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사람의 신앙 고백

복음서를 통해서 본 예수님의 행적

제라늄A 2024. 7. 1. 09:42

신약성서의 4대 공관복음서 내용을 대부분 포함하고 있는 것은 물론이고, 여기에 빠져 있는 예수님의 12세부터 30세까지의 성장과정과 구도과정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어, 예수님께서 전한 가르침의 진수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 복음서를 통해 잃어버린 예수님의 행적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1) 인도 오릿사주의 왕족인 라반나는 이스라엘의 제례에 참석하러 왔다가 예수의 총명함을 보고 예수에게 인도의 수학을 주선해 주게 됩니다.

2) 라반나의 권유로 예수는 이스라엘을 떠나 인도 쟈간나스의 한 절에 들어가 4년간 수행을 하며 베다 경전과 마니 법전을 공부합니다.

3) 이 수행을 마친 예수는 의술을 배우기 위해 당시 인도에서 명성이 가장 높은 '우도카라'라는 의사의 제자로 입문합니다.

4) 예수는 의술을 배우며 유대의 [시편]과 [아베스타] 경전을 읽고 석가모니의 가르침도 익히게 됩니다.

5) 당시 예수는 평등사상에 심취했는데 결국 인도에서는 <카스트>라는 그들의 신분제도를 혼란시킨다 하여 예수를 논죄하기에 이릅니다.

6) 생명의 위협을 느낀 예수는 라마나스의 도움으로 인도에서 네팔로 피신하게 되고 그곳에서는 비자빠찌 라고 하는 성자와 대화를 나누기도 합니다.

7) 네팔을 떠난 예수는 티벳으로 가서 당시 요동 최고의 성자인 멘구스테를 만나 티벳에 비장되어 있는 수많은 경전을 섭렵합니다.

8) 24세 때 수학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오던 중 예수는 페르시아에 들러 자신이 태어날 때 찾아온 마기 교 승려 홀, 룬, 메루의 3인의 동방박사와 재회합니다.

9) 집에 돌아온 예수는 오래지 않아 다시 아테네로 건너가 [아포로]라고 하는 성자와 대화를 나누며 희랍의 정신세계에 깊은 관심을 갖기도 합니다.

10) 25세가 된 예수는 이집트로 건너가 형제단이라는 성자들의 모임에 입회해 활동하며 최고의 칭호인 그리스도라고 하는 법명을 수여받게 됩니다.

11) 30세가 된 예수는 비로소 고향으로 다시 돌아와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기에 이릅니다. 이 충격적인 사실은 예수님의 인도·티벳의 구도 생활을 밝혀주는 결정적 증거의 하나입니다.

이 외에도 12세에서 30세까지의 예수의 행적에 대한 많은 사실들이 여러 문헌에 의해 역사적으로 고증되고 있습니다. 13세부터 29세까지 예수는 과연 어디에 있었으며 무엇을 했을까요? 그동안 서양의 수많은 연구가와 종교 학자들은 이른바 <알려지지 않은 예수의 생애>에 관한 탐구와 연구를 계속해 왔었고, 의문에 싸인 <예수의 17년>을 밝혀내려고 부단히 노력해 왔습니다. 그러던 중 러시아의 저술가 니콜라스 노토비치는 1887년 인도와 티벳 지방을 여행하다가 라닥지방의 수도인 레(Leh) 근처의 하이미츠(Himis) 사원에서 티벳어로 기록된 예수에 관한 기록을 발견하여, 1894년 불어판으로 <알려지지 않은 예수의 생애 - 성 이사(Issa)의 일대기>를 출판함으로써 세계를 깜짝 놀라게 만들었던 일이 있었습니다.

1894년이면 상당히 오래전으로 그때부터 이미 예수에 대한 재조명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후에도 수많은 학자, 탐험가들이 인도와 티벳을 방문, 예수의 생애를 기록한 불교사원의 고문서들을 목격, 번역해서 세상에 내놓았습니다. 사실, 지금까지 밝혀진 수많은 기록과 자료, 그리고 성경에서 예수가 불교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는 명확한 구절들이 너무나도 많이 발견되고 있으므로, 기독교에서 반박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충분한 설득력이 부족한 현실입니다.

