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3:1-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해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실 때 다시 돌아가실 때가 이미 정해져 있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즉 예수님은 언제 어떻게 태어나서 어떤 일을 하시다가 언제 아버지께로 돌아가신다는 것이 모두 각본에 의해 정해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제 세상을 떠나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 즉 예수님의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신다는 뜻은 새 계명에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과 같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구원을 시키되 끝까지 제자들이 예수로 완성시켜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나게 하시겠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의 구원은 단회 적으로 한 번에 구원이 되지만 상기의 예수님의 말씀을 보면 구원이 단회 적으로 한 번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점진적으로 완성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요한복음 13:2-11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 저녁 먹는 중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이에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씻기기를 시작하여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니, 가로되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기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후에는 알리라, 베드로가 가로되 내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하시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주옵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이는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아심이라, 그러므로 다는 깨끗지 아니하다 하시니라,
해설: 시몬의 아들 “가룟유다”의 마음에 마귀가 들어가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유다”는 은 삼십 량을 받고 유대인들에게 예수를 팔아먹은 자입니다. 그런데 “유다”가 이렇게 예수님을 팔게 된 것은 마귀 때문이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만일 마귀가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지 않았다면 예수를 팔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유다”에게 마귀가 들어가도록 마귀를 보내신 분은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유다”도 하나님의 “불의 병기”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욥기 서”를 보면 “욥”에게 하나님께서 사단을 보내 “욥”을 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같이 하나님께서는 때로는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을 바른 길로 인도하시기 위해 사단을 보내서 치시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깊은 뜻을 인간이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이어지는 말씀은 저녁 먹는 중에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저녁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이에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 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씻기기를 시작하여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게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자신에게 맡기신 것과 또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갈 것을 이미 아셨기 때문에 예수님은 돌아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을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이유”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제자들의 마음을 깨끗이 씻기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한국에서 가장 큰 교회에서 유명하다는 목사님이 설교를 하는데 중동지방에는 사막이라 먼지가 많이 나고 신발이 샌달과 같이 끈으로 되어있어 발이 더럽기 때문에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손수 씻겨주셨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오늘날 어떤 교회에서는 이 말씀을 본받아 세족식을 하는 교회들이 있는데, 예수님이 제자들을 섬기고 사랑했기 때문에 세족식을 한 것으로 알기 때문에 오늘날 목회자들이 교인들에게 손수 발을 씻겨주는 행사까지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발을 씻겨주는데 베드로는 주여 주께서 어떻게 내 발을 씻기실 수가 있습니까? 제가 예수님의 발을 씻겨드려야지요 하며 내 발은 절대로 씻기실 수 없다고 완강하게 거절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네 발을 씻기는 것을 지금은 알지 못하지만 언젠가는 그 의미를 알게 될 것이라 말씀하시면서 내가 네 발을 씻기지 아니하면 너는 나와 아무 상관이 없는 존재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들은 베드로는 그러면 주여 내 발뿐만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고 너희 온몸은 이미 깨끗하게 되었다고 말씀하시면서 그러나 너희 모두가 다 깨끗하지 않다고 말씀하시는데 이는 자기를 팔자가 누구인지 이미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팔자는 곧 “가룟유다”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3:12-15 저희 발을 씻기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하여 본을 보였노라,
해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의미는 영적으로 뜻이 매우 깊어 제자들도 아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다 같은 제자들이라 해도 영적인 차원과 생각에 따라 예수님을 선생이라 부르는 자와 주님이라 부르는 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제자들 중에 예수님을 말씀을 가르치는 선생님처럼 생각하는 사람과 예수님이 자신을 구원하는 주님, 즉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부르는 것과 같이 내가 그렇다”고 말씀하시면서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의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은 일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고 본을 보인 것이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위에서 말씀드린 것과 같이 세족식, 즉 발을 씻기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교리와 기복으로 더러워진 마음을 서로 깨끗이 씻겨서 모두 “정결한 처녀”와 같이 깨끗이 만들어 하나님의 아들로 거듭나라는 뜻입니다.
요한복음 13:16-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상전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니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내가 너희를 다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의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앎이라, 그러나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라,
해설: 예수님께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종이 상전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니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통해서 위계질서 즉 영적인 세계도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시면서 이 질서를 알고 행하면 복(생명)이 있게 된다고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아직 출애굽도 못한 세상교회에서 미물과 물고기 같은 피조물들이 예수님을 자기 친구처럼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은 물론 종도 아닌 미물과 물고기 같은 피조물들이라는 것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내가 너희를 다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시면서 이는 내가 나의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알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든다”는 것은 “가룟유다”가 예수님의 제자로서 말씀을 먹으면서 예수님보다 높아지려는 교만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팔아먹는 하나님의 뜻, 즉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만일 “유다”가 예수님께 “발꿈치”를 들지 않는 다면 성경에 예언된 말씀이 응하지 않고 또한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예수님을 팔아먹는 일도 이루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유다”를 “악”의 도구로 “불의병기”로 사용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신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유다”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희생의 제물이 된 것인데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유다”는 배신자요 악한자라 저주를 하는 것입니다. 인간들은 “선”한 자를 “선인”이라 말하고 “악”한 자는 “악인”이라 말하지만 하나님은 선한 자나 악한 자나 필요에 따라 사용하는 도구일 뿐인 것입니다.
