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9:1-3 이에 빌라도가 예수를 데려다가 채찍질하더라, 군병들이 가시로 면류관을 역어 그의 머리에 씌우고 자색 옷을 입히고 앞에 와서 가로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 찌어다 하며 손바닥으로 때리더라,
해설: 빌라도는 유대인들이 강도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소리를 듣고 예수를 데려다가 채찍질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군병들이 가시로 면류관을 역어 그의 머리에 씌우고 자색 옷을 입히고 앞에 와서 가로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 찌어다 하며 손바닥으로 때린 것입니다. 그런데 로마 군병들이 가시로 만들어 머리에 씌운 면류관은 “생명의 면류관”을 비유한 것이며, 예수님에게 입힌 자색 옷은 “세마포” 즉 “말씀의 옷”을 말하며 유대의 왕이라 한 것은 “하늘의 왕”을 비유한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아들이며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을 유대인은 물론 로마 군인들도 모르고 예수를 조롱하며 손바닥으로 때리기까지 하는 것입니다.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은 이렇게 유대인들에게 멸시와 천대를 받으며 고난을 받으시다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게 된 것입니다.
요한복음 19:4-13 빌라도가 다시 밖에 나가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을 데리고 너희에게 나오나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로라 하더라, 이에 예수께서 가시 면류관을 쓰고 자색 옷을 입고 나오시니 빌라도가 저희에게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이로다 하매 대제사장들과 하속들이 예수를 보고 소리 질러가로되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빌라도가 가로되 너희가 친히 데려다가 십자가에 못 박으라 나는 그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노라,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우리에게 법이 있으니 그 법대로 하면 저가 당연히 죽을 것은 저가 자기를 하나님 아들이라 함이니이다. 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 더욱 두려워하여 다시 관정에 들어가서 예수께 말하되 너는 어디로서냐 하되, 예수께서 대답하여 주지 아니하시는지라, 빌라도가 가로되 내게 말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를 놓을 권세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세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면 나를 해할 권세가 없었으리니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준 자의 죄는 더 크니라 하시니, 이러하므로 빌라도가 예수를 놓으려고 힘썼으나 유대인들이 소리 질러가로되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 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 예수를 끌고 나와서 박석(히브리 말로 가바다)이란 곳에서 재판 석에 앉았더라,
해설: 예수님을 심문한 빌라도가 다시 밖에 나가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을 데리고 너희에게 나오나니 이는 내가 그(예수)에게 아무 죄도 찾지 못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때 예수께서 가시 면류관을 쓰고 자색 옷을 입고 나오시니, 빌라도가 저희에게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이로다 하매 대제사장들과 하속들이 예수를 보고 소리 질러가로되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기 때문에 빌라도가 말하되 너희가 친히 데려다가 못 박으라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빌라도는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이라도 예수님께서 죄가 없다는 것을 알고 예수님을 살리려고 하는데, 하나님의 백성인 유대인들은 죄 없는 예수님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이려 하는 것입니다.
빌라도의 말을 들은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우리에게 법이 있으니 그 법대로 하면 저가 당연히 죽을 것은 저가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을 했다고 참람하다는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성경에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자를 신, 곧 하나님이라고 하지 않았느냐”고 말씀을 하셨는데도 불구하고 지금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한 것 때문에 죽이려 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말을 들은 빌라도는 이 말을 듣고 더욱 두려워하여 다시 관정에 들어가서 예수께 말하되 너는 어디에서 왔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빌라도에게 대답을 하지 않아 빌라도가 예수에게 다시 말하되 “내게 말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를 놓을 권세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세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고 말하는 것입니다. 빌라도의 말을 들은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권세를 위에서, 즉 하나님께서 주지 아니했다면 나를 해할 권세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물론 이방인의 권세도 하나님께서 주관하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나를 네게 넘겨준 자의 죄는 더 크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빌라도는 예수를 놓으려고 힘썼으나 유대인들이 소리 질러가로되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닙니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입니다”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빌라도는 이들의 말을 듣고 예수를 끌고 나와서 박석이란 곳에서 재판 석에 앉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상기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유대인들이 빌라도에게 살인자 바라바는 놓아주고 죄 없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때문에 빌라도는 예수님을 놓아주려고 해도 아무 소용이 없음을 알고 예수님을 유대인들에게 넘겨주며 그러면 예수를 죽인 죄 값을 누가 감당할 것이냐고 물을 때 유대인들은 “우리와 우리의 자손에게 돌리라”고 하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것입니다. 