국은 흙으로 돌아갑니다. 사람이 지식으로 만든 세계는 많은 것들이 노력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연 만물은 노력 없음을 통해서 더 많은 것들을 산출해냅니다. 사람이 만든 것은 의지를 통해서 성취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연만물은 의지 없음을 통해서 더 많은 것들을 성취합니다. 노력이나 의지를 통해서 세운 것은  바벨탑처럼 다 무너질 것들이므로 다 허물어야 할 짐으로 남는 것입니다. 사람이 지식으로 만든 모든 것은 다 허물어야 합니다. 그러나 자연 만물은 스스로 죽고 다시 살면서 재 생산합니다. "선악"의 지식으로 결정하고 수고하는 한 조급하고 두렵고 염려하게 될 것이고 "선악"의 차이 때문에 늘 갈등하고 더 커야 하는 목적 때문에 늘 긴장할 것입니다. "선악"의 지식으로 얻은 것들은 어느 순간 성취했던 그것을 다시 잃어버립니다. 노력이나 의지로 만든 것은 끊임없이 그것을 유지시켜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유지하는 데에는 또 다른 노력이 필요하며, 마침내 지쳐 쓰러집니다. 자연만물처럼 오직 노력 없음을 통해서 성취된 것만이 자신에게 짐이 되지 않습니다. “진리”가 수고하고, “사랑”이 수고하고, “생명”으로 수고하는 것만이 짐이 되지 않습니다. 노력하지 않고 일하는 것은 호흡과 같은 것입니다. 호흡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이미 병든 자입니다. 호흡은 생명 현상이기 때문에 노력하지 않고 일하는 것입니다. 옛사람의 생명은 "선악"을 아는 지식으로 땀 흘려 노력하는 삶이고, “새 생명”은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부활되어 진리가 수고하는 삶입니다. "선 악"의 지식으로 무장된 옛사람은 진리를 알려고 노력하고 사랑을 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새 생명”을 얻은 삶은 열매를 얻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생명이 열매를 얻기 위해서 생명이 수고할 뿐입니다. 사랑하려고 노력하면 이미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수고하지 않고 일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도 수고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이 수고하기 때문입니다. 진리와 사랑으로 수고하는 사람이 생명으로 거듭난 사람입니다. 진리와 사랑은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진리와 사랑으로 수고하는 인격에 있는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11:28-30) 왜 예수의 짐이 가벼운가?  진리로 수고하고 사랑으로 수고하기 때문입니다. "무아경"(無我境)이 무엇인가?  자기가 없는(죽은) 상태가 아니겠는가? "무아경"에 이른 사람은 사랑하려고 수고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은 좋은 것이지만 사랑하려고 하면 그 속에 벌써 선으로 위장한 탐욕이 숨겨져 있음을 성찰해 볼 일입니다. 이미 “삯”(구원)을 받은 사람은 기도하되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고 그냥 하나님께 감사할 뿐입니다. 그리하면 모든 지각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십니다(빌4:6-7) 이것이 노력하지 않고 수고하는 삶입니다.

(원문 출처:새사람 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