요한복음 13:19-30 지금부터 일이 이루기 전에 미리 너희에게 이름은 일이 이룰 때에 내가 그 인 줄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로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의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해설: 예수님께서 지금 제자들에게 이런 말씀들을 미리 알려 주시는 것은 앞으로 너희에게 이런 일이 이루어질 때 내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요, 구원자인줄을 너희로 믿게 하려는 것이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보낸 자(제자들)를 영접하는 자는 곧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곧 나를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를 영접하는 것이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자신에 대해서 지속적으로 말씀하시는 것은 내가 곧 하나님께서 보낸 하나님의 아들이며 너희를 구원할 구원자라는 것을 믿게 하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죽고 사는 것은 오직 예수를 믿느냐 믿지 않느냐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하러 오시는 구원자 곧 하나님의 아들에 대해서 기록을 하고 있으며 하나님은 예수를 믿고 영접해야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아들로 거듭날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믿으라고 보내주시는 예수는 성경이나 역사 속에 묻혀있는 예수가 아니라 오늘날 “실존예수” 즉 오늘날 하나님의 아들로 거듭난 현재의 “실존예수”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오늘날 “실존예수”라고 말하면 무조건 이단으로 정죄를 하고 배척을 하며 오직 자기가 섬기는 목사의 말만 믿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지금도 이천 년 전에 유대인들에게 오셨던 예수나 자기 목사의 말만 믿으며 현재의 “실존예수”는 이단자로 배척하는 자들이 과연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요?
요한복음 13:21-30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에 민망하여 증거 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서로 보며 뉘게 대하여 말씀하시는지 의심하더라,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의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 시몬 베드로가 머릿짓을 하여 말하되 말씀하신 자가 누구인지 말하라 한대 그가 예수의 가슴에 그대로 의지하여 말하되 주여 누구 오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한 조각을 찍어다가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고 곧 한 조각을 찍으셔다가 가룟시몬의 아들 유다를 주시니, 조각을 받은 후 곧 사단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 이 말씀을 무슨 뜻으로 하셨는지 그 앉은 자 중에 아는 이가 없고 어떤 이들은 유다가 돈 궤를 맡았으므로 명절에 우리의 쓸 물건을 사라 하시는지 혹 가난한 자들에게 무엇을 주라 하시는 줄로 생각하더라,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 이러라,
해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을 마치시고 심기가 불편한 상태에서 말씀하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하나가 나를 팔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서로 보며 예수님이 누구를 말씀하는지 의아해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 하나 곧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제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워있습니다. 이때 시몬 베드로가 그 제자에게 머릿짓을 하며 말하되 주님이 말씀하신 자가 누구인지 말하라고 하니 그자가 예수의 가슴에 그대로 의지한 상태에서 예수님께 묻되 주여 주님을 팔자가 누구냐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대답하시는데 “내가 떡 한 조각을 찍어다가 주는 자”즉 말씀을 변형시켜 “유다”에게 주시니 “유다”에게 사단이 그 속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유다”가 곧 “밤”(어둠)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점은 하나님의 말씀을 한마디라도 잘못 전하거나 잘못 받으면 곧 사단이 들어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자신을 팔자가 “유다”라는 것을 이미 아시고 계신데 제자들은 물론 “유다” 자신도 예수를 팔자인지를 몰랐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유다”에게 사단이 들어가도록 허락하신 분은 누구일까요? 이때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고 말씀하시니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무슨 뜻으로 하셨는지 그 앉은 자 중에 아는 자가 없고 어떤 이들은 “유다”가 돈 궤를 맡았으므로 명절에 우리의 쓸 물건을 사라고 지시하는지 혹은 가난한 자들에게 무엇을 주라고 말씀하시는 줄로 생각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제자들 중에도 예수님의 마음이나 생각을 알고 있는 자가 하나도 없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때문에 예수님은 항상 마음이 답답하고 외롭고 쓸쓸하셨던 것입니다. “유다”가 떡 한 조각을 받고 나가니 곧 “밤”이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유다”가 떡 한 조각을 받을 때 사단이 “유다”속으로 들어가 “유다”는 “밤”인 “어둠”의 존재, 즉 사단의 종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때부터 “유다”는 사단의 종이 되어 예수님을 팔게 된 것입니다. -계속-
요한복음 13:31-35 저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지금 인자가 영광을 얻었고 하나님도 인자를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도다. 만일 하나님이 저로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으면 하나님도 자기로 인하여 저에게 영광을 주시리니 곧 주시리라,