그 후에 유대인들은 예수를 죽인 그 “죄“ 값으로 그의 후손들이 “죄”없이 나라를 잃고 폴란드 수용소에서 수많은 유대인들이 살인가스 실에서 죽어가는 것을 역사적으로 지금도 남아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죄 없으신 예수님을 잔혹하게 십자가에 매달아 죽인 자는 유대인들과 제사장들인 종교지도자들입니다. 그 “죄”값을 그 후손들이 다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을 빌라도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고 사도신경을 통해서 날마다 위증을 하고 있는데 세상의 법으로도 거짓을 진실처럼 증거 하는 위증은 중죄(重罪)에 해당합니다. 때문에 사도신경으로 날마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죽였다고 위증을 하고 있는 오늘날 기독교인들도 반드시 이에 상응(相應)하는 징벌(懲罰)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요한복음 19:14-16 이 날은 유월절의 예비일이요 때는 제 육시라, 빌라도가 유대인들에게 이르되 보라 너희 왕이로다. 저희가 소리 지르되 없이 하소서 없이 하소서 저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빌라도가 가로되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랴, 대제사장들이 대답하되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하니, 이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히게 저희에게 넘겨 주니라,
해설: 빌라도는 예수를 심문한 후 유대인들에게 보라 너희 왕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빌라도의 말을 들은 유대인들은 소리 지르며 예수를 없이 하소서 없이 하소서 하며 저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해달라고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빌라도가 그러면 내가 너희의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란 말이냐고 물으니 대제사장들이 대답하되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다고 말을 하니, 빌라도는 할 수 없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히게 저희에게 넘겨준 것입니다. 문제는 빌라도는 예수님을 심문을 해보고 예수가 바로 유대인들의 왕이라는 것을 알았는데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왕은 하나님이나 예수님이 아니라 가이사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늘의 왕인 하나님을 버리고 세상 왕을 섬긴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때부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삼상 8:4-8 이스라엘 모든 장로가 모여 라마에 있는 사무엘에게 나아가서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당신은 늙고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니 열방과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 한지라, 우리에게 왕을 주어 우리를 다스리게 하라 한 그것을 사무엘이 기뻐하지 아니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 내가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날부터 오늘날까지 그들이 모든 행사로 나를 버리고 다른 신(다른 하나님)들을 섬김같이 네게도 그러하는 도다.
상기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을 유일신으로 모시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모든 장로들이 모여 사무엘에게 열방과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여 달라고 간청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이 여호와께 기도하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하려고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무엘을 버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버렸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버릴 수 있단 말인가” 하겠지만 에서가 시장할 때 장자 권을 팥죽 한 그릇과 바꾼 것과 같이 지금도 하나님이 필요 없으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어서 내가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날부터 오늘날까지 그들이 모든 행사로 나를 버리고 “다른 신”(다른 하나님)들을 섬김같이 네게도 그렇게 한다고 한탄하시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구원과 영생의 하나님을 버리고 기복을 좇아 기복의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버린 행위이며 “다른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럼에도 불고하고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참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고 착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9:17-22 저희가 예수를 맡으매 예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골고다)이라 하는 곳에 나오시니 저희가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을새 다른 두 사람도 그와 함께 좌우편에 못 박으니 예수는 가운데 있더라, 빌라도가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이니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기록되었더라, 예수의 못 박히신 곳이 성에서 가까운 고로 많은 유대인이 이 패를 읽는데 히브리와 로마와 헬라 말로 기록 되었더라, 유대인의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라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쓰라 하니, 빌라도가 대답하되 나의 쓸 것을 썼다 하니라,
