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과 영생의 과정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실체는 누구인가?

제라늄A 2022. 11. 19. 18:34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시키신 것은 “어둠”에서 “빛으로의 창조임을 보여주신 것이 출애굽”(탈출)인 것입니다.출애굽”의 10대재앙을 통한 “애급의 바로 왕의 대결은 곧 하나님의 본고향을 떠나 “빛의 나라를 향해 창조의 완성인 가나안까지 나아가야 하는 피나는 창조의 노력이 시작되는 최초의 지점이 되고 있습니다. “애급의 바로 왕은 인간 창조가 있기 전 원초적 지점인 상태 그대로라면, 하나님은 창조의 주체자로서, 즉 빛”의 하나님으로서 세상에서 거짓된 종교 생활하는 “애급“어둠”의 상태에서 탈출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동반하고 진두지휘하신다는 것은 그만큼 창조의 세월이 흘러  하나님이 인간에게 하나님의 존재를 알려서 “어둠”의 존재에서 “빛의 자녀로 출발시키신다는 의미가 되고 있습니다. 처음 창조의 시점에서 하나님은 바로 왕의 대결에서 승리자가 되기 때문에 하나님이 지팡이를 던져서 뱀으로 표징을 보일 때 바로 왕의 술객들도 뱀으로 맞섰으나 하나님의 뱀은 술객의 뱀을 삼켜버렸고 그 외에 열 가지 재앙 중에 아홉가지 까지는 바로 왕의 강팍한 마음이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가로막았던 대결상태를 유지하다가  열 번째 장자 재앙에서는 마침내 하나님은 승리자로, 바로왕은 패망자로 승패가 갈라지고 말았습니다. 장자의 재앙은 죽어야 하는 육적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문자 그대로 성경 기록대로라면 이스라엘은 물론 구약 유대당의 이스라엘입니다. 그러나 구약의 이스라엘은 실상이 아니고 모형 제단입니다. 실상은 예수님 때이며 구약이 그같이 예수님의 때를 보여 주는 모형 제단이므로 성경은 “비유라고 한 것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실상은 거짓된 신앙에서 죽고 새로 거듭난 택한 자 반 열이 되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출애굽”은 곧 오늘날 기독교인들에 관한 이야기가 흥미진진하게 펼쳐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이스라엘은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이 되며, 오늘날의 거듭난 택한 자 반열까지 되는데, 왜 그들은 모두 열 가지 재앙에서 출애굽”(탈출) 해야 하는 가입니다.

우선 재앙의 뜻을 살핀다면 재앙은 죽음을 뜻합니다. 창조의 시작과 진행과정에서의 재앙은 아직 영생을 받지 못한 창조 미완성을 뜻하고, 창조의 마침에서의 재앙은 영원한 멸망을 뜻합니다. 이제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탈출기에서 “애급에 내린 재앙은 창조의 시작점에서 내린 재앙이므로 영원한 멸망을 뜻하지 않고 단계별 구원을 보여준 것입니다. 출애굽”의 이스라엘은 첫 단계의 구원이요, 나머지 애급”은 다음 단계의 구원이기 때문에 재앙에 노출되어 있습니다.출애굽”을 위해 애급”에게 내린 열 가지 재앙의 의미가 무엇인가?  왜 아홉째 까지도 바로 왕의 강팍한 마음에서 벗어날 수 없었으나 결정적 열 번째 장자의 재앙에서는 백기를 들게 했는가?  장자를 치는 재앙이었다는 점에도 주목하며 장자의 의미를 알아보기로 하겠습니다.

성경은 모든 사물과 인물들이 천지창조부터 장자와 차자 둘로 나누기 시작합니다. 성경의 인물들을 보라!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첫 아담과 하와 때부터 둘입니다.아담은 흙으로 지어져서 흙으로 돌아가야 할 첫째 아담일 때 하와는 산 자의 어미로 둘째 아 담으로 명명되었습니다. 장자인 “가인”이 있고 차자인 “아벨이 있고 장자인 이스마엘과 차자인 이삭이 있고 장자인 에서”가 있고 차자인 “야곱”이 있습니다. 야곱의 딸 큰딸 “레아와 둘째 라헬이 있고 나 오미의 큰 자부 오르바”와 둘째 “룻”이 있고, 이 밖에도 수많은 인물들이 둘씩 짝을 지어 등장하는데 모두 둘째인 차자가 승리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성경 전체에 꼭 둘씩 짝을 지어 나옵니다. 첫째가 이라면 둘째가 태양인 것입니다.

