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41:17~31 바로가 요셉에게 이르되 내가 꿈에 나일 강 가에 서서보니 살찌고 아름다운 일곱 암소가 나일 강 가에 올라와 갈밭에서 뜯어먹고, 그 뒤에 또 약하고 심히 흉하고 파리한 일곱 암소가 올라오니 그같이 흉한 것들은 애굽 땅에서 내가 아직 보지 못한 것이라, 그 파리하고 흉한 소가 처음의 일곱 살진 소를 먹었으나 먹은 것 같지 아니하고 여전히 흉 하더라 내가 곧 깨었다가 다시 꿈에 보니 한 줄기에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이 나오고, 그 후에 또 가늘고 동풍에 마른 일곱 이삭이 나더니 그 이삭이 좋은 일곱 이삭을 삼키더라, 내가 그 꿈을 점술가에게 말하였으나 그것을 내게 풀이해 주는 자가 없느니라, 요셉이 바로에게 아뢰되 바로의 꿈은 하나라 하나님이 그가 하실 일을 바로에게 보이심 이니이다. 일곱 좋은 암소는 일곱 해요 일곱 좋은 이삭도 일곱 해니 그 꿈은 하나이라, 그 후에 올라온 파리하고 흉한 일곱 소는 칠 년이요, 동풍에 말라 속이 빈 일곱 이삭도 일곱 해 흉년이니, 내가 바로에게 이르기를 하나님이 그가 하실 일을 바로에게 보이신다 함이 이것이라, 온 애굽 땅에 일곱 해 큰 풍년이 있겠고, 후에 일곱 해 흉년이 들므로 애굽 땅에 있던 풍년을 다 잊어버리게 되고, 이 땅이 그 기근으로 망하리니 후에 든 그 흉년이 너무 심하므로 이전 풍년을 이 땅에서 기억하지 못하게 되리이다.
상기의 말씀은 오늘날 기독교에서는 절대로 해석할 수 없는 말씀으로 “영안”이 열리지 않으면 무슨 말씀인지 이해를 못 하는 것입니다. 상기의 본문말씀에 바로왕의 꿈을 요셉이 해몽한 대로 “일곱 해는 풍년 들고, 일곱 해는 흉년”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우선 “풍년 든 일곱 해”는 무엇을 뜻하며 “흉년 든 일곱 해”는 무엇을 뜻하는가? 먼저 “풍년 든 일곱 해”는 꿈속에서 보여 준 대로 “살찌고 아름다운 일곱 암소”라고 했으며, 또한 “줄기가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이라고 했습니다. 신, 구약성경은 모두 “비유”로 기록했지만 그것은 모두 오늘날 기독교인들에 대한 예언서로 적용되므로 성경기록이 오늘날 기독교인들의 처한 현실을 증거 하는데 그 해석이 있는 것입니다. 이는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믿는 믿음은 곧 처음엔 예수를 믿기만 하면 모두 구원받았다고 좋아하며 “할렐루야 아멘”하면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좋아하는 것이 그것이 “살찌고 아름다운 일곱 암소와 같고, 줄기가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과 같다”고 “비유”하는 것입니다. “소와 이삭”은 하나님을 “비유”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일곱 암소와 일곱 이삭”이라는 뜻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세기의 “6일 천지창조”를 완성하고 “7일”에 하나님이 “안식”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을 “비유”한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비유”로 “살찌고 아름다운 일곱 암소와 같고, 줄기가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과 같다”고 “비유”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실존예수님”의 진리의 말씀을 실상이 나타나니 그 풍족한 것들이 모두 거짓이라는 것이 백일하에 드러나니 기독교인들이 “흉한 일곱 소와 속이 빈 일곱 이삭(쭉정이)이 흉년”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살찐 일곱 암소같이 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이 될 수 있었을까?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의 말씀은 모두 “비유”로 말씀하셨기 때문에 구약 한 줄 풀어주신 일도 없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인 신, 구약이 모두 오늘날 기독교인들에 대한 “비유”임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인들은 그동안 성경의 “비유”문자를 풀어보려는 노력이나 고민 같은 것은 해 본적도 없이 무조건 예수 믿고 이미 구원받았노라고 문자 성경을 그대로 믿고 “할렐루야 아멘”하면서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 단순한 믿음이 온 세상 인류역사를 주도하는 총아로서 그것이 “일곱 때”(일곱 해) 동안 기독교가 어찌 “살찐 일곱 암소가 아니겠으며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 줄기”가 아니겠는가? “일곱 때”란? 