해설: 유대인들이 빌라도에게 예수를 넘겨받아 끌고 가니 예수님은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골고다)이라 하는 곳에 도달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이 그곳에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을 박을 때 다른 두 강도도 예수님과 함께 좌우편에 못을 박으니 예수는 가운데 있었습니다. 이때 빌라도가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이니 그 패에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는 글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못 박히신 곳이 예루살렘 성에서 가까운 고로 많은 유대인들이 이 패를 읽는데 히브리와 로마와 헬라 말로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이 패에 글을 본 유대인의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말하되 유대인의 왕이라 하지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쓰라고 권하니 빌라도가 대답하되 나의 쓸 것을 썼다고 말을 한 것입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이 유대의 왕이라고 기록한 것은 예수를 심문하면서 예수는 곧 유대인들의 왕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며 그리고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유대 왕이라 기록된 글을 자칭왕이라고 다시 고쳐서 쓰라고 할 때 빌라도가 내가 쓸 것을 썼다고 말한 것은 빌라도는 예수님이 자칭 왕이 아니라 진짜 왕이라는 것을 유대인들에게 말한 것입니다. 문제는 이방인인 빌라도도 예수를 유대의 왕이라는 것을 알아보는데 어떻게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들의 구원자인 예수님을 몰라보느냐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유대인들이 지금까지 믿고 섬기고 있는 하나님과 왕은 “다른 하나님과 다른 왕”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너희 아비는 아브라함(하나님)이 아니라 “마귀”라고 했을 때 유대인들은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하나님)이라니깐 예수께서 다시 너희가 아브라함(하나님)의 자손이라면 왜 내 말을 못 알아듣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손이면 예수의 말을 알아듣고 못 알아들으면 마귀의 자손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목회자들도 오늘날의 “실존예수”의 말을 못 알아듣고 유대인들과 똑같이 이단으로 배척하는 이유는 마귀의 자손이기 때문에 오늘날의 예수의 말을 못 알아듣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속한 자는 그 말을 알아듣고 못 알아들으면 하나님의 속한 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요8:47) 때문에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통해서 너희는 다른 신, 즉 다른 하나님을 있게 말라고 명하시며, 사도 바울도 너희는 왜 “다른 예수와 다른 영과 다른 복음”을 받느냐고 한탄하시는 것입니다.
신명기 5:6-7 나는 너를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라, 나 외에는 위하는 신들을 네게 있게 말찌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라는 것은 너희가 지금 다른 “신”을 믿고 섬기고 있기 때문이며,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다른 “신”은 다른 하나님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원문성경에 다른 “신”은 분명히 다른 하나님으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고후 11:3-4 뱀이 그 간계로 이와를 미혹케 한 것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 만일 누가 가서 우리의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
상기에 사도바울이 말씀하시는 “다른 하나님, 즉 다른 영과 다른 복음과 다른 예수”는 구원과 영생의 하나님이 아니라, 기복의 하나님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물론 오늘날 기독교인들도 구원과 영생은 예수를 믿음으로 이미 받았다는 삯꾼목자의 말을 믿고 오직 축복을 받기 위해서 하나님을 믿고 예수를 믿으며 신앙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의 신앙이 기복을 위한 신앙이라는 것은 자타가 다 인정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기독교 목회자들의 설교가 축복으로 시작해서 축복으로 마치며 교인들은 축복이 좋아서 아멘 아멘을 연발하며 받아서 먹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9:23-27 군병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해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 군병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 뽑자 하니, 이는 성경에 저희가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 뽑나이다 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군병들은 이런 일을 하고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모친과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 지라, 예수께서 그 모친과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섰는 것을 보시고 그 모친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 이니이다하시고,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해설: 로마 군병들이 예수를 못 박은 후 예수님이 입고 있던 옷을 취하여 네 조각으로 나눠 각각 한쪽씩 가졌고 예수님이 입고 계신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해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었습니다. 군병들이 “속옷”을 보고 서로 말하되 이 “속옷”은 찢어서 나누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를 뽑자 하니, 이는 성경에 저희가 예수의 “옷”을 나누고 예수의 “옷”을 제비 뽑나이다 한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에게 일어나는 사건은 모두 구약성경에 선지자들을 통해서 이미 예언된 말씀들이 지금 일어나는 것인데 심지어 예수님이 입고 계신 “옷”을 제비 뽑는 것까지 예언이 되어있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인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입으신 “옷”은 말씀의 “옷”을 뜻합니다. 그런데 그 말씀의 “옷”이 “겉옷”도 있고 “속옷”도 있으므로 말씀도 표면적 말씀이 있는가 하면 안쪽 깊숙한 곳에 감 추인 말씀도 있다는 뜻입니다. 성경은 모두 하나님께서 깊이 감춰진 비밀의 말씀이기 때문에 밖으로 쓰인 문자적으로는 누구나 볼 수 있지만 안쪽으로 감춰진 비밀의 말씀은 천상천하에 볼 자가 없기 때문에 사도요한은 크게 울었다고 합니다.계시록 5:1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책이 있으니 안팎으로 썼고 일곱 인으로 봉 하였더라, 일곱 인으로 봉했다는 것은 “6일 천지창조”가 완성된 다윗의 뿌리로 나온 예수님 이외에는 아무나 볼 수 없게 자물쇠로 채워났다는 말씀입니다.
