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기준은 예수

※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란? ※

제라늄A 2021. 1. 6. 21:36

요 4:20-24 우리 조상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예수께서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찌니라,  상기의 말씀은 “수가 성 여인”은 사마리아인으로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사마리아인들이 “그리심 산”에 사람이 건축한 건물성전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하나님은 과연 어느 성전에서 드리는 예배를 받으실까 하는 의구심이 항상 자리 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때문에 “수가 성 여인”은 지금 예수님께 우리 조상은 이산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당신들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이라고 말하는데 하나님이 어느 성전에서 드리는 예배를 받으시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답변을 하기 전에 먼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너무나 다른 답변을 하시기 때문에 이 “수가 성 여인”이 믿음이 없이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고 믿을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수가 성 여인”에게 놀랍게도 하나님은 이 산에서 드리는 예배도 안 받으시고 예루살렘에서 드리는 예배도 안 받으신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시면서 이제 너희가 하나님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너희는 알지 못하는 곳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드리는데  그 이유는 구원은 “유대인”(예수)에게서 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백성들이 교회에 나아가 예배를 드리는 목적은 구원을 받으려는 것인데 구원은 교회에서 시키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실체인 “실존 예수님”이 구원을 시키기 때문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아들이신 “실존 예수님”이 곧 성전이며 교회로서 하나님은 예수님 안에만 계시기 때문이며  또한 사도행전 7장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사람이 손으로 지은 교회에 계시지 않는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행 7:46-50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아 야곱의 집을 위하여 하나님의 처소를 준비케 하여 달라 하더니 솔로몬이 그를 위하여 집을 지었느니라,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선지자의 말한 바 주께서 가라사대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뇨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함과 같으니라,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은 사람이 손으로 건축한 건물교회에는 계시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건물 교회에 계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건축한 사람 “성전”된 몸 안에만 계십니다. 즉 말씀의 실체이신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오신 예수님과 제자들 안에만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전이나 오늘날이나 기독교 목회자들이 하나님의 교회라고 건물을 건축해놓고 그곳에 하나님이 계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주께서 선지자의 말씀을 인용하여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냐고 말씀하시면서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고 말씀하고 있습니다(행7:49~50)

