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21;1-6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바다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이 이러하니라, 시몬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시몬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매, 저희가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이 밤에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가라사대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하신대 이에 던졌더니 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해설: 예수님께서 도마에게 나타나서 말씀을 하신 후에 시몬 베드로에게 나타나셨는데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잡으러 가겠다고 말하니 저희가 우리도 함께 가겠다고 하여 나아가 배에 올라 “물고기”를 잡으려 하였으나 그 밤에 한 마리도 잡지 못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본래 “물고기”잡던 어부였기 때문에 다시 “물고기”를 잡으려고 디베랴 바다에 그물을 던진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잡으려는 “물고기”는 “물고기”가 아니라 “애급”이라는 세상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비유”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바다는 세상을 말하며 “물고기”는 아직 육신에 속한 하나님의 백성들을 “비유”하여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애급이라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신앙생활을 하는 “물고기”들이 출애굽을 하여 “광야”로 나오면 “들짐승”이 되는 것이며 광야의 “들짐승”이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연단을 받으면 “육축”이 되는데 “육축”(양)은 곧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르는 “양”들, 즉 예수님의 제자들의 영적상태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성경에서 말하는 “물고기”나 “짐승들”이나 “육축”들은 모두 하나님의 백성들의 영적인 수준을 분류하여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어둠의 존재들을 모두 “물고기”나 각종짐승으로 “비유”합니다. 욥기 12:7 모든 짐승에게 물어 보라 그것들이 네게 가르치리라, 공중의 새에게 물어 보라 그것들이 또한 네게 고하리라, 바다의 고기도 네게 설명하리라, 이같이 어둠의 존재를 짐승이니 “물고기”로 비유 합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물고기”를 잡으려고 그물을 던졌지만 밤새도록 한 마리도 잡지 못한 것입니다. 시간이 흘러 날이 새려고 할 때 예수께서 베드로가 “물고기”잡고 있는 바닷가에 나타나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신 줄 알아보지 못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때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물고기”가 있느냐 물으니 없다고 대답합니다.
“물고기”가 없다는 말을 들으신 예수님은 그러면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고 말씀하시어 그물을 오른편에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이 잡혔는데 그물을 들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잡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든 말씀이 “비유와 비사”의 말씀이듯이 배의 왼편은 넓고 평탄한 멸망의 길을 가는 자들을 말하며 오른편은 좁고 협착한 생명의 길을 가는 자들을 “비유”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그물을 오른편에 던저 잡으려는 “물고기”는 좁고 협착한 생명의 길을 찾고 있는 자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바로 “고아, 과부, 나그네”들입니다.
요한복음 21:7-11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 다른 제자들은 육지에서 상거가 불과 한 오십 간쯤 되므로 작은 배를 타고 고기든 그물을 끌고 와서 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 하신대, 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 올리니 가득히 찬 큰 물고기가 “153마리”라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 하였더라,
해설: 부활한 예수님이 “물고기”를 잡고 있는 제자들에게 모습을 드러내어 말씀까지 하셨으나 제자들은 그분이 바로 예수님인줄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다른 사람”의 몸을 입고 나타나셨기 때문에 부활하시기 전의 모습과 부활하신 후의 모습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제자들이 예수님이 말하는 소리를 듣고 베드로에게 주시라 하니 베드로가 겉옷을 벗고 있다가 놀라서 허겁지겁 겉옷을 두르고 바다로 뛰어 내렸다는 것입니다. 다른 제자들은 육지에서 상거가 불과 한 오십 간쯤 되므로 작은 배를 타고 고기든 그물을 끌고 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었습니다. 이런 말씀들이 일상용어로 보이지만 모두 “비유비사”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일일이 해석하기가 아주 곤란한 것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내용만 해석해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활한 예수님께서 준비된 “생선”이나 “떡”을 드시지 않고 제자들에게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드셔야 할 “양식”은 우리가 먹는 “생선”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배 오른 편에 그물을 던져 잡은 생명의 좁은 길을 가는 “물고기”들에게 말씀을 전하는 것이 예수님이 먹어야할 양식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물고기”들로 먹어야 할 양식은 예수님의 말씀을 먹는 것이 “물고기”들의 양식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베드로가 달려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 올리니 가득 찬 큰 “물고기”가 “153마리”나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153마리”의 숫자도 영적의미가 깊이 숨겨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153”이라는 숫자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양육한 “물고기”들이 예수님의 제자들과 같이 “애급, 광야, 가나안 3일길”을 통과한 완성된 자들을 “120”으로 비유한 것입니다. 또는 오순절 날 다락방에 “120”문도들을 비유한 것입니다. 그리고 “30”이라는 숫자는 예수님의 나이 “30세”에 세례를 받고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도 “애급, 광야, 가나안 3일 길”을 완성한 숫자를 비유한 것입니다. 그래서 합계가 120+30+3=153 입니다. 이같이 숫자에도 깊은 뜻이 감춰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오병이여”기적으로 “12광주리”가 넘친 사건과 동일한 것입니다.