밖으로 쓰여진 포장지 같은 성경문자는 “육”이라고 할 수 있으며 누구나 볼 수 있습니다. 반면 그 문자 속에 깊이 감추어진 내용물은 “영”이 됩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비유로 가지고 오셨습니다(마13:34) 그러므로 “비유비사”의 말씀을 알지 못하면 구원을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마가복음4:11-12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 이는 저희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표면적인 말씀으로서 “겉옷”이라 할 수 있고 “속옷”이란 그 비유 속에 감 추인 진리의 새 말씀을 뜻합니다. 시편에 이미 예언되어진 대로 군병들이 “겉옷”을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취했다고 했습니다.
시편 22:18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이는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인(겉옷)이 온 세상 사방에 나누어짐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의 복음(겉옷)이 한 교단으로 전파됨이 아니라 수많은 교파로 갈리어 전파됨을 뜻하여, 이를 예수님의 겉옷을 넷으로 나눠가졌다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겉옷” 즉 밖으로 쓰인 문자 성경을 보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이제 “속옷”에 대해서 살펴보면 예수님의 “속옷”은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고 합니다. 즉 하나로 된 “통짜속옷”입니다. “통짜속옷”이기 때문에, 성경이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하나의 논리로 취합해서 기록한 것입니다. 이는 한 마디로 “비유비사”로 된 성경 전체가 하나로 정연한 논리로 밝히 드러낸 진리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통짜속옷”은 나눠 갖지 아니하고 제비 뽑기 하여 어느 한 사람이 갖기로 한 것입니다.
제비 뽑아 어느 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통짜속옷”이기 때문에, 말씀 또한 이 교단 저 교단으로 나눠짐이 전혀 없습니다. 제비 뽑힌 “통짜속옷”은 오늘의 “실존예수님”의 “속옷”의 말씀으로 깨달은 거듭난 자들에게 주시는 진리의 새 말씀이 “통짜속옷”이 됩니다. 제비 뽑힌 말씀(속옷)은 그 누구도 가질 수 없습니다. 오직 오늘의 “실존예수님” 한 분의 말씀으로 책정되었습니다. 주의 말씀을 듣고 오늘의 영적 무덤에 있는 우리가 생명의 부활로 나오기도 하고 사망의 부활로 나오기도 하는 전무후무한 단 하나 “통짜속옷”으로 짜인 진리의 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길은 “통짜속옷”을 소유하고 있는 오늘날의 “예수”를 영접해야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군병들은 이렇게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유대인의 왕이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을 박았는데 예수님이 달려계신 십자가 곁에는 그 모친과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께서 그 모친과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섰는 것을 보시고 그 모친에게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당신의 아들입니다”하시고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 어머니”라고 말씀을 하시니 그때부터 그의 제자가 예수님의 어머니를 자기 집에 모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어머니보고 “여자여 보소서”라는 말은 가나혼인잔치에서 예수가 어머니보고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라는 말과 같이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다는 말과 같이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기 전을 말합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돌아가시면서 자신을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어머니가 염려되어 사랑하는 제자에게 어머니를 부탁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인간적인 모습을 보면서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예수님 안에는 하나님의 신성만 계신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면이 계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때문에 예수님은 항상 자신을 “인자”라고 말씀하셨는데 “인자”는 사람의 아들이라는 말이며 곧 “인간예수”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인간예수”에 대해서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예수”를 모르면 천국은 물론 구원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자로 보내주시는 하나님의 아들은 오직 “인간실존예수”입니다. 왜냐하면 이분이 “통짜속옷”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9:28-30 이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룬 줄 아시고 성경으로 응하게 하려 하사, 가라사대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거기 신 포도주가 가득히 담긴 그릇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머금은 해융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의 입에 대니,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해설: 예수님은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시고 성경을 응하게 하시려고 말씀하시되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그곳에 신 포도주가 가득히 담긴 그릇이 있었습니다. 