초림 주와 재림 주 알파와 오메가,  고전 1:45~46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둘째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 자요 그 다음이 신령한 자니라,   둘째 아담인 재림 예수님이 창조의 완성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장자의 재앙이란 오늘날 기독교인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며  초림 예수님의 “비유 비사의 복음으로 형성된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옛 사람인 육적인 존재를 죽이고 새사람으로 부활되는 것이 장자의 재앙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한 번은 초림 예수님으로 복음을 율법을 “비유”로 주시고 다시 두 번째는 재림 예수님으로 오셔야 창세부터 감 추인 비밀의 말씀을 밝히시는 것입니다.초림 때는 빛은 빛이로되 밤을 다스리는 작은 광명으로 오셨고(달빛) 초림 때 작은 광명인 이유는 말씀을 감추신 “비유”로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재림 때는 낮을 다스리는 그 일곱 배의 큰 광명으로 오셨습니다(태양빛) 재림 때는 창세부터 감 추인 것을 밝히 드러내시는 진리의 새 말씀으로 오시기 때문입니다. 모형이라고 하는 구약 전체가 모두 “첫째”가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둘째”가 승리합니다. 따라서 모세를 영도자로 하여 출 애급”해서 “광야 행군을 마친 후 멀리서 가나안” 땅을 바라본 그 시점까지가 오늘날 기독교인들의 영역입니다. 다시 말해 기독교는 약속의 땅 가나안”을 사실적으로는 들어가지 못하고 바라만 보았던 그림의 떡이었다는 것입니다. 바라본다는 것은 꿈입니다. 아직 현실은 아닙니다. 현실화가 아닌 꿈으로서 바라만 보았다는 점에서 처음 입성한 가나안”이라고 평가했던 것입니다. 몸의 입성이 아니라 시각적 입성이었습니다.초림 주의 기독교인들은 구원을 꿈꾸었지만 구원이 무엇인지 도무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멀리서 약속의 땅을 바라만 본 것이 됩니다.애급”을 “출애굽” 탈출해서 바라만 본 처음 세대(기독교)는 아직 구원이 없습니다.

약속의 땅 “가나안복지(구원의 땅)는 예수를 예표 하는 여호수아를 따라서 그 다음 세대가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세계 복음화가 반드시 끝나야만 예수님은 다시 오시고 “가나안복지를 차지하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의 현실을 잘 생각해보라,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입으로는 복음화 세계를 이룬다고 주장하지만, 그 작업을 끝이 없이 영원히 지속시키면서 개별적으로 죽어서 예수 천당행을 부르짖는 신앙 시스템이기 때문에, 그들에겐 세계복음화 완수란 없습니다. 인간은 낳고 죽고, 다시 새롭게 낳고 죽고, 하는데 어떻게 한 사람도 빠짐없이 정확히 복음화 세계를 이룬단 말인가, 복음화 세계를 이룬다는 것은 내가 복음의 씨 뿌리기를 한 다음 다시 진리의 새 말씀을 찾고 있는 그 시점이 이룸이요, 마침이 됩니다. 즉 마침이란 다시 새로운 시작을 전제한 말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새로운 시작의 개념도 없고 마침의 개념도 없이 막연히 구원의 꿈만 꾸고 있기 때문에 약속의 땅을 멀리서 바라만 본 것이 됩니다.

“가나안은 말씀의 젖과 꿀이 흐르는 곳이므로 복음화 세계의 종착지입니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은 처음 자리에서 영원토록 복음의 씨 뿌리는 일만 고집하는 완고함 때문에 엄밀히는 복음화 세계의 종착지인 “가나안복지에 실체적 몸으로는 입성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나안을 바라만 본 모세는 예수를 예표 했고 그 모세의 바통을 이어받은 여호수아를 통해 다음 세대가 들어갔다는 것은 여호수아는 바라만 보았던 그 첫 세대에서 예수를 뜻하여 그가 다음 세대, 즉 기독교인들에서부터 출 애급 도망 나온 자들 고아 과부 나그네를 이끌어 내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가나안”을 멀리 바라본 것은 기독교인들을 대표하는 모세이므로 기독교인들이 복음을 땅 끝까지 전했다고 하지만 사실적인 완료라고는 할 수 없고, 다음 세대와 더불어 “가나안에 입성한 여호수아가 사실적인 복음 전파의 완료입니다. 

(원문 출처:새사람 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