어둠의 존재들이 하늘의 존재로 거듭나는 창세기 “6일 천지창조”기간을 말하며 “일곱 때”가 되면 하나님이 “안식”하시는 성전이 완성되는 기한을 말합니다. 이같은 “일곱 때”(일곱 해)는 기독교는 성경의 말씀을 그 누구에게도 간섭이나 제약받지 않고 저희 마음대로 자의적 해석으로 믿을 수 있으니 그야말로 전무후무한 “일곱 해의 풍년”인 것입니다. 그런데 “일곱 해의 풍년”이 “일곱 해의 흉년”으로 돌변하는데, “일곱 해의 흉년”은 “일곱 해의 풍년”을 싹 잡아 삼킨다고 했습니다. 즉 흉악하고 “파리한 일곱 암소”가 “살찐 일곱 암소”를 잡아 삼키고 줄기와 이삭이 또한 그러했습니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일곱 때의 풍년”이 왜 “일곱 때의 흉년”으로 이어지는가?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장성한 자로 성장하여 “일곱 때”가 되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되어 진리의 새 말씀을 소유한 자가 된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실존예수님”이 창세부터 감 추인 것을 모두 드러내는 진리의 “새 말씀”을 가지고 오시면 지금까지 기독교인들이 인간이 만든 “신학”으로 저희 마음대로 해석해서 배불리 먹어왔던 양식들이 완전히 상품가치를 잃고 만다는 뜻에서, 아무도 그 상품을 사는 자가 없어 그들의 종교생명은 종말을 맞는다는 뜻에서 “일곱 해의 흉년”이 든다고 한 것이며 “흉악하고 파리한 일곱 암소”가 “살찐 일곱 암소”를 사그리 잡아 삼킨다고 한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그들의 북적대던 “일곱 해의 풍년”이 기독교의 호황을 누리던 시절인데 진짜 오늘날 “실존예수님”이 오심으로 해서 그들의 살찐 “일곱 암소”를 모두 잡아 삼키므로 폐허를 만들 것이므로 그들의 입장에서는 오늘날 “실존예수님”이 너무 밉고 저주스러운 재앙이기 때문에 “파리하고 흉악한 일곱 암소”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부터 여기서 기독교인들은 살길을 찾아야 하는 “비밀”의 열쇠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기독교인들에게 “온전한 십일조”를 바치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온전한 십일조”를 하나님의 “창고”에 채우도록 명하셨습니다. 우선 “온전한 십일조”란 문자적 외적으로는 물질의 십일조요, 소득의 십일조였습니다. 하지만 그 문자 속에 감 추인 “영적”인 내용으로는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듭난 “인간십일조”를 뜻합니다. 즉 하나님은 인간구원의 마지막 때는 물질을 요구하심이 아니고, “하나님 형상”의 인간을 요구하십니다. “인간 십일조”가 “온전한 십일조”의 본질입니다. 말라기 3:10 “너희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라, 이 말씀의 “창고”(성전)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장성한 자의 성전이 된 자의 몸을 “창고”로 “비유”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전 된 창고(몸)에 양식(말씀)이 있게 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장성한 자 몸 안에는 하나님의 말씀의 지식이 있어야 그 “양식”으로 이웃의 생명이 없는 “죽은 자”들인 오늘날 기독교인들에게 복음을 전해서 내 몸같이 구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나려면 반드시 이웃의 죽어가는 영혼을 구원해야 내가 구원의 완성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첫째”는 내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먼저 장성한 자로 성장하는 것이고 “둘째”는 이웃을 내 몸같이 구원하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인 것입니다. 마태복음 22:37~40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아가페)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딤전 4:15~16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너의 성숙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살펴 이 일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
(원문 출처:새사람 블로그) 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