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듭남(죽음,부활)

하나님의 사랑을 소유한 자는 거듭난 자이다.

제라늄A 2021. 8. 31. 20:46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참 좋은 말씀입니다. 어떤 종교단체이든 “사랑”은 교리 중의 으뜸이며, 인간세상의 기본이 되는 모든 윤리 도적적인 가르침이 또한 “사랑”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기록된 “사랑”도 이와 같은 윤리도덕적인 “사랑”을 말하는가?  절대로 그렇지 않음이 또한 성경의 기록입니다. 지금까지 수없이 밝혔듯이, 성경은 율법과 구원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율법의 말씀은 문자 그대로 보는 성경 관이요, 구원의 말씀은 그 성경 문자를 오늘날 낱낱이 해석된 진리의 새 말씀으로 거듭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비유 비사”의 말씀이므로 그 “비유 비사”가 풀어져야 한다는 뜻에서 이중적인 것입니다. 성경은 “안팎”(계 5:1)으로 기록된 말씀이므로 "겉의 말씀"이 있고 "속의 말씀"이 있는데  “사랑”이라고 하는 단어가 또한 “겉 사랑”이 있고 “속사랑”이 있다는 뜻입니다.

“겉 사랑”에 대해서, 즉 인간은 윤리 도덕적인 “사랑”에 대해서 오늘날기독교인들이 많이 인용해 쓰는   고전 13장은 “사랑” 장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고전 13:4-8 사랑은 오래참고 온유하고 시기하지 않으며 자랑하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으며 무례히 행치 않으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으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않으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는 자에게 머무는 것입니다. 사랑이 머무는 그 곳이 바로 하늘 나라이며 천국입니다. 사람들이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사랑”은 사람 안에서 자생되는 것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받으려면 먼저 “사랑”이 머물 수 있는 곳, 즉 자신 안에 정결한 마음을 준비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머물고 있는 사람이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받은 자이며 “사랑”을 소유한 자입니다. 이러한 “사랑”을 소유한 자가 곧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할 수 있고 가난하고 병든 자에게 “사랑”을 베풀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수석제자 베드로에게도 없었던 “사랑”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원문이 아니면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의 “사랑”은 내용이 전혀 다른 것입니다. 이 장면은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실 때에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세 번이나 똑같은 질문과 대답을 하면서 서로 다른 차원의 문답을 하고 있었던 것은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시고 베드로는 인간의 윤리도덕적인 “사랑”으로 “사랑”한다고 세 번씩이나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대답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느냐고 물으신 예수님의 질문과 “사랑”한다고 대답한 베드로의 대답은 “사랑”이라는 글자는 똑 같으나 전혀 뜻이 다른 차원의 대답인 것입니다.  요 21:15-17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 나이다. 또 두 번째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하시고, 세 번째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 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구원시키라는 말입니다.

원문을 통해서 이 “사랑”이 어떤 “사랑”인지 알 수 있는 것이지 한글만 보는 사람은 “사랑”이라고 하니까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윤리도덕적인 “사랑”으로 불쌍한 사람을 도와주고 이웃을 찾아다니며 “사랑”이라는 명목아래 도와주기도 하고 구제도하고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이 하라는 “사랑”인줄 알고 율법이 완성된 줄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들의 “사랑”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사랑”이 아니며 오직 땅의 소산으로만 베푸는 육신의 “사랑”인 것입니다. 육신의 “사랑”이요 육신의 희생이 너무나 크기에 따라 할 수 없는 이들의 “사랑”을 하나님께서는 너희의 그 의로움을 나의 생명의 “사랑”으로 바꾸어 너희의 영혼을 구원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소유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 이외에는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 소망, 사랑” 중에서 그중에 “사랑”이 제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수석 제자인 베드로라 해도 이 “사랑”을 할 수 없는 것은 아직 예수와 같이 거듭나지 않았기 때문에 “사랑”을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거듭난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한 자들은 사도바울처럼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은 “하나님의 사랑”이 성취된 "예수"와 같은 자만이 “사랑” 할 수 있고,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한 자는 이러한 말씀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 “사랑”이란 이런 말을 할 수 있느냐 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이미 율법을 다 이룬 자입니다. 이미 율법을 흠도 티도 없이 잘 지킨 자입니다. 거듭나기 전에 그는 벌써 세상의 윤리 도덕적 율법을 모두 지키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모든 말씀이 우리가 신앙하는 목적이 하나님의 생명을 얻어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며, 아들이 된 자는 이웃에 있는 죽은 영혼을 “사랑”으로 구원하여 내 몸과 같이 만들어야 내가 구원의 완성에 이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신 목적은 “12”제자를 자기 몸과 같이 만들러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셔서 죽음을 눈앞에 둔 상황에 하신 말씀은 “다 이루었다” 아버지의 뜻을 다 이루었다고 하십니다. 그것은 “12” 제자들을 “예수”와 같은 몸을 만들었기 때문에 “다 이루었다” 라고, 고백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오셔서 다 이루고 가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난 자들만이 “사랑”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윤리도덕의 “사랑”은 육신의 생명으로 죽어갈 뿐이며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의 생명으로 영원히 남게 되는 것입니다.  롬 13:8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10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너희는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 빚도 지지 말라”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이웃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모두 이룬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사랑”이 오늘날 기독교 안에 있어야 “사랑”할 수 있는 것인데 그런 “사랑”이 오늘날기독교 안에는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 “사랑”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사랑”을 하려고 애쓰지 말고 “사랑”을 소유하기 위해서 힘써야 합니다. 그런데 “사랑”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먼저 “사랑”이 머물 수 있도록 자기 자신의 마음속을 비우고 깨끗이 청소해야 합니다. 이러한 비밀을 알고 “사랑”이 머무는 곳을 준비하는 사람들에게는 영원한 “사랑”이 곧 찾아 들것입니다.

(원문 출처:새사람 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