한양대 불문학 교수 민희식 박사는 <법화경과 신약성서>라는 책에서 신약성서의 수많은 내용이 불교의 <법화경>에서 옮겨간 것임을 주장하고 있고, 또 1980년대에 프랑스의 학자 필립 드 슈아레는 <토마스에 의한 복음서>를 써서 유럽의 종교계에 커다란 파문을 던지기도 하였습니다. <토마스 복음서>는 1945년 이집트의 나그함마디에서 발견되었는데 상형문자와 희랍문자를 겸용한 고프트어로 쓰여진 것으로 슈아레의 연구에 의해 세상에 밝혀졌으며, 이런 <토마스(도마)복음서>는 예수의 말을 그대로 기록한 것으로 114편의 항목으로 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 한 구절을 인용해 보면, 하나님은 너희들 속에 있고 동시에 밖에 있다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불교에서의 불성내재론(佛性內在論)의 표현이고, 또 그 다음에 계속된 문장은 <법화경 방편품>의 <여아등무이 如我等無異>의 표현과 똑같습니다.

슈아레의 논고에 따르면 불교에 영향 받은 예수의 사상(기독교)이 유태교가 부르짖는 메시아, 즉 구세주로서의 권위를 부여한 점과 또 기독교가 전파될 때 당시의 지중해 세계에 있어서 권위가 있었던 희랍철학에 맞추려 한 점 때문에 다소 변화가 생겼다는 것입니다. 어쨌든 토마스(도마) 복음서의 예수의 사상이 불교 사상, 그 중에서도 불성내재를 역설한 법화경과 유사한 것은 입증되었고, 신약성서 속의 <탕자의 비유>도 법화경의 <장자 궁자 長者窮子>의 비유에서 나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틀림없는 증거가 있지만... 과연 정말 예수는 과연 인도와 티벳에 가서 불교 사상을 배웠을까요...? 이런 의문에 대해, 티벳의 히미스 사원에 보관된 <이사(Issa)전>을 니콜라스 노토비치가 <최고의 인자, 성인 이사(Issa)전>으로 출판한 기록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이사(Issa)전>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첫째 부분은 1장에서 4장 중반부까지로 여기에선 이사의 강생과 출생 그리고 아주 어린 시절 등을 묘사하고 있으며, 둘째 부분은 4장 나머지 부분에서 8장까지로 <잃어버린 생애>로 알려진 13세부터 29세까지 그는 인도와 히말라야에서 공부를 했다고 적혀있습니다. 마지막 부분은 9장에서 14장까지로 이 부분은 팔레스타인에서 그가 전도활동을 하는 동안 일어났던 사건들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사(Issa)가 팔레스타인에 돌아온 후의 이야기는 복음서의 내용과 일치하지만 상당한 차이가 있는데, <이사(Issa)전>에는 세례요한이 나오질 않고 부활에 대한 언급도 없으며, 엄청난 반전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즉 빌라도가 이사를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음모를 꾸미고 마침내 사형을 선고한 반면 유대인 사제들과 장로들은 그에게 죄가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오히려 이것이 현존하는 복음서의 기록보다 더 사실일 수도 있는 것은, 기독교인들이 로마인들을 전도하기 위해 예수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유대인들에게 전가시켰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복음서에는 빌라도가 예수에게 무죄를 선고했지만 유대인들이 데모하여 할 수 없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이것이 유대인 박해의 근거가 되고 있습니다. 빌라도가 이사(Issa)와 두 강도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명령하여 이사는 죽었다. 빌라도가 대중들을 의식하여 이사의 시신을 그의 친척에게 건네주자 그들이 사형장 근처에 이사를 묻었다.