상기의 말씀과 같이 하나님의 성전은 하나님이 “안식”하고 계신 하나님의 아들들을 성전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며, 하나님이 안식하고 계신 곳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안에만 계십니다.  고전 3: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듭나면 하나님의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반드시 자신의 몸 안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이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해야 하나님께서 “안식”하실 때  천국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믿어야 할 말씀은  요 1:1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니라,  이렇게 말씀의 실체이신 하나님께서 육신의 몸을 입고(요1:14) 오신 오늘날 “실존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생명의 말씀을 영접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시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자기 교회의 목사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으며 그의 말씀만 듣지  오늘날 “실존 예수님”은 믿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이단자로 배척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오늘날 “실존 예수님”은 기독교 주변을 맴돌면서 여우도 굴이 있고 새도 집이 있는데 인자는 머리 둘 곳 하나도 없다라고 한탄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수가 성 여인”이 찾는 예배 장소는 “그리심 산”도 아니고 “예루살렘”도 아니고 “수가 성 여인” 바로 앞에 계신 “실존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 바로 “예배”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도 바로 오늘날 “실존 예수”를 영접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그 이유는 구원이 “실존 예수님”에게서만 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이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는 목적은 구원을 받으려는 것인데  구원은 “실존 예수님”이 구원을 시키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예배를 드리는 장소는 건물 교회가 아니라  바로 “이 때”라고 하는 오늘날 “실존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가 어떻게 무엇을 가지고 드리는지를 구체적으로 알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본문에 “신령과 진정”이라는 의미와 원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뜻과 다르기 때문입니다.“신령과 진정”이라는 단어를 원문 성경에서 찾아보면 “신령”은(프뉴마)로 “진정”은(알레데이아)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때문에 아버지께 예배를 드리려면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최초에 “신령과 진정”으로 드린 예배는 “아벨”이 “양과 기름”으로 하나님께 드린 제사입니다.“가인과 아벨”은 하나님께 제물을 가지고 제사를 드렸는데 하나님은 “아벨의 제물은 받으시고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무엇 때문에 “아벨”이 드린 제물은 받으시고 “가인”이 드린 제물은 받지 않으셨을까요? “가인과 아벨”이 드린 제사는 지금까지 기독교인들에게 예배의 모범이 되어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는 것입니다.가인”은 땅의 소산 인 곡물을 제물을 드렸고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받지 아니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가인과 아벨”의 제사는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드리는 예배입니다. 문제는 유대인들이나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드리는 예배가 하나님이 받으시는 “아벨”의 제사이냐 아니면 하나님이 받지 않으시는 “가인”의 제사이냐 하는 것입니다.“아벨”은 “양과 기름”을 드렸는데 “양”은 “예수”를 상징하며 “기름”은 “성령” 곧 예수님의 “생명의 말씀”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성령과 진리”로 변화된 자신을 제물로 드리면 하나님이 받으시지만  땅의 소산으로 드리는 “소득의 십일조”의 돈을 드리면 받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영”이 시기 때문에 땅의 소산은 받으실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수가성 여인”에게 말씀하시는 “신령과 진정”은 곧 “아벨”이 하나님께 드린 “양과 기름”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신령과 진정” 즉 “생명의 말씀”으로 변화된 자가 드리는 제사를 원하시며 또한 제물도 “생명의 말씀”으로 변화된 마음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때문에 사도바울도 로마서 12장을 통해서  하나님의 원하시고 기뻐 받으시는 제사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롬 12:1-2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가 있고 받지 않으시는 예배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백성이라 해도 하나님이 받지 않으시는 예배를 드리면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같이 “신령과 진정”즉 아벨이 “양과 기름”으로 변화된 자신을 제물로 드린 예배이며  하나님이 받지 않으시는 예배는 가인이 땅의 소산으로 드린 곡물(돈)은 받지 않으신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신령과 진정”“생명의 말씀”을 통해서 변화된 자신을 제물로 드려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소득의 십일조(돈)인 땅의 소산만 열심히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마 23:23-24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너희는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는 삼키는 도다라고,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너희가 드리는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드리는 소득의 십일조(돈)를 말하며  더 소중한 “의와 인과 신”은 자신이 “신령과 진정”으로 변화된 마음을 드리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인들도 소득의 십일조(돈)는 드리지만 더 중요한 자신이 “생명의 말씀”으로 변화된 자신의 마음을 제물로 드리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소경 된 인도자, 즉 기독교목사들의 생각과 마음이 모두 헌금에만 가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변화된 자의 제물을 받고 안 받는 것에는 관심이 없고 "돈"에만 관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소경된 인도자, 즉 오늘날 기독교 목사들은 상기의 말씀에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킨다"는 것은 "돈"이 없는 가난한 자에게는 관심이 없고 돈 많은 부자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왜 이런 말씀이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을 까?  오늘날 기독교 목사들이 실상이 그렇기 때문에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킨다”는 말씀을 “비유”해서 기록된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신령과 진정”으로 변화된 너희 마음을 산제사로 드리는 것이 “온전한 십일조”이며 곧 너희가 하나님께 드릴 “영적 예배”라 말씀하시면서  너희는 이 세대들 곧 오늘날 세상 기독교에서 드리는 예배를 본받지 말고  오직 너희 마음을 새롭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변화를 받아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온전한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라는 것입니다.“신령과 진정”으로 마음이 새롭게 변화되면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무엇인지 그리고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충격적인 말씀은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오늘날도 찾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수많은 교회에서 기독교인들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하나님은 혹시나 “영적 예배”를 드리는 자가 있는가, 해서 찾고 계신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충격적인 말씀을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신령과 진정”으로 자신이 변화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목회자의 뜻에 따라 땅의 소산, 즉 소득의 "십일조"(돈)만을 드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는 반드시 “신령과 진정”으로 변화된 자신의 을 드리는 예배를 받으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원문 출처:새사람 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