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사람의 신앙 고백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 집에 가는 것보다 더 낫다.

제라늄A 2024. 6. 7. 22:51

전도서 7:1~2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 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이와 같이 됨이라, 아름다운 이름이란 무엇인가?  계시록 19:13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아름다운 이름이 보배로운 기름보다 낫다는 것은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보배로운 기름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름다운 이름이 없으면 보배로운 기름도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름다운 이름은 진리이고 보배로운 기름은 성령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4장에 진리의 성령으로 예배할 찌니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데 진리와 성령으로 예배할 찌니라고 하는데, 우리가 예배할 때는 반드시 성령이 있어야 하고, 그래서 진리의 성령으로 예배를 드릴 때만 하나님께서 그 예배를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사를 받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아름다운 이름과 보배로운 기름이 있고, 그런데 여기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낫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먼저 출생했기 때문에 죽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육신을 생각할 때 보면 육신이 태어났기 때문에 결국 육신이 죽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낫다고 합니다. 이 말씀은 우리의 육신의 죽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을 말하기 때문에 이 죽어야 으로 다시 거듭날 수 있고 부활할 수 있기 때문에 죽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육신적이 저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 집에 가는 것이 나은 것이 아니라 물론 육신적으로 봐도 그것이 유익이요 하지만 그것이 아니라 적이 죽는 것이 출생하는 날보다 낫다고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이 죽지 않으면 으로 거듭날 수 없기 때문에 우리의 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부인하고 죽는 것을 먼저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먼저 하지 않으면 우리는 절대로 하나님의 으로 출생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지 않으면 부활체가 될 수 없었던 것 같이 예수님이 그렇게 돌아가시면서 그의 영혼이 떠나가니라, 육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는 육을 생각 합니다. 그 육이 죽을 때는 그 의 죽음을 알려주시기 위하여 예수의 육체가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 육체의 을 육체의 실상이 어떤 것입니까, 바로 입니다. 그 이 떠나갔을 때 예수는 부활체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왜 낫느냐, 그것은 우리 이 죽지 않으면 으로 태어 날 수 없기 때문에 죽는 날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어떻게 신앙생활을 했습니까? 육신 안에 숨어있는 은 결국 죽기 싫어서 요리 조리피하고 저 깊은 음부 속에 숨어서 나타나지 않고서 우리를 계속 미혹시키면서 의 욕심을 채워가며 은 육체가 있으므로 자기존재가 자기 안에 자리 잡고 있으면서 영원히 살 수 있으니깐 절대로 이 육신을 떠나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육신이 없으면 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육신도 소중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육신도 우리가 무엇을 위하여 사느냐, 내 욕심을 위해 사느냐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사느냐 내육신이 무엇을 위해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 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남의 잔치 집에 우리가 기쁜 마음으로 찾아갑니다. 물론 육신을 위해 살 때는 그것이 전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우리의 영혼이 구원받기 위해 몸부림치고 정말 내가 영적인 존재가 되기 위해서 고민하는 사람이라면 자기 자신을 위해서 잔치 집보다 초상집을 또 이 초상집은 어떤 육신적인 초상집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나의 정말 육신 실체이 정말 내가 구원받지 못해서 내가 정말 부인되지 못하고 죽지 않아서 영적으로 거듭나지 못하는 것 때문에 슬퍼해야 되고 울어야 되고 고민해야 되고, 그래서 우리 자신 안이 장사집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날마다 우리의 삶을 통해서 초상집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도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노래를 합니다.

죽지 않으면 부활이 없기 때문입니다.  계시록 22-20 이것들을 증거 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그러므로 날마다 자신 안이 초상집이 되어야 주님이 속히 오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 영혼이 아직 구원을 받지 못해서 내 영혼이 아직 영적인 존재가 되지 못해서 내가 육이 고통받고 이 고통 받고 내가 이 고통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을 깨닫고 알기 위해서 자기 안을 초상집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내가 이 단회 적 생명인 적인 생명을 거듭나게 해서 영원한 생명으로 바꿔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 죽지 않는 입니다. 영원한 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으로 거듭나야 영원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영생할 수 있는 그런 하나님의 뜻과 목적에 도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정말 내 이 저 지옥 불에 들어갈 것을 알고 곡하고 통곡하고 울어야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신앙생활 하고 있습니까? 내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교회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혹시나 복을 주시고 혹시 나를 도와주시겠지 이런 기복적인 신앙생활을 아직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내 영혼이 잘됨과 같이 범사에 잘된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내 영혼이 잘되면 범사도 잘되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범사가 잘되기 위해서 영혼이 잘되려고 하는 것은 욕심이라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영혼이 잘되면 범사도 잘되게 되어있습니다. 왜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고통받고 범사가 잘 안 되는지 아십니까? 자꾸 이 하나님을 시험하고 욕심을 부리기 때문입니다.

다른 각도에서 다시 말씀드리면 여기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낫다고 했는데 죽고 싶어서 죽겠는데 죽어지지를 않는 거야 정말 죽어야 내가 살기 때문입니다. 죽지 않으면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래서 진정으로 죽고 싶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살기 위해서입니다. 죽는 것이 왜 죽어야 하는지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죽고 싶은 존재를 죽이기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왔고 아름다운 이름과 보배로운 기름을 가진 존재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죽을 존재가 있다면 그 죽일 수 있는 존재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죽을 수 있는 존재는 있는데 죽일 수 있는 사람이 없다면 절대로 죽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 안에는 혼을 죽일 수 있는 존재가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의 존재를 죽일 수 있는 존재는 하나님의 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 그 보배로운 이름만이 그 지옥 불에 들어가서 영원한 지옥 불에서 살 수밖에 없는 그 영혼을 죽이고 살려낼 수 있는 그런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네 영혼을 죽이는 존재만 두려워하지 말고 죽이고, 다시 살릴 수 있는 그런 존재를 두려워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죽이는 존재만 아니라 죽이고 살릴 수 있는 존재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고전 15장에서 말하는 살아있는 “영” 산 영을 가진 자 즉 살려주는 을 가진 자라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를 2.000년 전에 보내시고 오늘날도 이 땅에 실존예수를 보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이시기 때문에 직접 구원을 시킬 수 없고, 어느 때 어느 시대나 항상 말씀의 실체이신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오신 분이 실존예수가 있어야 구원을 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실존예수는 유대인들만 구원하시기 위해 보내신 것이 아니라, 오늘날도 실존예수가 있어야 그 말씀을 영접하여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오늘날의 예수를 영접하지 않고 이단으로 배척을 하면서, 유대인의 구원자 유대인들이 배척한 그 예수를 잘도 영접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배척한 그 예수를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유대인들보다 믿음이 더 좋아서 유대인의 예수를 영접하는 것입니까?

기독교인들이여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유대인들이 이단으로 배척해서 죽인 그 예수를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영접하는지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예수는 예전에도 계셨고 오늘날에도 계시고 장차에도 오시고 항상 실존으로 오시는 예수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예수는 구원할 권세와 심판할 권세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은 오늘날의 실존예수를 영접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고 배척하면 심판이라는 것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원문 출처:새사람 블로그) 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