3일 후 빌라도는 이사가 부활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휩싸여 이사의 시신을 다른 곳으로 옮겨 묻으라고 명령했다. 사람들은 무덤이 열린 것을 보고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보내 성자의 시신을 가져갔다고 말했습니다. 이야기는 이사를 따르는 자들에 대한 박해와 이사의 제자들이 전도를 떠나는 장면, 그리고 그들이 이교도의 왕과 전사들과 대화하는 내용으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십자가 처형이 있은지 3, 4년 후 그 사건을 목격했던 상인들이 인도에 전한 목격담을 기초로 해서 쓰여 졌다고 추정되었으며, 이 책이 출판되자 미국, 영국, 독일, 스페인, 스웨덴, 이탈리아 등에서 대단한 관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리고 노토비치가 목격했다고 주장하는 <이사전>의 존재 여부에 대한 공방이 벌어졌는데, 어떤 사람들은 <이사전>이 조작되었다고 주장한 반면, 노토비치의 지지자들도 많았습니다.

그 중에서도 예수회 전도사인 이뽈리뜨 데시데리(Hippolyte Desideri)는 티벳을 방문하여 기독교와 티벳종교의 유사점을 탐구했는데, 티벳 종교가 삼위일체의 신의 개념을 가졌으며 기도나 주문을 외울 때 염주를 사용하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예수회의 그루에베와 캐푸친 포교단장인 호레이스 데라 페나(Horace Dela Penna)는 터어키의 종교와 그들 자신의 종교 사이에 존재하는 유사점을 지적하였으며 그들의 추측은 다음과 같은 것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1) 라마승의 옷, 그것은 고대 그림에 나타나 있는 열 두 제자의 옷과 비슷하며 예수가 두르고 다녔던 홍포도 이와 유사합니다.

2) 그들의 종속관계, 그것은 교회의 계급제도와 어느 정도 유사합니다.

3) 그들의 의식과 로마 카톨릭의 의식 사이에는 유사성이 있다.

4) 그들의 강생 개념

5) 그들의 도덕성에 대한 격언들도 카톨릭교와 비슷하다. 호레이스 데 라 페나는 또, 그들은 유일신과 삼위일체, 그리고 이상향과 지옥과 연옥을 믿습니다. 응도(목사)와 헌금, 그리고 죽은 자를 위한 기도를 합니다. 그들은 수도승과 수사들로 가득 찬 많은 수도원을 갖고 있는데, 그들은 청빈, 복종, 정숙의 세 가지 이외에도 몇 가지 다른 명세들을 지키고 있다. 그들에게는 고해신부들이 있는데, 그 신부들은 그들의 절대자에 의해 선택되며 라마승이나 사제로부터 그들의 신분증을 받는데 그것 없이는 고백을 들을 수 없으며 고해성사를 강요할 수 없다. 또한 그들은 성수와 십자가들, 그리고 염주를 사용하고 있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헉(Huc)씨는 1844년부터 3년 동안 티벳을 여행한 뒤, 라마교와 천주교 교리 사이의 유사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습니다. 십자가, 주교관, 부제 복, 법의(라마승들이 여행할 때 걸치는 옷) 이중창단과 함께 드리는 예배, 찬송가, 악령추방, 다섯 줄의 사슬에 매달린 향로, 감사기도, 작은 염주, 성직자의 독신 생활, 정신적인 은거, 성자들에 대한 숭배, 단식, 성체 행렬과 탄원기도, 성수, 그들의 대라마는 로마 천주교도 사이의 교황과 같은 존재로 여기는 점... 이 모든 것들이 티벳 불교와 천주교 의식 사의의 유사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렇듯 수많은 연구가들이... 오랜 세월 동안... 숱한 근거들을... 제시하고 있는데 반해, 정작 기독교계에서의 반론은 이들의 주장을 뒤 집어 엎을 정도로 그렇게 충분치도 않을 뿐만 아니라, 원론적인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 청년시절에 불교 수행하던 승려였습니다. 예수는 부처의 제자(불교도)입니다.

(원문 출처:새사람 블로그) 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