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과 영생의 과정

오늘날 벌거벗은 사람들은 누구인가?

제라늄A 2021. 8. 3. 20:44

마 22:11-13 임금이 손을 보러 들어올 쌔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이르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그가 아무 말도 못 하거늘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어 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하니라,  계시록 19:13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 하더라,   사람이 옷을 입지 않고 벌거벗고 있다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이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짐승처럼 아무 생각 없이 육적 욕망과 본능으로만 살아가는, 사람을 뜻합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으므로 마땅히 하나님을 찾고 자기 존재의 정체성을 찾는 고뇌의 시간을 갖는 영적 존재이기 때문에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지만  만물의 영장 노릇을 포기하고 먹고 마시고 배설하는 일을 반복하다가 짐승처럼 죽어 간다면 그는 벌거벗은 인간인 것입니다.

즉 “육 “의 "옷"을 벗었다는 뜻이 아니고  하나님을 알아야 하는 영”의 "말씀의 옷"을 벗었다는 뜻이므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살아가는 자를 성경에서는 "옷"을 입지 않고 벌거벗었다고 합니다.  계시록 19:13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 하더라  따라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살아가는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벌거벗은 자들이 됩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하나님의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그렇게 벌거벗은 몸으로 출발했다는 것입니다. 에덴동산 이야기는 태고 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천 년 전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 오셔서 이 땅에 하나님을 알려주시는 천국복음이 전파되고 있는 때를 뜻하는 예언서입니다. 아담은 예수님을 예표하고 그의 아내는 백성을 뜻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임에도 벌거벗은 몸으로 출발했다고 하니 참으로 이상하지 않는가?  그렇습니다. 아담을 흙으로 만드시고 그 육신에 생기를 불어넣어 사람이 되었는데 하나님이 코에 불어넣은 생기는 “영이 아니라 분명히 혼”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사람의 몸속에 생기를 불어넣어 나타난 생령은 원문에 “르아흐”(영)가 아니라 “네페쉬”(혼)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창 2:7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이 말씀과 같이 하나님이 사람을 흙으로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어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생기를 불어넣어 나타난 생령은 구약성경 원문 성경에 히브리어로 “르아흐”(영)가 아니라 “네페쉬”(혼)로 기록되어 있으며 “네페쉬”는 사람의 "혼"(생명)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담의 코에 들어간 생기라고 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비유이며 “비유“는 하나님을 온전히 알려주는 말씀이 아닌 “비유“로 감춘 비밀이므로 여전히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벌거벗은 몸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비유"가 아니면 한마디의 말씀도 안 하셨습니다.  막 4:11-12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 이는 저희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예수님은 말씀을 "비유"로 가지고 오셨기 때문에  오늘날 기독교인들도 "비유"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면 구원을 얻지 못하므로  반드시 오늘날도 "비유"의 말씀을 풀어주시는 오늘날의 예수 "살려주는 영"으로 거듭날 때 비로소 "옷"을 입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비유"로 받은 인간으로만 있다면 그것은 벌거벗은 몸일 뿐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말씀을 "비유"로 가져온 벌거벗은 몸이니 그의 백성도 벌거벗은 몸입니다. 그런데 에덴동산의 아담과 하와는 자신들이 벌거벗은 줄을 알지 못하는 상태에 있었습니다.

벌거벗은 수치스러운 몸이지만 벌거벗은 줄을 모르기 때문에 수치도 느끼지 못하고 하나님 앞에 당당하고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지도 아니하는 사랑스러운 자녀였습니다. 이렇게 벌거벗었으나 그것을 알지 못한 관계로 수치를 몰라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지 아니하는 순리적으로 자연스레 "옷"을 입도록 하시려는 뜻에서, 즉 진리의 말씀으로 "옷"을 입게 하시려는 뜻에서 "동산 중앙의 선악과는 먹지 말고 동산 각종 나무 열매는 임으로 먹으라"는 율법을 주셨던 것입니다. 순종하여 동산 각종 나무 열매를 임으로 먹는다면 진리의 말씀으로 "옷"을 입게 되는 것이고, 불순종하여 동산 중앙의 선악과를 먹는다면 불행한 사태가 벌어지는 것입니다. 어떤 불행한 사태인가?

