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계명: 간음하지 말지니라
제 7계명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간음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인간들의 타락과 가정의 파탄은 간음으로부터 시작된다 해도 과언이 아니라 생각합니다. 남녀간에 일어나는 간음은 예나 지금이나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인간이 존재하는 곳에는 항상 있는 일들입니다. 그런데 요즈음처럼 음란물이 넘쳐나고 간음이 난무하던 시대는 일찍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소돔성에 있는 사람들을 유황불로 멸하신 것은 간음의 도가 너무 지나쳤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육신적인 간음은 사회를 부패하게 만들며 영적인 간음은 신앙을 병들게 하여 결국 멸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이스라엘 백성들과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믿으며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으나 천국에 이르지 못하고 결국 멸망을 당한 것은 모두 간음죄 때문입니다. 이렇듯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간음하는 행위를 중죄로 다루고 계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예전에 하나님의 백성들이나 오늘날 기독교인들도 계속해서 하나님 앞에서 간음을 행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간음은 육신적인 간음과 영적인 간음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제 7계명을 통하여 간음하지 말라는 것은 육신적인 간음보다 주로 영적인 간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제 7계명에 기록된 간음이란 단어는 원어로 나압(히)이라는 단어를 쓰고 있으며 뜻은 "간음을 범하다, 배교하다, 혼인이 파기된 여자"등의 의미입니다. 육신적인 간음이란 혼외정사를 말하며 간음하는 행위는 세상의 법으로도 중죄로 다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는 간음도 한 사람이 두 남편을 번갈아 섬기듯이 두 주인, 즉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 마태복음 6장 24절 ]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믿는 목적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보다 자신의 뜻 즉 하나님을 통해서 복을 받아 잘 살려는 욕심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을 통해 축복을 받아 자신이 하는 일들이 모두 형통하기를 바라며 잘살기를 바라는 기복신앙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자들이 바로 두 주인, 즉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는 자들이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서 진리의 생명으로 죄인들을 구원하여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이러한 진리의 생명이신 예수님을 이용하여 교회사업을 하며 말씀을 팔아 돈을 치부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자들이 바로 간음하는 자들이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오늘날 기독교인들도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재물을 겸하여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재물은 금과 은 혹은 돈이나 재산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를 비유하여 말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존재가 있기 때문에 재물이 있는 것이지 자신이 없으면 재물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긴다는 말씀은 하나님과 자신을 겸하여 섬긴다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자기 자신을 믿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자신을 겸하여 믿고 섬기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자들이 바로 두 주인을 섬기는 자들이며 간음하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 야고보서 4장 4절 ]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니라.
상기에서 말씀하고 있는 간음하는 여자들은 예수님을 신랑으로 섬기면서 또 다른 신랑, 즉 세상과 벗하고 있는 자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를 신랑으로 모시고 살면서 세상과 짝을 하며 신앙생활 하는 자들은 하나님과 원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세상을 겸하여 섬기고 있는 자들이 곧 간음하는 자들이며 하나님의 원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인들도 대부분이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세상의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세상을 사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세상은 위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사람이 사는 세상보다 세상의 존재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는 세상은 이 세상이 아니라 세상에 있는 존재, 즉 하나님의 백성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주인으로 섬기면서 세상의 목자, 즉 아직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나지 못한 자기 목자를 예수님과 동등하게 믿고 섬기면 곧 간음하는 행위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목자를 예수님처럼 믿고 섬기면 자연히 예수님과 원수가 되어 예수님이 오시면 이단자로 배척하고 핍박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자들이 두 주인을 섬기는 자며 간음하는 자들이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간음한 자는 남자나 여자는 모두 죽이라고 율법으로 엄히 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간음하는 남자는 삯군 목자들을 말하며 여자는 음욕, 즉 욕심이 많은 교인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 레위기 20장 10절 ] 누구든지 남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 곧 그 이웃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는 그 간부(남자)와 음부(여자)를 반드시 죽일 찌니라.
