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과 영생의 과정

하나님께 빚진 자의 탕감

제라늄A 2022. 7. 15. 12:43

사람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잘못을 하거나 실수를 할 때는 반드시 그에 따른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상대의 잘못이나 실수를 잘 듣고 알고 나면 모두 이해가 되고 따라서 용서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상대의 잘못이나 실수를 모르면 이해 할 수가 없기 때문에 질책을 하고 책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용서하는 자가 되려면 육적으로나 영적으로나 많은 경험을 쌓아가면서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야 합니다.  사도행전 7:59-60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사도행전에 스테판 집사가 자신을 죽이려고 돌을 던지는 유대인들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향해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스테판이 자신을 돌로 치는 자들을 용서할 수 있었던 것은 저들의 신앙을 이미 알고 이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스테판도 예수님과 사도들을 만나기 전에는 유대인들과 같이 예수를 핍박했던 자였기 때문입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스테판을 이단으로 몰아 돌로 치고 있는 자들 가운데는 사울 즉 사도바울도 함께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후에 사도가 되어 복음을 전할 때는 자신도 동족인 유대인들에게 스테판과 같이 이단으로 몰려 온갖 핍박을 받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용서는 상대를 알고 이해하는 자는 할 수 있지만 상대를 모르고 이해하지 못하는 자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십자가에 죽이는 유대인들 바라보시며 하나님을 향해 “아버지여 저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저들은 지금 저희가 하는 짓을 알지 못합니다”라고 기도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못 박는 유대인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신 것은 예수님은 이미 저들의 잘못된 신앙을 알고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상대의 잘못을 일곱 번 용서하면 되느냐고 질문 할 때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일곱 번이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죄는 어떤 죄를 말하며 용서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  그리고 예수님께서 용서하라는 죄는 영적인 죄를 말하는 것인가요? 아니면 육적인 죄를 말하는 것일까? 그도 아니면 영육 간에 모든 죄를 용서하라는 것일까?  분명한 것은 육적인 죄를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은 영적인 죄도 용서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육적인 죄를 용서하는 자가 영적인 죄도 용서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일곱 번씩 일흔 번이 라도 용서하라는 뜻은 모든 죄를 완전히 용서하라는 뜻인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용서의 진정한 영적의미는 모든 죄를 용서하고 영혼을 구원하여 완전히 살리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마6:14-15) 왜냐하면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그 영혼이 회개하고 살아날 수 있는데 용서하지 않음으로 그 영혼이 실족하여 멸망하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영혼을 살리기 위해서는 육적인 죄나 영적인 죄를 불문하고 모두 용서해야 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남의 과실을 용서하지 않는 사람은 자신도 과실을 범하고 있는 죄인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남의 과실을 용서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도 그의 과실도 용서하지 않기 때문에 결국 모두 멸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상대방의 과실을 용서하지 않으면 그 죄가 곧 자신에게 돌아온다는 것을 명심하고 또 명심해서 너그럽게 용서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서 간음하는 여인을 현장에서 잡아와 이 여인을 돌로 쳐야합니까 말아야 합니까? 라고 물을 때 예수님은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말씀하시니 모두 돌을 놓고 떠나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간음한 여인이나 여인을 돌로 치려는 자들 모두가 동일한 죄인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전생에서 죄인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며 또한 죄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죄를 짓고 살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이렇게 인간들은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씻고 죄 사함을 받기 위해서 예수를 믿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만일 죄인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죄를 범하지 않고 살수 있다면 예수를 믿을 필요가 없고 따라서 죄 사함을 받기위해 신앙생활도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짓고 살 수밖에 없고 따라서 예수님을 믿고 죄 사함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죄인들의 죄를 사해주기 위해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신 것이며 죄인들은 죄 사함을 받기 위해 예수를 믿고 의지하며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이 세상에 존재하는 죄인들은 예수님을 통해서 죄 사함을 받지 않고는 천국도 갈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주기도문을 통해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해 주옵소서”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 때문에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날마다 주기도문을 통해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주었으니 우리의 죄도 사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모두 죄인의 상태에서 죄인들의 죄를 사해 줄 수 있는 권한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죄를 사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예수님이나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난 사도들뿐 입니다. 그러므로 이웃에 있는 죄인들의 죄를 사해주려면 자신이 먼저 하나님의 아들을 통해서 죄 사함 받고 하나님의아들로 거듭나야 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반드시 오늘날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 계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기독교인들의 죄를 사해주실 분은 과거에 오셨던 예수님이나 앞으로 미래에 오실 예수님이 아니라 지금 살아계신 현재의 실존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기독교인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나누워 주실 분도 오늘날 현재의 실존예수님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오늘날 살아계신 예수님을 통해서 일용할 양식을 먹을 때 죄 사함을 받아 하나님의 아들로 거듭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오늘날 실존예수님을 통해서 죄 사함은 받아 하나님의 아들로 거듭난 자들이 바로 오늘날의 구원자가 되어 이웃에 죽어가는 영혼들의 죄를 사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아들이 이웃에 있는 죄인들의 죄를 사해줄때 완전히 죄 사함을 받아 예수의 상태에서 그리스도의 상태가 되어 영생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면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신 뜻은 새 계명, 즉 첫째 위로 하나님을 사랑하여 하나님의 아들로 거듭나는 것이고 둘째 이웃에 죽어가는 영혼을 자신(예수님)의 몸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제자들)로 창조하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의 죄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해 달라”는 기도의 진정한 의미이며 하나님의 뜻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으로부터 죄 사함 받아 하나님의 아들로 거듭난 자들은 이웃에 죽어가는 영혼들의 죄를 용서하여 하나님의 아들로 만들어야 합니다. 이상과 같이 이 길을 가는 자들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하나님의 아들로 거듭나 영생에 이르려면  첫째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오늘날 하나님의 아들을 통해서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아들로 거듭나야 하며  둘째 하나님의 아들로 거듭난 하나님의 아들들은 이웃에 죽어가는 영혼들의 죄를 사해주어 자신의 몸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을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마22:37~40)

이렇게 할 때 하나님께 내가 빚진 것을 탕감 받는 것입니다. 이 빚을 갚아야 완전한 구원과 하나님의아들로 탄생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의 "씨"(혈통)로 누가 누구를 낳고 낳는 예수님의족보를 이어 가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말씀은 참 하나님의 아들인 실존예수를 어떻게 만나느냐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말씀이 육신 되어 이 땅에 오신분이 어제도 계셨고 오늘도 계시고 내일도 계시는 항상 계셔야만 죄인들을 구원시킬 수 있습니다(계1:8) 그러므로 오늘날의 실존 예수님을 만나야 그 분의말씀으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원문 출처:새사람 블로그)

2013. 7.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