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유,비사,비밀.

포도원의 불 공평한 품삯의 비유

제라늄A 2020. 9. 17. 20:48

 

마 20:1:14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주인과 같으니 그가 하루 한 데나리온씩 품꾼들과 약속하여 포도원에 들여보내고 또 제 삼시에 나가 보니 장터에 놀고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내가 너희에게 상당하게 주리라 하니 그들이 가고 제 육시와 제 구시에 또 나가 그와 같이 하고 제 십 일시에도 나가 보니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이르되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서 있느냐 이르되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다.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하니라,

저물매 포도원 주인이 청지기에게 이르되 품꾼들을 불러 나중 온 자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자까지 삯을 주라 하니 제십 일시에 온 자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거늘 먼저 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 받은지라 받은 후 집주인을 원망하여 이르되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을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주인이 그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 이니라,

상기의 본문의 사건의 전말은 포도원 주인이 어느 일꾼을 “한 데나리온”의 품삯을 약속하고 일꾼을 고용해서 그는 아침 일찍부터 와서 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일꾼이 부족한지 주인은 저녁이 다 돼서 다른 일꾼을 데려왔는데, 품삯을 물어보니 자신과 똑같은 “한 데나리온”이라고 합니다. 아니 먼저 온 자는 아침 새벽부터 땀을 흘리며 일 했어도 “한 데나리온”인데, 나중 온자는 시작하자마자 해가 져서 더 이상 일 할 수도 없는데 “한 데나리온”이라니?  세상에 이런 불공평한 처사가 어디 있나? 그래서 그는 주인에게 찾아가 따져 묻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돌아오는 말은 “나는 네게 약속을 어기지 않았다. 내 것을 가지고 내 맘대로 하는데, 네가 무슨 참견이냐”는 것입니다. 세상에 이런 불공평한 일이 또 어디 있는가?

아침 새벽부터 저녁 가까이 일한 자신과  늦게 와서 한 시간도 채우지 못한 그 사람이, 어떻게 자신과 같은 품삯을 받는가 말입니다.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생각과는 다르게, 주인이 잘못한 것은 없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품삯을 많이 주든 적게 주던 그것은 주인의 마음입니다. 신학적으로는 이런 주인의 뜻을 하나님의 절대 주권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절대 주권이란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고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며 천국의 자격을 측정하는 잣대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의 생각과 다를지라도 불평하거나 불만족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인이 먼저 들어와 일한 사람에게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마 20:13-15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세상의 일반론적 견지에서 보면 포도원에 일찍 들어와 하루 종일 일한 자와 늦게 들어와 조금 일한 자에게 주는 품삯은 반드시 다를 수 밖에 없는데 “천국”에서는 그 둘에게 주는 품삯이 “한 데나리온”이라고 하는 영생의 상급이 동일하게 주어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동일한 품삯이라니, 세상적 관점에서는 얼마나 불공평하게 느껴지겠는가?  하지만 성경은 어디까지나 세상 적 관점이 아니고 하나님의 관점에서 그 누구이든 천국에서 영원히 사는 영생의 상급이 주어지는 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한 데나리온”의 동일한 품삯이 주어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문제는 그 영생이라는 품삯을 주실 때, 가장 늦게 들어온 자에게 가장 먼저 주시고, 가장 일찍 들어온 자에게는 가장 늦게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즉 “나중 된 자 먼저 되게 하시고 먼저 된 자 나중 되게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 “나중 된 자”에게 영생의 상급을 먼저 주시고 “먼저 된 자”에게 영생의 상급을 나중에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2000년 전 유대인의 예수를 믿으면 구원(영생)이라는 기독교 “신학 교리”에 현혹되어 있고 그 예수를 믿지 아니하면 지옥행이라고 알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2000년 전 유대인의 예수를 믿는 오늘날 기독교에서 이미 하나님의 구원의 자녀가 되었다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믿는 일이므로 이것이 곧 “먼저 된 자”입니다.

2000년 전 유대인의 예수를 믿는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오늘날 한국인 “실존 예수님 ”을 믿지 아니할 터이므로 천국 백성으로 구성된 오늘날 한국인 “실존 예수님”의 구원에 동참할 수 없는 것입니다. 구원은 어느 시대와 때를 막론하고 항상 구원자는 “알파와 오메가”로 “실존”으로 계실 때만이 구원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실존 예수님”을 영접한 늦게 들어온 자가 천국에 먼저 들어가고  2000년 전 유대인의 예수를 믿던 기독교인들이 기독교 “신학”이 거짓이라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 나중에 “출애굽”(탈출)한 자들이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같이 “먼저 된 자는 나중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중 된 자는 먼저 되는데 이들이 누구인가? 이들이 바로 오늘날 거짓된 기독교 신앙에서 “출애굽” 탈출한 “고아, 과부, 나그네”들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에서 2000년 전의 유대인들의 구원자 예수 그 “우상 예수”를 영접하고 이미 구원받았다고 큰소리치는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먼저 된 자”로서 거짓된 것을 깨닫고 회개하고 돌아오면 “나중에 된 자”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오늘날 “실존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먼저 된 자”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실존 예수”의 진리의 복음으로 구원받는 자들이 “나중 된 자”들이 먼저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먼저 되지 아니했다는 것은 거짓된 기독교의 “비 진리”를 먹지 않는 뜻에서 먼저 되지 아니했다는 것입니다.“비 진리”의 말씀에 허기진 배를 움켜쥐며 진리의 새 말씀을 찾아 여기저기 문전걸식하며 이교회 저 교회를 찾고 찾는 거지 나사로와 같은 기독교를 “출애굽”(탈출)한 “고아 과부 나그네”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오늘날 “실존예수님”이 풀어주시는 진리의 새 말씀을 듣게 되는 자들입니다. 즉 “나중 되는 자들이 먼저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은 아주 오묘한 진리가 숨겨져 있는 것입니다. 이런 “비유”의 말씀을 깨닫는 자들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이렇게 참고 인내하며 오랜 세월 인고의 끝에 오늘날 “실존 예수님”의 진리의 새 말씀을 듣고 “나중 되는 자”들이야 말로  하나님의 택함 받은 자들이며, 하나님이 받으시는 거룩한 인간 십일조이며, 신부 반열이며, 끝까지 기름(말씀) 준비에 철저했던 “슬기로운 다섯 처녀” 반열이며, 왕과 제사장 반열입니다.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은 성급하게 달콤한 마귀(뱀)의 속임수로 이미 2000년 전의 유대인의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천국 갈 일만 남았다고 마귀가 주는 선악과가 보암직하고 먹음직스러워 덥석 먹은 자들이 오늘날 기독교인들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이 구원을 받는 길은 2000년 전에 유대인들의 구원자 예수가 아니라, 오늘날의 구원자 “실존 예수”를 믿어야 “나중 된 자들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2000년 전의 “실존 예수”는 유대인들이 믿어야 하는 예수이고,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은 오늘날의 “실존 예수”를 믿어야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유대인들은 2000년 전의 유대인의 “실존 예수”를 믿지 않고 이단으로 배척해서 십자가에서 죽였고,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은 오늘날의 한국인의 “실존 예수”를 믿지 않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오묘하게 택한 자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감춰놓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상기의 본문의 말씀은 깊이 묵상하시면서 깨달아야 하나님의 깊은 뜻을 깨달아야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원문 출처:새사람 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