하나님은 상기의 말씀을 통해서 어느 누구나 남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 곧 이웃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는 반드시 죽이라고 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에서 남의 아내와 간음을 하였다고 교인을 죽인 사례는 지금까지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의 법은 물론이지만 세상의 법도 사람들이 지키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이나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법이 있어도 그 법을 지키지 않는다면 그 법은 무용지물일 뿐만 아니라 세상의 질서나 하나님 나라의 질서가 유지될 수 없습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법을 제대로 지키지 않는 것은 정당한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율법을 모두 폐하셨다는 오해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람들이 어떠한 잘못을 범하였다 하여도 그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만 하면 모두 용서해 주신다는 믿음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온전케(완전케) 하러 오셨다고 말씀하시면서 간음에 대하여 더욱 중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 마태복음 5장 17절-18절 ]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상기의 말씀과 같이 예수님은 율법이나 선지자의 말씀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율법을 완전케 하기 위해서 오셨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없에지 않고 모두 이루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누가 감히 예수님께서 율법을 폐했다고 거짓증거를 하며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간음을 행한 자를 죽이라고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간음을 하지 않았어도 여자를 보고 마음에 음욕을 품기만 하여도 이미 간음한 것이라고 말씀하고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오늘날 거짓목자와 삯군목자들은 예수님께서 율법을 폐하셨다고 거짓증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 마태복음 5장 27절-28절 ]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요즈음 세상에 남자들이 어여뿐 여성을 바라볼 때 순간적으로 마음에 음욕을 품는 것은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실제로 음욕을 행치 않았어도 마음에 음욕을 품기만 하여도 이미 간음한 것이라고 충격적인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라면 이 세상에 살아가는 동안에 간음죄를 짓지 않은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음욕을 품지 말라는 여자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 즉 하나님의 성전(교회)을 비유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갈라디아서 4장 22절 이하를 통해서 두 여인은 곧 두 언약을 말하며 한 여인(하갈)은 지금 존재하고 있는 예루살렘교회를 말하며 또 한 여인(사라)은 위에 있는 예루살렘교회를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교회는 곧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님을 비유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인을 보고 음욕을 품지 말라는 것은 예수님이나 하나님의 교회를 통해서 자기 욕심을 채우려는 생각이나 마음을 품지 말라는 뜻입니다. 즉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예수를 믿거나 교회를 다니는 것이 곧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것이며 이미 간음을 하고 있는 자들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간음은 육체적인 간음이 아니라 영적인 간음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율법이나 예수님은 여자를 보고 음욕만 품어도 이미 간음한 자라고말씀하시며 또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간음을 하다 하루에 이만 삼천명이 죽었다는 것을 성경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 고린도전서 10장 8절 ] 저희중에 어떤 이들이 간음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간음하지 말자.
상기의 말씀은 민수기 25장에 이스라엘 백성이 모압 여자들과 음행한 것을 하나님께서 보시고 진노를 하여 염병으로 죽인 사건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 성을 유황불로 멸하신 것도 그 백성들이 음행을 행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간음을 행한 자들을 용서하지 않으시고 모두 죽이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간음을 행한 죄는 용서하시지 않고 모두 멸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 있는데 그것은 곧 요한복음 8장에 등장된 간음한 여인에게 예수님께서 행한 처사입니다. 마음에 음욕을 품기만 하여도 이미 간음한 자라고 말씀을 하신 예수님께서 무슨 이유로 하나님의 법을 여기고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용서해 주셨을까 하는 것입니다. 이 사건을 막연히 예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라고 일축해 버리면 절대로 안 됩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처사는 하나님의 공의와 질서가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건은 자세히 살펴보아야 합니다.
[ 요한복음 8장 3절-11절 ]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볍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저희가 이렇게 말함은 고소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저희가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가라사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다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
상기의 말씀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자를 예수님께 끌고와서 예수님을 시험하는 장면입니다. 진퇴양난에 처한 예수님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몸을 구부려 땅에 글을 두 번 쓰셨다고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무슨 말을 어떻게 쓰셨는지는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이천년이 지난 지금까지 아무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신학자들이 원어 성경을 찾아보아도 알 수 없고 금식을 하며 밤새 기도를 해도 알 수 없는 이 글은 과연 어떤 말씀일까요? 이 말씀을 이해하려면 이 사건의 배경을 알아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간음한 여인을 돌로 치려고 온 것이 아니라 사실은 예수님을 올무에 걸어 돌로 치려고 하였던 자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허리를 구부려 땅에 쓴 글씨를 보고 돌로 치려고 모였던 유대인들이 아무런 말도 못하고 모두 돌아간 것입니다. 