요한복음 21;12-14 예수께서 가라사대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주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저희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
해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와서 조반을 먹으라고 말씀하시니 제자들이 이제 예수의 말씀을 듣고 주님이신 줄 알았기 때문에 당신이 누구냐고 묻는 자가 없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가져다주는 떡과 생선을 앉아서 받아 드시기 전에 예수님이 먼저 일어나 제자들에게 떡을 가져다가 주시고 생선도 주신 것입니다. 독자 분들은 이런 글을 보시면서 예수님이 주시는 떡과 생선이 무엇인지 이해를 하시고 읽으셔야 합니다. 이런 말씀들이 일상용어로 보이지만 모두가 “비유비사”로 기록된 말씀이라는 것을 아시고 성경을 읽으셔야 합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섬기면서 사랑하신 것입니다. 때문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몸소 본을 보이면서 제자들에게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에 따라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사도가 되어 예수님이 행하신 일들과 같이 이웃에 죽어가는 영혼들을 사랑으로 섬기며 구원의 사역을 감당한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서 행하신 일입니다.
마태복음 17:24-27 가버나움에 이르니 반 세겔 받는 자들이 베드로에게 나아와 가로되, 너희 선생이 반 세겔을 내지 아니 하느냐, 가로되 내신다 하고 집에 들어가니, 예수께서 먼저 가라사대 시몬아 네 생각에는 어떠하뇨, 세상 임금들이 뉘게 관세와 정세를 받느냐 자기 아들에 게냐 타인에 게냐,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러하면 아들들은 세를 면하리라, 그러나 우리가 저희로 오해 하지 않기 위하여 네가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물고기를 가져 입을 열면 돈 한 세겔을 얻을 것이니 가져 다가 나와 너를 위하여 주라하시니라, 이 말씀은 “비유비사”로 깊이 감추어져있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내용은 누구든지 이 “성전”(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성전 세를 내야하는데 한 사람이 “반 세겔”이라는 성전 세를 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바다(세상)에 나가서 낚시로 “물고기”를 잡아서 그 “물고기”입을 열면 “한 세겔”의 돈을 얻을 것이니 그 돈으로 나와 너를 위하여 성전 세를 내고 들어가자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은 바로낚시로 “물고기”를 잡는 것입니다. 네가 바다(세상)에서 “물고기”를 잡는데 “물고기”를 잡으면 그 입에서 “한 세겔”이라는 돈이 나오는데 그 “한 세겔”이라는 돈으로 너와 내가 “반 세겔”씩 성전 세를 내고 “성전”(천국)들어가자는 것입니다.
“물고기”란 뜻은 애급이라는 세상교회에서 신앙생활 하는 하나님의 백성 기독교인들을 비유하는데 기독교인들이 “물고기” 그림을 자동차 뒤에다 붙이고 다니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는데 그 뜻은 나는 기독교인이라는 상징으로 붙이고 다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물고기”의 뜻을 설명하자면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인간의 존재들을 바다의 “물고기”로 비유한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바다에서 “물고기”를 잡았다는 것은 즉 세상에 살고 있는 어둠의 존재를 구원해서 그 입에서 “세겔”이라는 돈이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세겔”이란 돈의 뜻은 무엇을 비유하는가? 성경에서 돈의 가치도 단위가 있습니다. “애급”이라는 세상은 “드라크마”라고 비유하고 “광야”는 “세겔”이라 비유하고 “가나안”은 “달란트”라고 비유 합니다.
그러므로 “애급”이라는 세상에서 “믿음”으로 신앙생활 하는 자의 영적상태를 “드라크마”신앙이라고 비유합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드라크마” 비유가 있는데 어떤 여자가 등불을 들고 “드라크마”동전을 찾는데 이동전은 누가 찾지 않으면100년이라도 캄캄한 방구석에 그대로 있는 것인데 이 동전을 이 여자가 찾아 기뻐하는 것은 100% 은혜의 구원인 것입니다 이것을 “애급신앙”에서 기독교인들이 처음에 믿음으로 구원의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이 예수를 믿음으로 값없이 받는 은혜를 “드라크마” “애급신앙”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애급”의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을 비유한 것이고 이들이 출 애급을 해서 “광야”로 나오는데 이것을 “소망”이라고 하며 “세겔”이라고 비유하며 이것을 “광야”를 상징합니다. 그 다음은 “달란트”이것은 “사랑”을 비유하며 “가나안”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 소망, 사랑, 중에서 “사랑”이 제일이라는 것입니다.