해설: “가롯유다”가 예수님으로부터 “떡 한 조각”을 받고 “어둠”이 되어나간 후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지금 인자가 그(유다)로 인해 영광을 얻었고, 하나님도 인자를 인하여 영광을 얻었다”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과 하나님께서 영광을 얻으신 것은 “유다”가 예수를 팔기 때문에 영광을 얻게 되신 것입니다. 만일 “유다”가 나는 예수님을 배반할 수 없고 양심에 꺼리는 일을 할 수 없다고 예수를 팔지 않았다면 사람들은 “유다”가 잘했다고 칭찬할지는 모르나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지 않으셨을 것이고 따라서 “그리스도”로 부활되는 영광도 얻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보다 “유다”가 자신의 “의”를 내세워 예수를 팔지 않았다면 하나님이 계획하신 모든 일들이 망가지게 되고 “유다”로 인해서 예수님도 영광을 얻지 못하고 “그리스도”로 부활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결국 “유다”가 예수님을 팔았기 때문에 하나님도 예수님도 영광을 받으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다”는 배신자나 정죄받을 죄인이 아니라, 하나님과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신 공로자며 “일등공신자”인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 “유다”에게 영광을 주신다고 말씀하신 것이며 그것도 속히 주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유다”는 예수님과 하나님이 영광을 얻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불의의 병기”로 사용하신 것이며 따라서 “유다”는 예수님과 하나님이 영광을 얻을 수 있도록 공을 세운 충정 어린 예수님의 일등제자인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 “유다”에게도 영광을 주시되 곧 주신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깊은 뜻을 모르기 때문에 지금까지 “유다”를 악한 “사탄마귀”라고 정죄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오묘한 말씀의 깊은 뜻을 모르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가롯유다”를 예수를 팔아먹은 악한 사단마귀라고 저주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3:33-35 소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을 터이나 그러나 일찍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나의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해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갑자기 소자들이라고 말씀하면서 내가 아직은 너희와 함께 잠시 동안 있지만 조금 있으면 유대인들에게 내가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너희가 나를 찾아도 찾을 수 없고 내가 가는 곳에도 올 수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지금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시면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사랑”은 인간의 윤리도덕의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인 “아가페 사랑”을 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너희가 서로 “사랑”해야 모든 사람이 “사랑”하는 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너희들을 구원을 시킨 것처럼 너희도 이웃에 죽어가는 영혼들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구원을 시키라는 뜻입니다. “영혼구원”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그런 차원이 아니라, 내 가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죽은 이웃에게 희생의 피(복음)를 흘려 구원해야 내가 구원의 완성을 이루는 것입니다. 딤전 4:15-16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너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삼가 이 일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 이렇게 “영혼구원”을 다 이루었을 때 예수님은 물론 주위의 모든 사람들도 너희가 예수님의 제자인 줄을 알고 제자로 인정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3:36-38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의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띠라 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를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해설: 예수님께서 떠나가신다는 말씀을 들은 “베드로”는 “주여 어디로 가신다는 말입니까?” 하고, 예수님께 말씀을 드리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의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띠라 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 오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베드로”는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를 수 없습니까?” 하며 나는 주를 위하여 내 목숨까지 버리겠다고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수석 제자라는 “베드로”가 예수님이 어디로 가시는지 그리고 예수님이 가시는 곳을 지금은 왜 따라갈 수 없는지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베드로”는 주를 위해서 목숨까지 버릴 각오가 되어 있으니 나는 주가 가시는 곳은 어디든지 따라가겠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말을 들으신 예수님은 “네가 나를 위하여 진정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고 말씀하시면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이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주를 위해 목숨까지 버리겠다는 “베드로”는 “닭이 울기 전에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한 것”입니다. 여기서 “닭이 울기 전에 세 번이나 부인한다”라는 뜻은 아주 깊은 뜻이 숨겨져 있습니다.
창세기 6일 창조에서 하루씩 지날 때마다 매번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저녁”(흑암)의 존재가 “아침”(빛)의 존재로 거듭나는 과정을 “비유”로 말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닭이 울기 전에 세 번이나 예수를 부인한다”는 뜻은 닭은 새벽동트기 직전에 울기 때문에 아직 “아침”(빛) 직전이라 “흑암”의 존재이기 때문에 예수를 부인한 것을 “비유”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와 “3년”동안 3 일길, (애급, 광야, 가나안) 함께 지내면서도 예수를 “3번”부인하는 것은 “아침”(빛)이 되지 못한 “저녁”(흑암)의 존재는 누구를 막론하고 “예수”를 부인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이 오늘날 “실존예수”를 부인하는 것은 “아침”(빛)이 되지 못한 “저녁”(흑암)의 존재이기 때문에 부인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베드로”의 이런 모습을 보고 실망을 하며 수석 제자 “베드로”가 어떻게 예수를 부인할 수 있을까 하고 의아해 하지만 “베드로”의 모습이 바로 오늘날 기독교인들의 내 모습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자기 유익이나 이권을 위해서는 오늘날의 예수님을 세 번 아니라 삼십 번도 부인하는 존재라는 것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저녁”(흑암)의 존재는 오늘날의 “실존예수”를 부인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며 자신이 예수와 같이 거듭나기 전에는 “베드로”와 같이 부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원문 출처:새사람 블로그) 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