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듭남(죽음,부활)

“영적 죽음”이란 무슨 죽음인가?

제라늄A 2022. 4. 27. 17:59

“영적인 죽음”이라고 해서 육체가 전혀 상관이 없음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육체란 하나님의 말씀을 담는 그릇이기 때문에, 인간 육체는 처음에 예수를 영접했을 때 기존의 기독교 복음이라고 하는 기독교회에서 받은 거짓의 말씀을 담고 있다가  진리의 새로운 말씀을 발견하게 되면 “진리의 말씀”에서 거짓된 말씀은 버리고 “진리의 새 말씀”으로 다시 거듭날 때 영육 간의 그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굼벵이가 나비로 탈 바뀜 할 때 그 순간 육체의 고통을 말하는 것과 같은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육체라고 하는 그릇에 담기는 내용물이므로 거짓의 말씀을 버리게 될 때, 그 그릇이 되는 육체도 뼈가 녹고 살이 부서지는 고통을 당하는 형극의 길을 가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거짓의 말씀을 담고 있던 육신이 “비 진리”를 참 진리로 착각하고 확고하게 믿고 “비 진리”를 육체 안에 담고 있다가 “새 영의 말씀”인 진리의 말씀을 깨닫게 되면 “비 진리”의 말씀을 버릴 때에는 온몸이 지진이 일어나는 격한 감정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즉 정신적 고통은 물론 육체적 고통도 수반하게 되는 논리입니다. 마태복음 24장에 종말에는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일어나는 말씀이 있는데 이 말씀의 진정한 뜻은 거짓의 신앙에서 진리의 신앙으로 돌아서는 자신의 신앙의 종말을 말하며 종말의 기근이란 것은 진리가 없는 영적 기근을 말하며 지진이 있다는 것은, 거짓에 속한 교인들이 하나님 나라에 속한 성도들과 각자의 말씀으로 영적 싸움을 벌이다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깨닫고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확고한 말씀이 “비 진리” 거짓임이 드러나자 마음속에 격렬한 요동과 갈등을 느끼는 감정을 “지진”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것은 땅에서 일어나는 지진이 결코 아닙니다. 영적 죽음이야 말로 그에 상응하는 육적 고통을 반드시 수반하고 있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진실로 궁극적으로 죽는 것은 육체가 아니고, 기존의 거짓된 복음이라고 하는 “비유”의 말씀에서 죽는 일이기 때문에, 그것을 “영적 죽음”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다시 오시리라는 말씀 가운데   눅 17:25 그러나 그가 먼저 많은 고난을 받으며 이 세대에게 버린바 되어야 할찌니라,   여기서 그는 오늘날의 “실존 예수님”의 새 말씀을 뜻합니다. 오늘날의 “실존 예수님”의 새 말씀으로 먼저 많은 고난을 받는다는 것과 이 세대에게 버린 바 되어야 한다는 것 역시 그 영육 간의 고통을 뜻하는 것입니다(사53:9~)

만일, 사람들이 괴롭히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는 최초로 진리의 말씀을 찾아 구도의 길을 가는 선구자이므로 고난의 길을 가게 마련입니다. 하물며 그가 진리의 새 말씀을 찾아 사람들에게 전하게 되면 어떤 대접을 받겠는가?  기존의 신앙에서 평안을 외치며 희희낙락하던 사람들로부터 이단으로 따돌림을 당하고 멸시 천대를 받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그가 먼저 많은 고난을 받으며 이 세대에게 버린바 되어야 한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 말씀하시기 이전에 벌써  구약성경   이사야 53장 10절에서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신즉 그 영혼을 속건 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 하사 질고를 당한다고 했음을 보면 그는 육적으로도 숫한 고난과 가난이 아주 심함을 알게 됩니다. 하지만 결국 그가 그 영혼을 속건 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 영혼을 속건 제물로 드린다는 것은 그가 영적으로 죽는 죽음을 뜻하고 “영적 죽음”은 곧 “영적 부활”을 뜻하기 때문에 따라서 그를 통해 많은 사람을 구원하게 되기 때문에 그 “씨”를 보게 된다고 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부자가 천국에 가는 일이란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기보다 더 어렵다고 했습니다. 부자는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은 거짓된 “신학”교리로 이미 구원을 받았다고 믿는 영적 교만이므로 절대로 부자들이 된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부자는 악인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 부자와 악인은 죽어서 무덤에 던져질 수 밖에 없는데, 오늘날 “실존 예수님”은 그 같은 부자와 악인처럼 그렇게 죄인으로서 무덤에 던져졌다는 것입니다. 이는 그가 인류의 죄를 대신 뒤집어쓰고, 즉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영적 십자가(영적 죽음)를 지셨다는 뜻입니다. 그가 인류의 죄를 대신 지고 영적으로 죽은 분이므로 그의 무덤은 악인 중에 악인의 무덤이며 교만한 부자 중에 부자의 묘실인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무덤이나 묘실은 문자적인 무덤이나 묘실이 아니고 영적으로 죽은 죽음을 뜻하는 영적 무덤이요, 영적 묘실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 해당된다고 할 때는 문자적인 부자의 무덤이며 문자적인 부자의 묘실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생물학적/육적으로 죽으셨을 때 예수님의 시신은, 부자였던 아리 마데 요셉의 무덤에 안치되었던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실존 예수님”께서 그 “육”이 죽지 않고 살아야만 한다면   요 14: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했는데  어떻게 예수님이 우리 안에 들어올 수 있는 것인가?  육체라고 하면 육체만 달랑 있는 고깃덩어리가 아닙니다. 인간의 육체란 그 안에 반드시 “영”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늘의 하나님이나 천사들은 “영”만 있으나, 인간은 육체와 “영”의 말씀을 모두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일 때 인간은 “육”이라고 하지만 이는 상대적으로 그렇게 말할 뿐  인간에게는 육체도 있고 “영”의 말씀도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상대적으로 서로 구별하기 위하여 “남자”의 영적 상태에 있는 인간은 “말씀의 씨”를 소유한자요 “여자”의 영적 상태에 있는 인간은 밭이라고 하듯이, 그렇게 인간 육체는 하늘의 “영”의 말씀과 상대적으로 말해서 육체 일뿐 인간은 육체도 있고 “영”의 말씀도 있는 완성도가 더 높은 자인 것입니다. 천사는 첫째 날 하루 만에 지어질 때, 인간은 “6일” 동안 여섯 단계로 더디게 더욱 정성 들여 하나님의 “영”의 말씀으로 지어져야 하는 창조물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와 같이 인간에게는 육체도 있고 “영”의 말씀도 있기 때문에 예수께서   요 14: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라고 했을 때, 육체가 육체에게 서로 포개져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는 그 날에 예수님의 “영”의 말씀이 아버지 “영”의 말씀 안에 너희의 “영”의 말씀이 예수님의 “영”의 말씀 안에 너희가 있는 것을 알게 된다는 뜻으로 하신 말씀인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요, 너희에게 있는 말씀이 예수님의 말씀으로써, 모두 진리가 하나로 충만하게 됨을 알게 된다는 뜻입니다. 

(원문 출처:새사람 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