이 “사랑”은 인간의 “사랑”이 아니라 영혼을 구원하는 “아가페사랑”을 말합니다. 이 사랑은 “애급”이나 “광야”에는 없고 “가나안”에만 “사랑”(아가페)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애급”의 신앙에서 조금 성장하면 “출 애급”을 해서 “광야”로 나오게 되면 이것을 “광야”의 “세겔”이라고 합니다. 출애굽기 30:13-16 성소에 세겔 데로 “반 세겔”을 낼 찌니 한 세겔은 20게라라 그 “반 세겔”을 여호와께 드릴 찌며 무릇 계수 중에 드는 자 곧 20세 이상 된 자가 여호와께 드리되 너희 생명을 속하기 위하여 여호와께 드릴 때에 부자라고 “반 세겔”에서 더 내지 말고 가난한 자라고 덜 내지 말찌며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서 속전을 위하여 회막의 봉사에 쓰라, 이것이 여호와 앞에서 이스라엘자손의 기념이 되어서 너희의 생명을 속하리라,
이 말씀의뜻은 구약시대에도 20세 이상 청년이 되어야 “반 세겔”을 성전에 바치므로 생명을 속하여 주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광야”에서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연단을 받고 성숙해지면 이곳을 벗어나 “가나안”이란 곳에 입성하는데 돈의 가치가 “단란트”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장의 말씀은 베드로가 낚시로 “물고기”를 잡아 그 입에서 “세겔”의 돈을 얻었다는 뜻은 베드로가 바다에서 “물고기”를 잡아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해서 20세 청년의 상태로 광야의 “세겔”의 영적수준으로 양육을 했다는 것입니다. 즉 이때가 중간정도로 양육시킨 20세 청년의 상태 “광야”생활 즉 성화가 되가는 단계 까지 양육을 시킨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나이 30세라는 것은 가나안에 입성한 장성한 자를 상징하는 숫자입니다.
그 다음이 “달란트” 즉 “가나안”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돈에도 영적인 단계가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성전”(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반 세겔”이라는 돈이 꼭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물고기” 입에서 “한세겔”을 얻어 예수님과 같이 성전에 들어갈 수 있는 것과 같이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은 “한 세겔”이 있어야 예수님과 함께 성전(천국)에 들어 갈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핵심은 우리가 구원을 받으려면 하나님께 은혜의 빚을 반드시 갚아야 완전히 구원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래서 “반 세겔”을 얻기 위해 베드로가 “애급”의 존재인 “물고기”의 영 적 수준에 있는 존재를 말씀으로 “광야”의 존재까지 양육시켜 물고기 입에서 “한 세겔”을 얻었을 때 예수님과 함께 “천국”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영혼구원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구원받기위하여 그 “물고기”를 구원시켜야 내가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반 세겔”의 돈이 없으면 성전(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천국에 들어가는 조건을 “비유비사”로 깊이 감추어 놓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기독교인들 같이 예수를 믿기만 해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물고기”를 잡아 구원시키는 일이 무슨 말인지 잘 이해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 하라 예수께서 이를 행하라 그러면 네가 살리라 하시니라” 이 두 가지 명령이 성경 전체이며 내가 살기위해서는 반드시 이웃을 내 몸같이 살려야하는 막중한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이해하시기 위해 예수님의 십자가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이웃을 살리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의 말씀의 양식을 내안에 저축해야 그 말씀으로 죽은 영혼을 살리는 것입니다. 말라기 3:10 “너희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몸)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라”고 명하십니다. 왜냐하면 말씀의 양식이 내 몸(창고)에 있어야 그 말씀으로 이웃의 죽은 영혼들의 죄를 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아가페)을 소유한자는 반드시 이웃을 구원해야 내가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딤전4:16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 하여 너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내게 하라,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삼가 이 일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 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 하리라, 이 말씀 같이 내가 구원받기위하여 이웃을 내 몸같이 희생의 “피”(말씀)를 흘려야 십자가의 원리이며 새 계명입니다. 성경전체의 핵심은 네가 구원 받아서 네 이웃을 구원 시키라는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21:15-17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양을 먹이라 하시고, 또 두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세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
해설: 예수님의 제자들이 아침식사를 한 후에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물으시니 베드로는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알고 계시다고 대답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실 때의 “사랑”이란 단어와 베드로가 주를 사랑한다고 대답한 “사랑”이란 단어가 한글성경에는 동일하게 “사랑”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원문성경에는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묻는 “사랑”은 “아가페”(하나님의 사랑)로 기록이 되어 있고 베드로가 주를 “사랑”한다는 단어는 “필로”(인간의 사랑)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아가페”로 “사랑”하느냐고 묻고 계신데 베드로 안에는 “아가페”가 없고 “필로”밖에 없기 때문에 주님을 “필로”로 “사랑”한다고 대답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주를 “필로”로 “사랑”한다는 대답을 듣고 베드로에게 내 어린양을 먹이라 하시고, 두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주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
