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삶은 과연?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의 사랑은 다르다

제라늄A 2020. 6. 17. 20:51

 

사람들은 자신이 어디로부터 와서 이 세상에 살다가 어디로 가는지 또한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지, 삶의 의미는 진정 무엇인지, 이러한 생각조차 한 번 해 보지 못하고 허무하게 살다 인생을 마치게 됩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 그래도 좀 더 가치 있고 보람된 삶을 살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작은 정성을 모아 어려운 이웃을 위해 쓰며 또한 몸으로 봉사하면서 힘든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도 이러한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있기에  이 사회가 조금은 훈훈해 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을 사는 사람들 중 가장 귀감이 되는 사람은 아마 천주교의“테레사 수녀”일 것입니다.

그 분의 삶은 추앙받을 만큼 어떤 사람도 감당해낼 수 없는 희생과 봉사로 삶을 마친 분인 것을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신앙인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몸으로 참된 삶을 실천하는 사람이었는데도, 마지막 죽음을 앞두고 진정으로 하나님을 뜻을 알지 못하여 고뇌하였던 것을 교황청에 보내는 편지가 공개되면서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된 것입니다. 너무나 놀랍고 충격적인 일이었을 것입니다. 평생을 천주교“수녀”의 직분을 가지고 그런 삶을 산“수녀”가 하나님의 존재를 확신하지 못하고 천국을 가는지 지옥을 가는지를 확신을 가지지 못하고 “생”을 마쳤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의아해하고, 특히 천주교인들이나 기독교인들은 정말 놀라고 있지만  그 의문을 풀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테레사 수녀“의 일생의 삶은 우리 인간의 생각으로는 정말 더 이상의 삶이 없을 정도의 희생과 봉사의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테레사수녀“의“사랑과선”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사랑과 선”이 아니며 오직 인간의 윤리도덕적인 “사랑과 선”인 것입니다. 육신의”사랑”이요 육신의 희생이 너무나 크기에 아무나 따라 할 수 없는 “사랑과 선”을  하나님께서는 너희의 그 의로움과 선(善)을 나의 “아가페 사랑“의 생명으로 바꾸어 너희의 영혼을 구원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수석 제자인 베드로에게도 없던”사랑”이 바로“아가페사랑”입니다. 이 “아가페 사랑”은 원문이 아니면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사랑”이라는 두 글자는 인간의 윤리도덕의 “사랑”과 똑같으나 하나님의”사랑”과 인간의”사랑”은 내용이 전혀 다른 것입니다. 이 장면은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네가 나를”사랑”하느냐? 

물으실 때에 내가 주를”사랑”한다고 세 번이나 똑같은 질문과 대답을 하면서 서로 다른 차원의 문답을 하고 있었던 것은  예수님은 “아가페 사랑“으로 네가 나를”사랑”하느냐고 물으시고, 베드로는 인간의 윤리 도덕적인”필로스 사랑”으로”사랑”한다고 세 번씩이나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대답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사랑”하느냐고 물으신 예수님의 질문과”사랑”한다고 대답한 베드로의 대답은 글자는 똑같으나 전혀 뜻이 다른 차원의 대답인 것입니다. 원문을 통해서 이”사랑”이 어떤”사랑”인지 알 수 있는 것이지  한글성경만 보는 사람은”사랑”이라고 하니까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윤리도덕적인”사랑”으로 불쌍한 사람을 도와주고 이웃을 찾아다니며”사랑”이라는 명목아래 도와주기도 하고 구제도하고”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사랑”인 줄 착각하면서 율법이 완성된 줄 아는 것입니다.

한동안 세상을 울렸던 천주교“테레사수녀”는 인간의 “사랑과 선”을 그 누구도 따라 할 수 없는 자신의 생명을 내놓고 희생의 베풂인 것입니다. 그러나 “테레사 수녀”의 “사랑과 선”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사랑”이 아니며, 오직 인간의 윤리도덕으로만 베푸는 육신의 “사랑과 선”인 것입니다. 육신의”사랑”이요 육신의 희생이 너무나 크기에 따라 할 수 없는 “사랑과 선”을  하나님께서는 너희의 그 의로움을 나의 생명의 “사랑과 선”으로 바꾸어 너희의 영혼을 구원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과 선”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라,“아가페 사랑“을 소유한 예수님이나 사도들 이외에는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믿음(애급)~소망(광야)~가나안(사랑) 이러한 경로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성장한 가나안(사랑)이 이루어진 자만이 “사랑과 선”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 소망, 사랑”중에서”사랑”이 제일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라 해도 이”사랑”을 할 수 없는 것은 아직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나지 않았기 때문에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거듭난 사도들은 사도바울처럼 이웃을”사랑”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은“아가페사랑”이 성취된 자만이 할 수 있고,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한 자는 이러한 “아가페사랑”을 할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 있느냐 하면 “아가페 사랑”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이미 율법을 다 이룬 자입니다. 이미 율법을 흠도 티도 없이 잘 지킨 자입니다. 거듭나기 전에 그는 벌써 세상의 윤리 도덕 적 율법을 모두 지키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모든 말씀이 우리가 신앙하는 목적이 하나님의 생명을 얻어서 하나님의 아들“예수”가 되는 것이며,“예수”가 된 자는 이웃에 있는 영혼을 구원하여 내 몸과 같이 만들어야 구원의 완성에 이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제자들을 자기 몸과 같이 만들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유대인들에 의해 십자가에 달리셔서 죽음을 눈앞에 둔 상황에 하신 말씀은 "다 이루었다" 아버지의 뜻을 다 이루었다고 하십니다. 그것은 제자들에게 자신과 같은 “예수”의 몸을 만들었기 때문에 “다 이루었다”라고, 고백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오셔서 다 이루고 가신 것입니다. 이같이“테레사수녀”는 인간의 “필로스 사랑”으로 헌신과 봉사를 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가페”는 하나님의“사랑“으로 예수님과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난 하나님의 아들들 안에만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테레사 수녀”는 인간의 “필로스 사랑”으로 인간의 육신의 “사랑과 선”은 육신의 생명으로 죽어갈 뿐이며, 하나님의”영”의 거듭남은 “아가페 사랑“으로 하나님의 생명으로 영원히 남게 되는 것입니다.  롬 13;8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이웃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너희는 사랑의 빚“외에는 아무 빚도 지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남을”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모두 이룬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사랑”이 오늘날 천주교나 기독교 안에 있어야 그”사랑”을 할 수 있는 것인데  그런”사랑”이 천주교나 기독교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사랑”이 바로"아가페"하나님의”사랑”입니다.  딤전 4:15-16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너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 너가 너 자신과 가르침을 삼가 이 일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

(원문 출처:새사람 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