그곳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님이 목마르다고 하신 말씀을 듣고 신 포도주를 머금은 해융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의 입에 대니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아 마신 후 가라사대 “내가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시고 머리를 숙이셨고 예수님의 영혼이 돌아가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영혼이 돌아가셨다는 “영혼”은 원문에 “프쉬케(혼)”가 아니라 “프뉴마(영)”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혼”이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영(성령)”이 돌아가신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몸 안에 하나님의 “성령”(말씀)이 임하여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나 지금까지 예수님과 함께 계시던 “성령”(말씀)이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가셨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성경에 예언된 대로 오셔서 성경대로 생을 마감하시고 아버지께로 돌아가신 것입니다. 문제는 예수님께서 돌아가시면서 “다 이루었다”고 하신 말씀은 무엇을 다 이루었다고 하신 말씀인지 그 뜻을 분명하게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다 이루었다”는 이 말씀을 오해하여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들의 죄를 다 사해주었기 때문에 오늘날기독교인들은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았다고 또 착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돌아가시면서 내가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 모두가 아니라,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12제자들”을 완벽하게 하나님의 아들인 “구원자예수”로 완성시켰다는 뜻입니다. 즉 예수님은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을 구원시킨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고 영접한 12제자를 구원시켜 하나님의 아들예수로 완성하였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예수님은 돌아가시면서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맡겨주신 일을 모두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문제는 유대인들이 “인간 실존예수”즉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예수”를 믿지 않고 배척한 자들은 구원조차 받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오늘날 기독교인들도 이천 년 전에 유대인들을 구원하러 오셨던 역사적인 예수님이나 앞으로 다시 오실 미래의 재림예수만 기다리며 믿을 것이 아니라, 오늘날 살아계신 “실존예수”를 믿어야 구원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예수는 기독교인들 주변에 항상 존재하고 계십니다.
요한복음 19:31-37 이 날은 예비일이라 유대인들은 그 안식일이 큰 날이므로 그 안식일에 시체를 십자가에 두지 아니하려 하여 빌라도에게 그들의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 달라 하니 군병들이 가서 예수와 함께 못 박힌 첫째 사람과 또 그 다른 사람의 다리를 꺾고 예수께 이르러는 이미 죽은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 그 중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이를 본 자가 증거 하였으니 그 증거가 참이라, 저가 자기의 말하는 것이 참인 줄 알고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라, 이 일이 이룬 것은 그 뼈가 하나도 꺾지 아니하리라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
해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날이 바로 유대인들의 예비일이라 말하고 있는데 예비일은 “안식일”의 전날 즉 유대인들이 “안식일”을 준비하는 날을 말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이 큰 날이므로 그 “안식일”에 시체를 십자가에 두지 아니하려 하여 빌라도에게 그들의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 달라 하니 군병들이 가서 예수와 함께 못 박힌 첫째 사람과 또 다른 사람의 다리를 꺾었으나 예수께 이르러서는 이미 죽은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 그 중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십자가에 달려 죽은 자들의 다리를 꺾는 것인데 죽은 자의다리를 꺾는 것은 죽음을 확증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다리는 꺾지 않은 것은 예수님은 이미 죽은 것을 확인하였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죽음을 지켜본 자가 증거 하였으니 그 증거가 참이며 그가 이렇게 자기가 본 것을 말하는 것은 너희도 참인 줄 알고 믿게 하려는 것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이 일이 이루어진 것은 예수님의 다리가 하나도 꺾지 아니하리라 한 것은 성경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약의 유월절 어린양도 그 “뼈”를 하나도 꺾지 말라고 했듯이, 예수님의 다리도 군병들이 꺾지 아니했다고 했습니다.민수기 9:12 그 뼈를 하나도 꺾지 말아서 유월절 모든 율례대로 지킬 것이니라, 그 당시 다른 범죄자들은 뼈를 꺾는 것이 관례였으나 예수님은 그 “뼈”가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리라 한 성경을 응하게 한 것입니다.