이렇게 예수님은 세 번이나 계속해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아가페”로 “사랑”하느냐고 묻고 계신데 베드로는 자신에게 “아가페”의 “사랑”이 없기 때문에 베드로는 계속 “필로”로 “사랑”한다고 대답을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그러면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그리고 다시 내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계속해서 내 양을 먹이고 치라고 말씀하신 것은 베드로가 예수님과 같이 양을 먹이고 치면서 양들을 키울 때 “필로”의 “사랑”이 “아가페”의 “사랑”으로 변화(거듭남)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아가페”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예수님과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난 하나님의 아들들 안에만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13장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전 13:1-3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 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상기의 말씀은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 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며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하나님의 모든 비밀과 세상의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들어서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다 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고 또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이웃을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 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네게 아무 유익이 없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고린도전서 13장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사랑”이 바로 “아가페” 즉 하나님의 “사랑”인 생명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랑”인 “아가페”가 베드로는 물론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도 없는 것입니다. 때문에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네 안에 있는 “필로의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인 “아가페”로 변화되려면 내 양을 먹이고 치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예수님의 양을 먹이고 칠 때 하나님의 아들로 거듭나서 하나님의 “사랑”인 “아가페”를 소유하게 된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오늘날 신앙인들이 명심해야 하는 것은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려면 반드시 예수님의 양을 먹이고 칠 때 하나님의 아들로 거듭나서 하나님의 “사랑”인 “아가페”를 소유하게 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이 구원의 받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려면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하여 죽어가는 이웃의 영혼을 구원했을 때 내가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입니다.
요한복음 21:18-2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 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 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여 주를 파는 자가 누구 오니이까 묻던 자라,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삽나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 찌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해설: 예수님은 이어서 베드로에게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고”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라 말씀하시는데 이것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젊어서는 네 스스로 진리의 말씀을 가지고 네가 원하는 곳으로 “띠 띠고” 다녔지만 늙어서 즉 장성해서는 하나님께서 너를 말씀으로 무장시켜 하나님이 원하시는 곳으로 데려 갈 것이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베드로의 어떤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아시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 예언대로 서기 60년경 네로가 기독교인들을 박해 할 때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돌아가셨다고 전해오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서 죽게 된 것은 자신은 예수님과 동일하게 죽을 수 없으니 나는 거꾸로 매달아 달라는 베드로의 요구에 의해 집행되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이 말씀을 하시고 이르시되 너는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시니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게 되었는데 그는 만찬 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여 주를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가 계속 나오는데 성경에 이름이 구체적으로 기록이 되어 있지 않아 그가 누구 인지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에 예수님에게 사랑받던 제자는 “요한”이라는 것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삽나이까 하고 물으니, 예수님은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 찌라도 네가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고 말씀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올 때 까지 내가 사랑하는 제자를 죽지 않고 머물게 하시겠다는 것은 “요한”에게 “요한계시록”을 기록하게 하기 위함이라 사료됩니다.
요한복음 21:23-25 이 말씀이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제자는 죽지 아니하겠다 하였으나, 예수의 말씀은 그가 죽지 않겠다 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 찌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하신 것이라, 이 일을 증거하고 이 일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거가 참 인줄 아노라, 예수의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
해설: 베드로는 이 말씀을 듣고 형제들에게 가서 그 제자는 죽지 않겠다고 말하였으나 예수의 말씀은 그가 죽지 않겠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할지라도 너는 상관하지 말라는 뜻으로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요한”을 잠시 머물게 한다는 것은 “요한”이 죽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요한”을 통해서 “요한계시록”을 기록할 때까지 “요한”은 살아 있어야 한다는 뜻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동안 제자들에게 행하신 일과 말씀들을 증거하고 기록한 제자가 바로 이 사람이라는 것은 바로 “요한복음”과 “요한계시록”을 기록한 “요한”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곧 예수님의 제자들을 말하고 있는데 제자들은 “요한”의 증거가 모두 진실이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행하신 일들과 말씀들은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예수님이 행하신 일들을 낱낱이 기록한다면 이 세상에 책을 두고 보관하기에도 부족할 정도로 많다는 말씀으로 “요한복음”을 모두 마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이 살아계신 동안 “요한”이 예수님을 따르면서 예수님이 행하신 일과 말씀을 듣고 본 것들을 모두 기록한 것이 아니라, 일부를 요약해서 기록하였다는 뜻입니다. 끝으로 이 해설서를 통해서 많은 기독교인들이 깨어나 구원을 받고 영생에 이르기를 간절히 기원하는 바입니다. - 끝 -
(원문 출처:새사람 블로그) 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