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2:1-3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의 있는 곳이라,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 때 마르다는 일을 보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해설: 예수께서 유월절 엿새 전에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곳은 예수께서 “나사로”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와 “마리아”그리고 “마르다”가 살고 있는 집입니다. “마리아”의 집에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를 준비하고 있는데 “마르다”는 일을 하고 있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무리 중에 앉아 있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기름)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향유”(기름) 냄새가 집에 가득하게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부은 “향유”(기름)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나드는 히말라야의 깊은 산중에서 서식하는 감송나무 뿌리에서 추출한 아주 귀한 “향유”(기름)로 나드 한 근의 가격은 삼백 데나리온이나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마리아”가 예수님 발에 부은 소중한 “향유”(기름)는 향유의 가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향한 “마리아”의 간절한 마음을 “비유”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에게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예수님의 발을 씻겼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실은 예수님이 주시는 생명의 말씀으로 “마리아”의 “머리털”즉 “마리아”의 비 진리의 더러운 생각과 마음을 “향유”(기름) 생명의말씀으로 깨끗하게 씻었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더러운 발을 씻어야 할 사람은 예수님이 아니라 “마리아”자신이기 때문입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고 “머리털”로 씻기니 그 향이 집에 가득하게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도 마리아가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부어 “향유”가 집에 가득하게 되었다는 것은 마리아의 마음에 성령(말씀)이 충만해졌다는 것을 “비유”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2:4-8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 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저를 가만 두어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해설: 예수님의 제자 중 하나 곧 예수를 유대인들에게 은 삼십 량에 팔아먹을 “유다”가 말하되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않고 예수님의 발에 붓느냐고 말하는데 “유다”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해서 한 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유다”는 도적과 같은 심보를 가진 자로 돈 궤를 관리하고 있는데 돈을 헌금 통에 넣으면 그 돈을 가져가려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유다”의 말을 들으신 예수님은 “마리아”가 하는 일에 간섭하지 말고 그대로 두어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이런 일을 마음에 간직하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어 언제나 그들에게 베풀 수 있지만 나는 너희와 항상 있지 않고 곧 떠나기 때문에 내게는 베풀 기회가 없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곧 “유다”가 예수님을 유대인들에게 팔아넘겨 십자가에 달려 죽는다는 것을 이미 아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2:9-11유대인의 큰 무리가 예수께서 여기 계신 줄을 알고 오니 이는 예수만 위함이 아니요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도 보려 함이러라, 대제사장들이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하니 나사로 까닭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
해설: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표적을 본 유대인의 큰 무리가 예수께서 여기 계신 줄을 알고 몰려오니 이는 예수만 보려는 것이 아니라 죽은 자가 살아난 “나사로”도 보려는 것입니다. 이렇게 큰 무리들이 예수님을 보기 위해 그리고 죽은 자가 살아난 “나사로”를 만나 보려고 몰려다니는 것을 보고 대제사장들이 예수님뿐만 아니라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죽은 “나사로”를 살렸다는 소문을 듣고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를 찾아가서 예수를 믿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믿고 따르는 것은 제사장들이요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믿고 따르는 것은 오직 목회자뿐인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갑자기 나타나니 사람들의 마음이 모두 예수님께로 향하기 때문에 예수님과 “나사로”까지 잡아서 죽이려 하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는 것은 타 종교인이나 불신자가 아니라 제사장과 오늘날 기독교목회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늘날도 누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라고 하든가 구원자라고 말하면 유대인들과 똑같이 그를 보지도 않고 그의 말을 들어보지도 않고 무조건 이단으로 몰아붙여 배척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하나님의 아들 “실존예수”가 없다면 절대로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기독교인들은 명심하고 또 명심해서 꼭 알아야 합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오늘날의 구원자로 보내주시는 현재의 “실존예수” 즉 지금 살아서 존재하고 있는 오늘날의 예수를 믿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이지 2000년 전의 예수는 유대인들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지 오늘날 기독교인들의 구원자가 아니기 때문에 오늘날의 구원자 예수를 믿어야 하나님의 아들로 거듭날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2:12-16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 함을 듣고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 왕이시여 하더라,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만나서 타시니 이는 기록된 바 시온 딸아 두려워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인 줄 생각났더라,
해설: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에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는 말을 듣고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예수님을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하면서 예수님을 환영하였습니다. 예수는 어린 “나귀새끼”를 만나서 그 위에 앉으셨습니다. 그런데 이는 성경에 기록된 바 “나귀새끼”타고 오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분에게는, 즉 “나귀새끼”에게는 탄자가 있는데, 탄 자라는 것은 곧 “생명의 말씀”을 뜻합니다. 때문에, 얼굴을 가리 움 받고 보지 않음을 당한 것 같이 경멸스러운 “나귀새끼”같을지라도 오늘날 우리들이 받아먹고 구원받아야 할 진리의 새 말씀이 있는 것입니다. 구원받을 진리의 새 말씀이 있는 “나귀새끼”이므로, 천국보좌에 앉아 구원을 베풀기 위해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시는 것입니다.