순종했을 때는 진리의 말씀으로 "옷"을 입는다면, 그 반대로 불순종했을 때는 벌거벗은 몸 그대로 일 뿐만 아니라 예전처럼 하나님 앞에 당당하고 사랑스러운 자녀가 더는 아닙니다. 자기들의 벌거벗은 몸을 보게 되어 그것이 수치스러워서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여 숨게 되는 최악의 불행한 사태가 발생하는 것입니다(창3:7-8) 백성들이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여 숨는다면 그것처럼 불행한 일은 없습니다. 예전에는 벌거벗었어도 그것을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을 피하지 않고 관계 소통이 잘 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먹은 후에는 눈이 밝아져서 자신들의 벌거벗은 몸이 보였다는 그 점에서 수치를 느끼고 하나님 앞을 떠나 숨어 있게 되었으니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것이고 원수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숨어 있는 아담을 끄집어내어 분노하여 가라사대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 라고 심히 꾸짖어 심판하시기에 이르렀습니다. 이같이 말씀을 "비유"로 받았기 때문에 비록 세상 사람들처럼 여전히 벗은 몸일지라도 선악과를 먹기 전과 후는 너무나 다르게 나타납니다. 하나님과 그 백성이 소통이 되는 아름다운 관계가 소통이 끊어지는 원수 관계로 돌변하고 말았으니, 이는 곧 뱀(사단)이 주는 “선악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뱀의 실체는 누구이며, 뱀이 주는 "선악과"는 무엇이기에 "선악과"를 먹으면 눈이 밝아져서 벗은 몸이 보인 까닭에 하나님을 피하여 숨게 만들었단 말인가?  숨게 하므로 백성들이 하나님과 단절시켜 원수 관계를 만든 뱀은 바로 사단입니다.

그리고 그가 백성들에게 준 달콤한 "선악과"는 "예수 믿으면 이미 구원을 받았다"는 기독교 신학 교리의 선포했던 것입니다. 기독교의 구원론으로 우리는 모두 하나님을 믿으니 구원받은 자들이 되었기 때문에 그 “선악과”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보기에 심히 먹음직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웠다라고 알려 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져온 말씀은 "비유"로 감춰진 말씀이요, 이 "비유"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게 하여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신다고 했는데  어찌하여 오늘날 기독교는 믿으면 당장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가?  당장 구원을 받았다고 하기 때문에 뱀이 주는 그 "선악과"는 심히 먹음직하고 탐스러워 오늘날까지 계속 기독교인들이 따먹는 유혹을 누구나 받기 마련입니다. 믿으면 당장 구원이라는 하는 상대적인 말이므로, 예수님의 복음은 오늘날까지 "선" 과 "악"을 부르짖고 있는 현실입니다.

이 때에 나의 벌거벗은 몸이 보이게 됩니다. 즉 나는 예수님으로부터 말씀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비유"임이 드러나고 "비유"이기 때문에, 아직 구원받지 못한 벌거벗은 몸임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 때부터입니다. 내가 벌거벗은 몸임을 알았을 때 나는 이제부터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깨달아야 하는데 생명의 길은 좁고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은 반면, 멸망의 길은 넓고 평탄하여 많은 사람이 그리고 간다고 했듯이, 오늘날 기독교인들 모두는 말씀을 깨달을 엄두도 내지 못하고 무조건 예수를 믿는 신앙에 그저 교회만 열심히 다니면 된다는 신앙이 오늘날 기독교인들의 현실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은 나태한 신앙으로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이라는 기독교 목회자들의 달콤한 화술에 그만 속으시고  하루속히 거짓된 기독교에서 "출애굽"(탈출)하여 진리의 말씀이 어디 있는지 두드리고 찾으셔야 자신의 생명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원문 출처:새사람 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