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10:34-35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나를 낳아 주신 아버지나 어머니를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죄가 되는가? 이런 하나님을 우리는 상상할 수 있는가! 자녀들이 예수를 믿기 전에는 집안에 화평이 있었는데 예수를 믿고 교회에 다니면서부터 부모님과 자녀들이 싸우고, 며느리가 교회에 다니는 것을 시어머니가 말리기 때문에 싸움이 일어나는 것이라고 말하는 기독교인들의 말이 본문 말씀의 해답이 될 수 있는 것인가?
세상은 오늘날도 자기의 이익을 구하여 치고 싸우는 전쟁터에 불과합니다. 둘 이상의 개인이나 집단이 서로 상충되는 이익을 놓고 갈등하고 투쟁하는 동안 화평은 없습니다. 오직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있을 뿐입니다. 유감스럽게도 예수는 이 세상에 화평을 이루기 위해 온 것이 아니요 화평보다는 오히려 “불과 칼”을 주어서 분쟁하게 하기 위해서 왔다는 예수의 선언은 무엇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화평의 주로 받들어 모시는 기독교인들이 생각하는 그 화평이 얼마나 위선적이며 얼마나 모순에 가득 차 있는가를 고발합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화평은 싸우지 않고 서로 미워하지 않으며 상부상조, 평등의 삶을 가꾸어 나가는 것을 말합니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나와 너라는 구분 속에서 살아가는 한 화평은 없습니다. 한 집안에 둘 이상이 살면 도저히 화평이 올 수 없다는 것이 인간에 대한 예수님의 인식입니다. 참다운 화평은 인간이 홀로 설 때 가능합니다. 이 말은 “홀로”선다는 말은 “선과 악”이라든지 의와 불의라든지, 모든 대립되는 요소가 자신의 마음속에서 사라졌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하늘 위에 계시고 나는 이 땅에 존재하는, 이런 이분법적 구분이 사라져 나와 하나님이 하나가 되고 빛과 어두움이 하나가 되는 단계를 일컫는 말이 “홀로”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과 내가 하나 되지 않는 한 화평이란 없습니다. "빛과 어두움"이 서로 나뉘어 있는 한 갈등과 전쟁은 계속됩니다. 본문장의 말씀은 외형적으로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문제는 아직도 쳐서 무찔러야 할 적이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속에 있으며, 아직도 하나님과 내가 하나 되지 못했다는 데 있습니다. 당신은 신앙생활을 하면서 성경을 어떻게 읽는가? 내가 보는 위치와 각도에 따라 성경은 구원의 복음이기도 하고 종교가들의 사술이 되기도 합니다.
하나님과 예수를 믿고 있으면서도 그 하나님이 우상이 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기독교인들에게 아직 생소한 도마복음에 하늘에 대하여 도마복음 11절, 예수께서는 이 하늘은 사라질 것이다. 그대가 빛에 있을 때에 그대는 무엇을 할 것인가, 그대가 하나였던 시절에 그대는 둘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그대가 둘이 된 지금은 무엇을 할 것인가? 참으로 심오한 말씀입니다. 지나온 일들을 돌이켜 보면 하나님에 대한 신앙 하나로 살아온 날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수많은 밤을 회개의 눈물로 지새웠을 것이고, 죽은 자가 다시 살 것과 영원한 심판에 대한 두려움과 설렘으로 보낸 불멸의 세월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떠나갑니다. 아직 이런 것들을 떠나보내지 못했다면 아직 이런 것들이 하늘인 세상에서 살고 있는 셈입니다. 하늘이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바라보고 소망하며 그 뜻을 받들어 모시는 모든 것, 그것이 우리의 하늘입니다. 어렸을 때에는 "율법"이 우리의 하늘이고, 좀 자랐는가 싶으면 "믿음"이 우리의 하늘입니다. "소망" 우리의 하늘이 됩니다. 그러나 영원한 하늘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늘은 우리의 성장함에 따라 그 모습을 달리 합니다. 하늘이 사라진다는 말은 우리가 그 하늘에 가 닿았다는 말이고, 따라서 더 이상 그 하늘을 하늘로서 바라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우리 삶의 처소가 어디냐에 따라서 하늘과 땅은 달라집니다. "하늘"도 내 마음속에 있고 "땅"도 내 마음속에 있습니다.
