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시록 2:1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 찌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계시록 19:12 그 눈이 불꽃같고 그 머리에 많은 면류관이 있고 또 이름 쓴 것이 하나가 있으니 자기 밖에 아는 자가 없고, 이사야 49:1-3 섬들아 나를 들으라, 원방 백성들아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내가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나를 부르셨고 내가 어미 복중에서 나옴으로부터 내 이름을 말씀하셨으며 내 입을 날카로운 칼 같이 만드시고 나를 그 손 그늘에 숨기시며 나로 마광한 살을 만드사 그 전통에 감추시고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나의 종이요 내 영광을 나타낼 이스라엘이라 하셨느니라, 이사야 62:2 열방이 네 공의를,열 왕이 다 네 영광을 볼 것이요 너는 여호와의 입으로 정하실 새 이름으로 일컬음이 될 것이며, 말씀을 받은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자가 없다 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나님의 본체 “영”(말씀)을 입고 육체로 오실 그 분의 이름은 “새 이름”이라고 분명히 했습니다. 따라서 위의 “성경”기록에서 이름은 예수님이 아닙니다. 오늘날 “실존 예수님”의 “새 이름”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분의 이름은 실존 예수로서 온 세상에 알려져 있지만, 오늘날 다시 오시는 그 분의 이름은 아직 아무도 알 수 없는 “새 이름”으로 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실존 예수”의 이름은 왜 알 수 없는 새 이름 이라고 기록하고 있는가? 다시 말해 그분은 왜 자신의 신분을 애써 감추는 연막을 치고 오셔야만 하는 가입니다. 연막을 치고 오시는 이유에 대해서 아래와 같이 간결하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계시록 15:8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인하여 성전에 연기가 차게 되매 일곱 천사의 일곱 재앙이 마치기까지는 성전에 능히 들어갈 자가 없더라,
예수는 “육체의 예법”으로 가르친 복음이었으므로 성전도 문자 그대로 건물 성전이라고 할 수 있지만, 오늘날에는 건물 성전이 아니고 “영적 성전”입니다. 즉 오늘날의 “성전”은 말씀을 받은 인격체들로 이루어진 “사람성전”을 뜻합니다. 그리고 말씀을 받은 최초의 사람은 “새 이름의 실존 예수님”이 되시며 새 이름의 그 분으로부터 나온 말씀을 모든 사람이 전달받아 “온전한 성전”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새 이름의 그 분만이 성전이 되시며, 성전의 보좌에 앉게 되시며, 성전의 주인이 되시며 최초로 성전의 빗장을 여는 독보적 존재로써, 그 한분을 일컬어 곧 성전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 분이 계시면 성전이 세워지는 것입니다. 처음 성전이 아니라 두 째 성전, 즉 “지성소”가 세워지는 것입니다. 지성소가 세워지면 마땅히 사람들이 성전 안으로 들어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성전에 연기가 차서 능히 들어갈 자가 없다고 했습니다. 연기가 차서라 함은 연막을 치고 있다는 말이며, 연막을 치고 있다는 말은 자신의 신분을 숨겨서 보이지 않게 감추고 있다는 뜻입니다. 때문에 성전이신 그 분을 뵐 수 없습니다. 성전이신 그분을 뵐 수 없기 때문에 성전에 들어갈 자가 없다고 한 것입니다. 언제까지 들어갈 수 없다고 했는가? 일곱 천사의 일곱 재앙이 마치기까지는 성전에 능히 들어갈 자가 없더라, 라고 했습니다. 일곱 천사의 일곱 재앙이 마치기까지란, 영적전쟁이 끝나는 때를 뜻합니다. 그리고 “영적전쟁”이란 그 분의 말씀과 기존의 기독교 비 진리와의 교리전쟁이 됩니다. 따라서 그 같은 교리전쟁이 끝나기 까지는 아무도 성전이신 “실존 예수님”을 뵐 수 없다는 뜻에서, 일곱 천사의 일곱 재앙이 마치기까지는 성전에 능히 들어갈 자가 없다고 한 것입니다. 즉 그 분은 영적전쟁이 끝날 때까지는 아무도 모르게 자신의 신분을 감추는 천기로 계십니다.
그렇다면 그 분은 영적전쟁이 끝나기까지는 왜 자신의 신분을 감추어야만 하는가? 이제부터 아주 중요한 메시지를 전하고자 합니다. 성경을 풀었다고 주장하는 오늘날 기독교 신학자들이 우리 주변에 빼곡하고, 그런 자들마다 예외 없이 자신이 곧 진리를 소유한 자라고 주장하는데, 그들은 오늘날 “실존 예수”를 찌르는 거짓 그리스도요, 적그리스도들이 됩니다. 그러나 “실존 예수”는 철저히 자신을 감추시는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 계시록 15:8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인하여 성전에 연기가 차게 되매 라고 한 기록에 주목해야합니다. 성전에 연기가 찬 것은, 즉 그 분이 감추어진 이유인즉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인하여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인하여 그 분은 영적전쟁이 마치기까지는 필히 자신이 감추어 계셔야만 하는데, 왜 감추어 있는 그게 하나님의 능력이 되고 영광이 되는가, 영적전쟁 때는 고난의 치열한 교리전쟁만 있을 뿐, 하나님의 어떠한 영광도 없고 영생의 상급도 아직 없는 때입니다.