스가랴 9: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 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마태복음 21:15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의 하시는 이상한 일과 또 성전에서 소리 질러 “호산나”다윗의 자손이여 하는 아이들을 보고 분하여,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 아이들은 “호산나”를 외치며 즐거워하고 기뻐하는데 반면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그것을 분해했을까요? “호산나”의 뜻은 “구원해 주시옵소서”입니다. “아이들”이란 실제 어린아이들이 아니라 마음이 청결하고 “정결한 처녀”와 같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변화된 깨끗한 자들을 뜻합니다. 그리고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교만한 교권주의자들을 뜻합니다. 오늘날의 목회들을 말합니다 “나귀새끼”를 타신 예수님은 낮고 천한 자이므로 아무도 그가 예수님이신 줄 아는 자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탄 자, 즉 “진리의 새 말씀”있는데 새 말씀을 알아보는 자들은 아이들 같이 마음이 청결하고 “정결한 처녀”와 같은 자들만이 가능합니다. 때문에, 그런 자들은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하시는 그분을 향해 “구원해 주시옵소서”라고 하는 “호산나”를 외쳐 불렀던 것입니다.
즉 “호산나”란 그분에게 호감을 갖고 진리의 새 말씀으로 구원받기를 원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구원해 주시옵소서 라는 뜻의 “호산나”소리를 듣고 있는 오늘의 교만한 교권주의 자들은 몹시도 불쾌 할 수밖에 없을 터이므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분해했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예수님은 그런 교만한 자들을 따돌리기 위해서라도 볼품없고 멸시받는 “나귀새끼”를 타고 오십니다. 그렇지만 마음이 청결한 자들(아이들)은 “나귀새끼”를 타신 그분을 향해 “호산나, 호산나”를 외쳐 부릅니다.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은 곧 그런 아이들이 되어 “호산나, 호산나”를 불러야 합니다. 그러므로 어린 “나귀새끼”는 순전하고 겸손하고 정결함을 나타내는 짐승으로 “동정녀 마리아”와 같은 “정결한 처녀”위에 “성령”(말씀)이 임하신다는 것을 “비유”하여 보여주신 것입니다. 때문에 예수님의 제자들도 처음에 이러한 일을 전혀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 즉 예수님의 제자들이 어린 “나귀새끼”와 같은 존재가 되어 “성령”(말씀)이 자신들 안에 임하였을 때 이것이 곧 예수님과 자신들에게 일어날 일에 대하여 기록하신 것임을 기억하고 이해하게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2:17-19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실 때에 함께 있던 무리가 증거 한지라, 이에 무리가 예수를 맞음은 이 표적 행하심을 들었음이러라, 바리새인들이 서로 말하되 볼 찌어다 너희 하는 일이 쓸데없다 보라 온 세상이 저를 좇는 도다 하니라,
해설: 예수를 따르는 무리 가운데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실 때에 함께 있던 자들이 예수에 대하여 증거를 하였고 이들의 말을 들은 무리가 예수를 맞음은 예수님이 행하신 표적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믿고 따르는 무리들을 바라보고 서로 말하되 보라 너희 하는 일, 즉 예수를 잡아 죽이려는 일이 아무 소용이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온 세상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좇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지금은 예수를 믿고 따르는 무리들이 많아 제사장들이나 바리새인들이 함부로 예수님을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보다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부르실 때가 아직 아니기 때문에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잡지 못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2:20-24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이 있는데 저희가 갈릴리 벳새다 사람 빌립에게 가서 청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하니, 빌립이 안드레에게 가서 말하고 안드레와 빌립이 예수께 가서 여짜온대,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해설: 유대인들의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이 있는데 그들이 갈릴리 벳새다 사람 빌립에게 가서 청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합니다”하고 말하니 빌립이 안드레에게 가서 말하고 안드레와 빌립은 예수께 가서 헬라인들이 주님을 뵙고자 찾아왔다고 조심스럽게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장면을 보면 이때는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무리들이 많아 예수님을 쉽게 만날 수가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보다 예수님도 유명세를 타서 사람들이 예수를 함부로 만날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은 빌립과 안드레에게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고 말씀하시면서 “내가 진실로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라고, 빌립과 안드레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즉 이제 열매를 맺을 때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서 죽지 않으면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지금 하신 말씀과 같이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고 예수님의 죽음으로 인해서 열두 열매 즉 예수님이 제자들 안에서 부활하심으로 제자들이 열두 아들 예수로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는 그리스도”로 부활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면서 “나는 다 이루었도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어서 많은 열매”를 맺듯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열두 아들 예수를 창조하셨다는 뜻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이 세상에 구원자로 오셔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매를 모두 완벽하게 맺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맏아들이 되시고 제자들은 차남예수가 되는 것입니다.