성경에는 이 말씀뿐만 아니라 도저히 알 수도 없고 풀리지도 않는 말씀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에 사도요한이 이런 말씀을 열어보거나 풀어낼 사람이 없어 크게 울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계5:4) 그러나 성경은 예수님이나 사도 바울과 같이 계시의 눈이 열린 자들은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난 하나님의 아들들은 천국의 서기관된 자들로 천국 곳간에서 옛것과 새것을 마음대로 꺼낸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례요한이 "나는 내 뒤에 오시는 분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 말씀의 뜻은 예수님은 말씀을 푸는 자며 자신은 예수님의 말씀을 풀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간음한 여인을 돌로 치거나 용서할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님뿐이며 그곳에 모여 있는 자들은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도 죄인의 몸으로 간음한 여인을 돌로 칠 수도 없고 용서할 수도 없는 자들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과연 땅에 무엇이라 쓰셨을까요? 예수님이 땅에 두 번 엎드려 쓰신 글의 하나는 "너희는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이며 다시 몸을 구부려 두번째 쓰신 말씀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이 두 계명을 기록하시고 이 계명을 모두 이룬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곳에 모인 유대인들은 모두 예수님이 기록한 말씀을 보고 자신은 하나님의 계명을 이루지 못했다는 것과 자신들이 바로 간음한 여인과 같은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고 마음에 가책이 되어 돌을 놓고 모두 돌아가게 된 것입니다. 이 때 예수님은 간음한 여인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시면서 육신적인 간음도 다시는 범치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이 그러하듯이 이 세상에 일어나는 육신적인 간음은 이미 세상의 법으로 다스리고 있는 일이며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간음하지 말라고 명하시는 간음은 모두 영적인 간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간음은 두 주인, 즉 진리의 하나님과 기복의 하나님을 오고가며 간음하듯이 섬기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유대인들에게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을 구원자로 보내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인 유대인들은 이미 "가이사"라는 그들의 왕을 모시고 간음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진정한 유대의 왕(예수)을 배척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것입니다.
[ 요한복음 19장 14절-15절 ] 보라 너희 왕이로다. 저희가 소리 지르되 없이 하소서 없이 하소서 저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빌라도가 가로되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랴 대제사장들이 대답하되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상기의 말씀은 빌라도가 유대인들에게 예수를 가리키며 너희의 왕이라고 말하는데 유대인들은 우리의 왕은 가이사 외에는 없다면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게 하라고 소리치고 있는 것입니다. 빌라도는 이방인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유대의 왕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유대인들이나 대제사장들은 예수님을 전혀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유대의 대제사장들이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예수를 모른다는 것은 곧 하나님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유대 제사장들이 믿고 섬기고 있는 하나님은 참 하나님이 아니라 다른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너희 아버지는 거짓말 장이며 거짓의 아비라는 것과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서 났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 요한복음 8장 44절 ]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 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 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기 때문에 너희 아비의 욕심을 따라서 너희도 욕심을 행하고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너희 아비는 진리가 없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마다 자기 것으로 거짓을 전하기 때문에 처음부터 영혼을 죽이는 거짓의 아비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자기 아버지라고 주장을 하지만 예수님은 너희 아비는 하나님이 아니라 마귀이며 거짓말쟁이이며 처음부터 살인한 자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의 아버지가 진정 하나님이라면 하나님께서 구원자로 보낸 하나님의 아들을 모르고 죽이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아들을 모르고 배척하고 죽인 것은 유대인들이 믿고 섬기는 하나님은 참 하나님이 아니라 다른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예수님을 모르고 지금도 다른 예수(메시야)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욱 안타까운 것은 오늘날 기독교인들도 하나님께서 오늘날 구원자로 보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이단으로 배척하면서 구름타고 오신다는 재림예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또 다른 하나님을 믿으며 다른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는 자들을 간음하는 자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이렇게 다른 하나님을 믿으며 예수님을 배척하고 죽인 죄로 가스실에 수천 명씩 집단으로 들어가 잔혹하게 죽어 간 것을 비롯해서 그 후손들도 대대손손이 온갖 핍박과 고통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 모든 일들은 유대인들이 다른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께서 구원자로 보내주신 예수를 모르고 이단으로 핍박하고 죽인 죄 때문입니다. 또한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섬기며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들이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다른 하나님을 믿고 섬겼기 때문에 일어난 일들입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선지자와 제사장들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 예레미야 23장 9절-14절 ] 선지자들에 대한 말씀이라. 내 중심이 상하며 내 모든 뼈가 떨리며 내가 취한 사람 같으며 포도주에 잡힌 사람 같으니 이는 여호와와 그 거룩한 말씀을 인함이라. 이 땅에 행음하는 자가 가득하도다. 저주로 인하여 땅이 슬퍼하며 광야의 초장들이 마르나니 그들의 행위가 악하고 힘쓰는 것이 정직하지 못함이로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선지자와 제사장이 다 사특한지라 내가 내 집에서도 그들의 악을 발견하였노라. 그러므로 그들의 길이 그들에게 흑암 중에 미끄러운 곳과 같이 되고 그들이 밀침을 받아 그 길에 엎드러질 것이라. 그들을 벌하는 해에 내가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내가 사마리아 선지자들 중에 우매함이 있음을 보았나니 그들은 바알을 의탁하고 예언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을 그릇되게 하였고 내가 예루살렘 선지자들 중에도 가증한 일이 있음을 보았나니 그들은 간음을 행하며 행악자의 손을 굳게 하여 사람으로 그 악에서 돌이킴이 없게 하였은즉 그들은 다 내 앞에서 소돔 사람과 다름이 없고 그 거민은 고모라 사람과 다름이 없느니라.