“영생의 상급”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복의 전부인데, 그 “영생의 복”은 반드시 영적 전쟁이 필한 후에 주어지는 것입니다. 인류역사 이래,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걸어온 믿음의 길, 말씀의 길, 생명의 길은 곧 영육을 다 바친 형극의 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만세전부터 영생의 상급을 약속하셨고, 인류는 영생을 쟁취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 시대마다 때로는 기는 자가 되고, 때로는 뛰는 자가 되고, 때로는 나르는 자까지 되었으니, 나르는 자까지 되는 예수님의 때, 그것도 가장 최후에, 즉 영적전쟁 후에 “이긴 자”들에게 마침내 영생이 주어집니다. 전도자는 말합니다.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고,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헛되다고, 그러나 헛됨의 무간지옥에서 빠져나갈 출구는 있었습니다. 그게 곧 “영생의 약속”이었습니다. 헛됨을 헛되지 않게 빛내주는 인생의 명 브랜드 영생, 그리고 영생 안에는 건강도 이팔청춘도 아름다움도 사랑과 희락도 모두 들어 있는 패키지 극상품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인류에게 “영생”을 주시고 싶은 소원이 간절하셨습니다. 그런데 만일! 만세전부터 약속하신 영생이 영적전쟁 후에 주어지지 않는다면 지금까지 믿어온 하나님도, 예수님도, 율법도, 구원도, 믿음도, 소망도, 성경도, 십자가의 피도 모두 헛것이요, 물거품이 되는 것입니다. 영생이 없다면 아무 것도 소용없는 일장춘몽이 되고 맙니다.“영생”이 주어질 때만이 그 이전에 부여된 모든 것, 모든 약속이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류에게 영생을 주시는 분은 “오늘날 예수님”이시며 그분은 반드시 영적전쟁 후에 그 권능을 행사하신다는 시나리오대로 준수하시기 때문에 그 분과 그 분이 주시는 영생이야말로 모든 것을 완성시키는 오메가 포인트가 되는 것입니다. 그 분은 인류에게 영생을 주시고 싶은 소원이 간절하면 간절할수록 그 소원을 이루시기 전이면 절대로 사람들에게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지 않으시는 비장한 각오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사람들을 도무지 실망시키지 않기 위함이며 호리라도 민폐를 끼치지 않기 위함입니다.
그뿐만이 아니고 무엇보다 신분을 드러내지 않고 오직 “진리의 말씀”만으로 사람들을 불러 모으시는 이유인즉 사람들의 정직성을 달아보기 위한 하나님의 자존심이며 그게 하나님의 영광이 되기 때문입니다. “영생”이 없으면 모든 것이 헛되며 무익합니다. 영생의 소원을 이루시기 전이면 그 어떤 명분도 전혀 세울 수 없이, 혹여 위선의 위험만 노출되어 있는 자신의 처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 분은 비탄에 젖어 이렇게 절규하기도 했습니다. 이사야 49:1-4 섬들아 나를 들으라, 원방 백성들아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내가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나를 부르셨고 내가 어미 복중에서 나옴으로부터 내 이름을 말씀하셨으며 내 입을 날카로운 칼 같이 만드시고 나를 그 손 그늘에 숨기시며 나로 마광한 살을 만드사 그 전통에 감추시고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나의 종이요 내 영광을 나타낼 이스라엘이라 하셨느니라, 그러나 나는 말하기를 내가 헛되이 수고하였으며 공연히 내 힘을 다하였다 하였도다 정녕히 나의 신원이 여호와께 있고 나의 보응이 나의 하나님께 있느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나타낼 독생자요 구원자이면서도 그 분은 말하기를 나는 헛되이 수고하였으며 무익히 공연히 내 힘을 다하였다고 절규했는데 이는 “사망”의 세력 앞에 “영생”의 소원이 무산될까 번민하는 것입니다. 뒤이어 나의 신원이, 즉 나의 원수 갚음(사망을 이기는 영생의 권능)이 여호와께 있고 나의 보응(사망을 이기는 영생의 능력)이 하나님께 있다고 마무리 지은 것을 보면 그 점을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그 분의 번민을 해결해 주시고 영생의 권능을 보장해 주실 분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기 때문입니다. 그 분의 마음이 이같이 신중하실 진데, 그분이 인류에게 영생을 주시기 전이면 그 분은 자신에 대해 어떠한 명분도 거절 하십니다. 즉 하나님께만 의뢰하고 자신의 신분을 철저히 감추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인하여 성전에 연기가 차매 능히 성전에 들어갈 자가 없다는 기록과 정확히 일치됩니다. 이처럼 오로지 그 분은 하나님께만 의뢰하고 겸손하시고, 사람들에겐 신중하시고 사려 깊은 것입니다. 때문에 그 분은 일정기간이 필할 때까지, 즉 일곱 천사의 일곱 재앙이 마치기까지 연막을 치고 감추어 계시는 것입니다.
(원문 출처:새사람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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