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듭남(죽음,부활)

“부활”하신 예수님은“다른 예수”님이다.

제라늄A 2020. 7. 9. 21:13

아래의 문장은 예수님께서 장사 지낸 지 “3일”만에 무덤에서 부활하시어 무덤에서 나오시는 예수님과 “마리아”와의 대화의 장면입니다.  요 20:15 예수께서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 기인 줄로 알고 가로되 주여 당신이 옮겨 갔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말하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 가리이다.  본문장의 말씀은 부활한 예수께서 “마리아”에게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고 물으니깐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사람이 예수를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한다고 말합니다.“마리아”가 이 말을 하고 뒤를 돌아보니 “예수”의 서신 것을 보았으나 “마리아”는 “예수”를 보면서도 그가 “예수”인지 알지 못했다고 합니다. “왜” 마리아가 부활한 예수의 얼굴을 몰라보았을까요?  이 말씀을 오늘날까지 기독교 목회자들이나 교인들이 2000년이 지난 지금까지 한 명도 깨달은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상기의 말씀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장사 지낸지 “3일”만에 부활하시어 무덤에서 나오실 때 “예수님”의 무덤을 지키던 “마리아”가 부활한 “예수님”의 얼굴을 처음 보고 그 모습이  십자가에서 죽기 전에 “예수님”의 얼굴의 모습이 아니라 전혀 다른 “예수님”의 모습으로 부활한 “예수”를 보고 동산지기로 알고 혹시 당신이 “예수”의 시체를 옮겨 갔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말하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예수”가 죽고 “예수”가 “3일”만에 부활하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왜 다른 예수”의 몸을 입고 부활하셨는지를 아는 사람은 기독교인들은 한 사람도 없다는 것입니다. 또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 갈릴리 바닷가에 제자들 앞에도 나타나셨는데  제자들도 “예수”를 알아본 제자들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요 21:4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인 줄 알지 못하는지라,  이같이 “예수”께서 “다른 예수”의 몸으로 부활했기 때문에 제자들이 아무도 “예수”를 못 알아본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다른 예수”를 몰라본 것은 “마리아”뿐 만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들도 몰랐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른 예수”로 부활한 그 “예수”는 누구인가?  아래에 이 말씀을 잘 이해를 하셔야 합니다.  고전 15:20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이 말씀은 예수께서 “죽은 자”가운데서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죽은 자”는 누구인가?

마 8:21-22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소서 예수께서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지금 살아 있는 사람들을 “죽은 자”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이들 안에 “사람의 혼의 생명”은 존재하나 “하나님의 영의 생명”이 없기 때문에  이런 사람을 “죽은 자”가 “죽은 자”를 장사지내게 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이 말하는 “죽은 자”는  하나님의 “생명”이 없는 “혼”의 존재들을  성경에서는 모두 “죽은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하는 “죽은 자”의 부활도 죽은 육신의 몸이 다시 부활하는 것이 아니라 육체는 살아있으나  하나님의 “생명”이 없는 “혼의 존재”에서  하나님의 “영의 존재”로 거듭나는 것을 “죽은 자”가 부활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요 5:25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예수)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이같이 하나님의 생명이 없는 “죽은 자들”이 “예수”의 음성을 들으면 살아난다는 말입니다.

“살아난다, 란 뜻은 “예수”의 음성 즉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영접하면 “죽은 자”가 살아나서 “예수”와 똑같은 “하나님의 아들”로 부활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마리아나 제자들”이  부활한 다른 사람 “예수”를 몰라본 것입니다.  마 27:51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들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예수의 부활 후에 저희가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이 말씀에 성도들의 몸이 많이 일어났다는 것은  하나님의 생명이 없었던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듭나 다른 “예수들”로 부활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죽은 자"라는 말은 원문에 복수로 되어있기 때문에 “죽은 자”들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께서 혼자 부활하셨다는 말이 아니라 “예수”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다른 예수들”이 함께 부활하여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들에게 보였다는 것입니다.

요 12:24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비유”로 말씀하십니다. 이같이 한 알의 밀에서 똑같은 많은 “열매들”을 탄생시키신 것입니다.  히 2:11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 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이와 같이 한 알의 밀에서 똑 같은 많은 열매들(아들)을 탄생시키신 것입니다.  롬 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님이 이제는 맏아들이 되시고, 그 많은 형제(열매)들은 예수님과 동등한 자격으로 차남의 자격으로 인정해 주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는 한 알의 “밀”을 심으면 많은 “밀”을 거두시듯  똑같은 많은 “예수들”을 만드신 것입니다. 맏아들 예수와 차남들인 “예수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에도 이 차남(예수)은 인성과 신성을 지닌 사람으로서  구원자 “예수”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입니다.“예수”라는 이름 두 글자는 “예수”의 이름이 아니라 “구원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기준은 “예수”입니다. 오늘날의 기독교인들도 이 차남 “실존 예수”를 만나서 신앙생활을 한다면 시간낭비하지 않고 순탄하게 “천국”에 갈수 있는데  오늘날 기독교 안에는 이 차남 “실존 예수”를 영안이 없으면 만날 수가 없기 때문에 누가 “실존 예수”인지를 분별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들이 모두 “비유 비사”로 깊이 기록된 말씀이라 일일이 설명하기도 어렵고 이해하기는 더욱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마리아”나 제자들이 “다른 예수”의 몸으로 부활한 그 사람을 “예수”로 알아 본 것은 “그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듣고 아! 이 사람이 바로 십자가전 “예수님”의 말씀과 똑같은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눅 8:11 이 비유는 이러하니라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하나님의 실체가 곧 “말씀”이기 때문에 “말씀”의 “씨”가 같으면 한마디 말씀만 들어도 금방 그 사람이 “예수”라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인 이유는 바로 “말씀의 씨”가 다르기 때문에 이단으로 몰아 “예수”를 죽인 것입니다. 이렇게 “마리아”나 제자들이 “예수”가 부활하신 몸이 다르기 때문에 부활한 “예수”를 처음 보고 알아보지 못했지만 “그 사람”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듣고 십자가전의 “예수님”의 말씀과 똑같은 것을 알고 “예수”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게 된 것입니다. 그 “예수”가 그 “씨”로 또 다른 “예수”를 낳고, 낳고 하면서 오늘날까지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씨”를 통해 낳고 낳은 오늘날의 “실존 예수”의 말씀을 영접해야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원문 출처:새사람 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