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듭남(죽음,부활)

부활 때는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없다.

제라늄A 2021. 12. 30. 21:46

눅 20:34-36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세상의 자녀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되 저 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입은 자들은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없으며 저희는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 임이니라,  “부활”이 무엇이기에 “부활”을 받은 자들은 이 세상의 제도와는 달리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며 다시 죽을 수도 없이 천사와 동등하다고 했는가?  그리고 왜 결혼제도가 없는 “부활”의 때를 진리의 말씀이라고 하는가?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셨듯이 이 세상에서는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는데 남녀는 서로 환상을 갖고 결혼제도를 반기며 시작을 하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환상은 곧 사라지고 아이를 낳아 양육해야 하는 일과 서로에 대해 짐 지며 구속당해야 하는 여러 가지 이런 일 저런 일 근심 걱정 등으로 말미암아 한번이라도 한평생을 살면서 남녀 간에 이혼을 생각해 보지 않는 사람은 아마도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이 세상의 남녀 결혼이란, 환상으로 시작해서 고생 고생하며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파멸의 무덤으로 들어가는 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러한 세상의 결혼제도를 일격에 말소시키시고 새로운 결혼제도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죽을 수도 없이 천사와 동등”이라고 했다는 점입니다. 이는 천국에서는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없이, 그 대신에 죽을 수 없는 영생하는 천사와 동등하게 된다는 뜻이 됩니다. 즉 하나님과 인간이 한 몸이 되는 새로운 결혼제도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인간 육체는 그 수명을 다하면 죽는 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육체가 없으신 “영”으로 계십니다. 수명에 제한을 받는 인간 육체에 불멸의 “하나님”이 들어와서 한 몸이 되어주면 인간이 곧 “영생”하는 하나님과 동등한 생명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인간이 “하나님”과 같은 존재로 새로운 결혼제도로 인하여 인간이 하나님이요, 하나님이 인간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주기도문에서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달라” 고 하셨는데 하늘에서 이룬 것은 이미 하늘에서 “영생”하는 몸을 뜻하고, 그처럼 땅에서도 “영생”을 이루어 달라는 것은 하늘들을 땅으로 유치해서 인간 육체를 “영생”하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생명으로 “영생”하게 되는 천국의 인간 육체가 얼마나 아름답게 빛나는 모습일까를 상상해 보았는가?  욥기에서는 “부활”의 때를 일컬어 소년의 때를 회복한다고 했던 것입니다. 소년의 때는 이팔청춘으로 누구라도 동남동녀들로 회복되는 것입니다.

하늘의 별빛만큼이나 신비스럽고 찬란하고 싱싱하고 유연하게 갓 피어난 고등학생들의 연령대에서 영생하게 될 터인데, 지금 나이 많은 고령이라고 혹은 병약하다고 혹은 인물이 없고 몸매가 좋지 않다고 걱정할 필요가 있겠는가?  즉 인간이 십 대 청춘의 연령으로 회복되어 영생하는 “남녀”가 하나님과 같은 “신”들이 되는 것입니다. 하늘의 “신”은 “남자 여자”가 없습니다. 그냥 “신”일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인간이 천사와 동등하다고 하셨듯이 그 “신”이 “남녀” 인간 속에 들어와 한 몸이 되면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간다고 했기 때문에 결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결혼을 하지 않기 때문에 아무 멍에를 매지 않고 얼마든지 환상적이어도 충분히 좋은 얼마든지 낭만적이어도 충분히 좋은 멋진 자유 교제만 존재하지 않겠는가?  하나님이 지으신 삼라만상 자연을 아름답다 하는가?  

너무 아름답고 웅장하고 신비롭고 맑고 순수하고 포근해서 그 품에 아주 안기고 싶은 것입니다. 하지만 “신”적 존재들은 얼마나 뛰어나게 찬란하고 아름다울지 가히 상상할 수 없는 것입니다. 도대체 “부활”의 때란 무엇이기에 이렇게 파격적이란 말인가?  “부활”이 무엇인지 알아보기로 하겠습니다. “부활”이란 죽은 자가 무덤에서 살아 나오는 것이 “부활”인가? 물론 예수님은 죽으신지 삼일 만에 문자적 무덤에서 “부활”하셨습니다. 나사로도 죽었다가 나흘 만에 살아났습니다. 성경 기록은 그리고 그 당시의 사건들은 문자적 성경 기록 그대로 죽음도 생물학적 죽음이요, “부활”도 그 죽음에서 살아 나오는 육적 기록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성경의 육적 기록들은 모두 오늘날에 영적으로 이루어질 일에 대한 예언이 되기 때문에 “비유 비사”가 되며 상징이 되는 “부활”인 것입니다.

사실적으로 죽고 사실적으로 “부활”을 했으나 그것은 오늘날에 영적 “부활”로 이루어질 일을 육적으로 성경을 보여주고 육적으로 기록을 했을 뿐이기 때문에  오늘날 그 예언 성취에 직면해서는 영적 죽음과 영적 부활로 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영적 죽음이요, 영적 “부활”이기 때문에 오늘날 살아 있는 우리에게 어떠한 변화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고 영적인 변화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즉 영적 죽음과 영적 “부활”을 요구하는 기록인 것입니다. “부활”이란 반드시 죽음을 전제합니다. “혼”적인 존재가 죽어야 “영”적인 존재로 “부활”하는 것입니다. “부활”을 말하고자 한다면 먼저 죽음을 앞세우게 되는데  “혼”의 죽음은 과거 거짓된 기독교에서 목사들에게 받은 거짓된 “비 진리 신학”의 믿음에서 죽으라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오늘날의 진리의 새 말씀으로 “부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과거 잘못된 믿음으로 꽉 차 있으면 오늘의 “새 진리”가 도무지 들어갈 틈이 없는 이유에서 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새 진리”는 누가 가져오는가?   요 1:1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니라,   오늘날 말씀의 실체이신 하나님께서 육체(요1:14)를 입고 오신 오늘날 “실존 예수님”만이 가져오십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들은 거짓된 말씀으로 건축한 거짓된 자신의 성전을 모두 헐어버리고 진리의 말씀으로 다시 건축해야 하는 것입니다. 2000년 전 예수님께서도 유대인들에게 46년 된 오래된 예루살렘 성전을 가리키며 이 성전을 헐면 예수께서 “3일” 만에 다시 짓겠다고 하십니다.  요 2:19-20 예수께서는 유대 종교지도자들에게 46년 된 예루살렘 성전을 가리키며 이 성전을 헐라 내가 3일 만에 다시 진다. 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유대인들이 거짓된 말씀으로 지은 육체의 성전을 헐면 예수께서 “3일” 만에 다시 짓는다고 “비유”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3일”이라는 뜻은 “애급, 광야, 가나안”을 “3일” 길이라고 말씀하시고 예수님도 “3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오늘날의 기독교인들도 성경에 기록된 유대인의 예수를 믿어 자신 안에 잘못 지은 육체의 성전을 헐고  오늘날의 “산 자 실존 예수”의 말씀을 영접해서 다시 “3일” 길을 가야 “천국”에 입성하는 것입니다.  막 2:22 새 포도주(진리)를 낡은 가죽 부대(육체)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  이 말씀은 “비 진리 신학”의 말씀을 받은 기독교인들이 새 양식인 진리의 말씀을 기존의 신앙 위에 덧붙여 말씀을 먹는다면 옛 것도 버리고 새것도 버리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잘못 지은 옛 신앙을 철저하게 헐어버리고 “새 술(진리)은 새 부대에 담으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원문 출처:새사람 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