“불과 칼”의 전쟁은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 안에 있습니다. 빛(선)과 어둠(악)의 영적싸움입니다. "빛"에게 잡히면 예수의 제자가 되고, "어둠"에게 잡히면 마귀의 자식이 되는 것입니다. 이 싸움을 싸우라고 예수께서 우리 안에 “불과 칼”을 던져 분쟁을 일으켰으니 그 싸움을 싸우는 것입니다. 예수는 무엇 때문에 새삼스럽게 세상에 “불과 칼”과 분쟁을 주기 위해서 왔다고 말하는가? 이미 세상은 전쟁의 아수라장이 아니던가? 옳다, 예수가 보기에 이 세상은 “빛과 어둠 선과 악”이 대립하는 전쟁터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인간들이 그 사실을 외면한다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의 말씀”을 자신에게 맞추어 듣지 아니하면 해는 떴다가 지며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이키는 바람(전1:5-6)일뿐입니다. 예수께서 눅 12:49~50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며 내가 무엇을 원하리오,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예수께서 하나님과 하나가 되기 위하여 세례(죽음)를 받으셨습니다. 나도 하나님과 하나가 되기 위하여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예수께서 불을 던지는 땅은 나의 "마음"입니다. 즉 나의 생각 나의 길이 땅입니다. 나의 "땅"은 죽고(세례) "하늘"이 되는 것이 홀로 서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숫자의 뜻은 참으로 오묘합니다. 1, 2, 3의 숫자는 바로 이러한 깊은 뜻이 있습니다. 1은 하나님과 하나 되는 것을 의미하고, 2는 하나님과의 분리를 의미하고. 3은 셋과 둘이 싸워서 하나님과 하나가 되느냐 둘이 되느냐 하는 것이 승패의 관건입니다. 성경에서“삼분의 일과 삼분의 이”라는 숫자가 자주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 숫자가 실제의 수가 아니라 상징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는 점입니다. 성경에서 이런 것을 분별할 수 있을 때 그 눈은 "열린 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빛)가 될 것을 원하십니다.“불과 칼”의 전쟁에서 승리했을 때에 1은 비로소 "온전한 십일조"로 하나님께 드려집니다. 참 십일조의 의미는 여기에 있습니다.
“마귀”는 이미 죽은 자를 상대하여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살아 있는 자, 즉 하나님과 하나 된 자를 갖가지 방법으로 우는 사자와 같이 덤벼들어 멸망시키는 자입니다. 그래서 사탄은 “삼분의 일”을 타락시켜 죽이기 위하여 갖가지 방법으로 결사적인 결전을 벌입니다.“삼분의 일”에 관련된 성경은 계 8:10-12 횃불 같이 타는 큰 별이 하늘에서 떨어져 강들의 삼분의 일과 여러 물 샘에 떨어지니 이 별의 이름은 쑥이라, 물들의 삼분의 일이 쑥이 되매 그 물들이 쓰게 됨을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더라, 해 삼분의 일과 달 삼분의 일과 별들의 삼분의 일이 침을 받아 그 삼분의 일이 어두워지니 낮 삼분의 일은 비췸이 없고 밤도 그러하더라,
계 12:4-5 그 꼬리가 하늘 별 삼분의 일을 끌어다가 땅에 던지더라, 용이 해산하려는 여자 앞에서 그가 해산하면 그 아이를 삼키고자 하더니 여자가 아들을 낳으니 이는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라, 그 아이를 하나님 앞과 그 보좌 앞으로 올려가더라,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사탄은 “애급, 광야, 가나안”의 “3개 집단”중에서 “가나안”에 속한 "진리의 길"을 가는 산 자인 “삼분의 일”을 미혹하여 죽입니다. 그러므로 진리의 길을 가는 자는 반드시 “말씀의 전신갑주”가 꼭 필요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엡 6:12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라고 하십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영들에게 대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엡6:12-13) 이 싸움은 내 속에 있는 하늘과 땅의 싸움이요, 내 속에 있는 아버지와 아들과 싸움이요, 어미와 딸의 싸움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싸움에서 이기고 홀로 설 때에만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 유익이 나에게만 있습니다.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온 땅에서 삼분지 이는 멸절하고 삼분지 일은 거기 남으리니 내가 그 삼분지 일을 불 가운데 던져 은같이 연단하며 금같이 시험할 것이라,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르리니 내가 들을 것이며 나는 말하기를 이는 내 백성이라 할 것이요, 그들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슥13:8-9) 당신은 불 가운데 던져져 은같이 연단되며 금같이 시험받은 사람인가? 참으로 이 싸움에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인가? 곰곰이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원문 출처:새사람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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