상기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선지자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들의 행음에 대해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선지자와 제사장이 다 사특하여 내 집, 곧 하나님의 성전에서도 악을 발견하였더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마리아 선지자들은 우매함으로 인해 바알을 의탁하고 예언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을 그릇되게 하였고 예루살렘 선지자들은 가증하여 간음을 행하며 행악자의 악을 견고하게 만들어 악에서 돌이키지 못하게 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 앞에서 소돔사람과 다름이 없고 그 거민은 고모라 사람과 다름이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이들은 하나님의 선지자와 제사장임에도 불구하고 바알을 의탁하여 예언하는 간음을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들이 간음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을 목격하고 마음이 상하여 모든 뼈가 떨릴 정도로 놀랐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일들이 오늘날 교회에서도 수 없이 행해지고 있는 일들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전이나 지금이나 교회가 음행으로 타락하게 된 것은 모두 목회자들 안에 있는 욕심 때문입니다.
[ 갈라디아서 5장 16절-17절 ]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나님은 상기의 말씀을 통해서 너희 모든 일을 성령을 따라서 행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너희가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너희 안에 있는 육체의 욕심은 성령을 훼방하며 성령의 소욕은 육체의 욕심을 훼방하여 너희가 원하는 것을 서로 못하게 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은 서로 대적하면서 육신은 성령으로 행하는 것을 막고 성령은 육체로 행하는 것을 막고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려면 반드시 성령을 좇아서 행하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성령을 좇아 행한다고 하면서 한 편으로는 육체를 따라서 행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육체의 소욕은 곧 사람의 생각과 자기 안에 있는 욕심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행위가 곧 하나님의 생각과 자신의 생각을 넘나들며 두 주인을 섬기는 간음입니다. 왜냐하면 한 사람이 두 주인이나 두 남편을 섬길 수 없듯이 자기의 생각이나 욕심에 치우치면 하나님의 말씀에 소홀하게 되고, 하나님의 생각을 하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면 자신에게 등한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한 사람이 두 마리의 토끼를 동시에 잡을 수 없듯이 하나님의 뜻과 자신의 뜻을 모두 이루려 한다면 곧 간음하는 행위입니다. 즉 하늘의 신령한 복도 받고 땅의 썩어질 복도 받으려고 신앙생활을 한다면 곧 간음을 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목회자 중에는 우리가 예수를 믿음으로 이미 구원도 받고 천국을 가는 것도 보장되었으니 이제는 세상의 복을 넘치도록 받아 잘 살면 된다고 교인들에게 음욕을 불어넣는 목사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목회자가 두마음을 품고 하늘의 복과 땅의 복을 겸하여 받으려 한다거나 교인들을 미혹한다면 간음을 하는 행위입니다. 예전에 두마음을 품고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던 선지자가 바로 발람선지자입니다. 왜냐하면 발람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면서도 마음은 발락이 장로들과 함께 보낸 예물에 치우쳐 있었기 때문입니다. 옛말에 중이 염불에는 생각이 없고 잿밥에만 가있다는 말이 있듯이 오늘날 목회자들도 목회를 열심히 하면서 마음은 교인들의 헌금에 가있다면 곧 간음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상과 같이 하나님께서 간음하지 말라는 것은 육신적인 간음보다 주로 영적인 간음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육신적인 간음은 회개를 하면 용서받을 수 있지만 영적인 간음은 용서 받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는 영적인 간음은 절대로 행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섬겨야 하지만 재물은 섬기는 것이 아니라 정복하고 다스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돈에 종노릇하며 돈을 하나님처럼 소중히 생각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렇게 오직 하나님만을 섬겨야 할 하나님의 종들이 돈을 하나님처럼 소중히 여기며 돈에 종노릇을 하고 있다면 곧 간음을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상과 같이 하나님의 백성들은 오직 하나님(말씀)만을 소중히 모시고 섬겨야하며 그 외에 어떤 말씀(비진리)이나 존재나 재물도 소중히 여기거나 종노릇하거나 섬기면 안 되는 것입니다. 십계명 제 7계명: 간음하지 말지니라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