왜 예수님의 “뼈”는 꺾지 말아야 하는가? 하나님은 육체가 없으신 “영”이시고 예수님은 육체가 있으신 분이므로 보이는 예수님의 몸체를 이루고 있는 “피와 살과 뼈”등은 모두 “생명의 말씀”이 됩니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일반인의 “뼈”는 꺾어도 되고 예수님의 “뼈”는 꺾이면 안 되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난 자의 “뼈”와 아직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나지 못한 죄인의 “뼈”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즉 “뼈”는 죄인들이 가지고 있는 “뼈”가 있고 의인이 소유하고 있는 “뼈 중에 뼈”가 있다는 말입니다. 때문에 죄인들의 “뼈”는 꺾어야 하지만 예수님의 “뼈 중에 뼈”는 꺾일 수도 없고 꺾여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예수님의 몸체를 구성한 “피와 살과 뼈”등에서 유독 “뼈”를 꺾지 않고 손상을 입히지 않는다는 기록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뼈”야 말로 “생명의 말씀”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이 비유로 가지고 오신 동일한 말씀을 뜻하는 “피와 살”은 하위 개념의 말씀이라면 “뼈 중에 뼈”라고 하는 “뼈”는 상위개념의 말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은 창세기의 아담이 갈비 “뼈”로 만든 “하와”가 오늘날의 “실존예수님”의 살 중에 살과 뼈 중에 뼈가 “생명의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죽으실 때 “물과 피”를 쏟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비유 속에는 반드시 깊이 감춰진 본질의 말씀이 있으매, 그 진리의 말씀을 일컬어 “꺾이지 않아야 할 뼈”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비유의 말씀에서 옛사람이 죽는 것이고, 그로부터 다시 부활하는 것은 비유 속에 감춰진 진리의 새 말씀으로 새사람으로 부활하는 것이 됩니다. 즉 예수님의 말씀이란 반드시 죽어야 그 안에는 반드시 다시 살게 되는 진리의 말씀이 감춰져 있다는 뜻에서 “꺾으면 안 되는 뼈”중에 “뼈”가 있다고 한 것입니다. “뼈”란 몸체를 떠받쳐 주는 골격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한 군병이 창으로 예수님의 옆구리를 찌르니 “피와 물”이 나왔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예수님의 몸에서 “피와 물”이 나온 것이 아니라, “생명의 말씀”이 나왔다는 것을 “비유비사”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몸에는 “생명의 말씀” 이외에는 들어 있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찔러 “물과 피”를 나오게 한 자들만 보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기독교인들 모두 다 예수를 볼 수 있게 벌써와 계신 예수를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영안이 없어 벌써와 계신 “예수님”을 보지 못하는 자들은 속히 오신다는 예수님이 왜 아직도 안 오시느냐고 불평을 하며 지금도 하늘의 구름만 쳐다보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육체를 입고 오신 “예수”를 부인하는 자들은 “적그리스도 영”을 받았기 때문에 육체를 입은 “예수”를 부인한다는 것입니다.요일 4:2-3 예수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이제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 이같이 “예수”는 벌써와 계신다고 분명히 말씀하시고 당시에 예수를 찌른 자들도 볼 수 있게 와 계시다고 말씀하시는데도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이런 말씀을 이해를 못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9:38-42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님의 제자나 유대인을 두려워하여 은휘 하더니 이 일 후에 빌라도더러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허락하는지라 이에 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니라, 일찍 예수께 밤에 나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근쯤 가지고 온지라, 이에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법대로 그 향 품과 함께 세마포로 쌌더라, 예수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에 동산이 있고 동산 안에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새 무덤이 있는지라, 이 날은 유대인의 예비일이요 또 무덤이 가까운 고로 예수를 거기 두니라,
해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두려워하여 숨겨 놓았는데 이 일 후에 아리마대 요셉이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가져가도록 허락을 한 것입니다. 이에 예수의 시체를 가져갔는데 일찍 예수님께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근쯤 가지고 온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이스라엘인들을 가르치는 선생으로 예수님이 행하시는 일을 보고 밤에 몰래 예수님을 찾아와 예수님과 대화를 하며 거듭남에 대해서 물었던 자입니다. 그러므로 요셉은 니고데모와 함께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법대로 그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몸을 감싼 것입니다.
그곳에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동산이 있고 동산 안에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새 무덤이 있었습니다. 이 날은 유대인의 예비일이요 또 무덤이 가까운 고로 예수님을 그곳에 안장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성경의 예언대로 오셨고 성경대로 사역을 하시다가 성경대로 세상을 하직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렇게 처참하게 비운에 돌아가셨고 시체는 버려진 상황인데, 아리마대 요셉 외에 다른 제자들은 어디서 무얼 하고 있었는지 궁금하리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