로마서 8:29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님이 이제는 맏아들이 되시고 그 제자들은 예수님과 동등한 자격으로 차남들이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2:25-26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
해설: 예수님은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의 이런 말씀은 이해할 수도 없고 받아들이기도 힘든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모두 “자기 생명”을 사랑하지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생명”을 위해서 살고 신앙생활도 “자기 생명”을 위해서 하며 천국도 “자기 생명”을 위해서 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지금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며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원히 보존하게 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이웃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희생할 수 없고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에서 이웃을 구원하기 위해 “자기 생명”을 희생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지 않으면 영원한 생명 “그리스도”로 부활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전체의 흐름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해야 완전한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내가 거듭나 예수가 돼서 이웃을 내 몸같이 구원해야 구원의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시면서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내 말을 믿고 따르는 자가 곧 나를 섬기는 자이며 내 말을 간직하고 있는 자는 곧 나와 함께 있는 자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나를 섬기는 자가 곧 하나님을 섬기는 자이며 내말을 지키는 자가 곧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잘 섬기는 자를 귀히 여기시며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2:27-31지금 내 마음이 민망하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때에 왔나이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신대 곁에 서서들은 무리는 우뢰가 울었다고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천사가 저에게 말하였다고도 하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소리가 난 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이니라, 이제 이 세상의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 임금이 쫓겨나리라,
해설: 예수님께서 “지금 내 마음이 민망하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하고 계십니다. 이 말씀에 내 마음이라는 단어가 원문에 “누스”나 “카르디아”로 되어 있지 않고 “프쉬케”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프쉬케”는 “영”이 아니라 “혼”으로 아직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나지 못한 육적인 생명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하여 오직 “영”으로 계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예수님의 생명이 “혼”이라면 너무나 충격적인 것입니다. 때문에 성경에 이렇게 “혼”으로 기록되어있는 것은 오늘날 목회자들은 성경 기록자들의 오류라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생명이 “혼”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은 이 곳 뿐만 아니라,요한복음 10:15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라는 구절에 예수님의 “목숨”이 동일하게 “프쉬케”(혼)로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이 “영”도 있지만 “혼”도 있다는 즉 “인성”도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 하면 온전한 100%의 “영”은 예수님의 “인성”의 생명이 장성하여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해서 “그리스도”가 되었을 때 완성되어지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사도바울이 너희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이 죽고 다시 부활을 할 때 “혼”의 생명이 모두 소멸되고 100%의 “영” 즉 “그리스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내 마음이 민망하다고 말씀하시는데 “민망”이라는 단어는 “타라소”로 원문의 뜻은 “요동하다, 어지럽다, 괴롭다, 불안하다”는 뜻입니다. 때문에 예수님은 죽음을 앞에 두고 마음이 불안하고 너무 괴로워서 아버지께 나를 구원하여 이 죽음을 면하게 해달라고 땀방울이 피 방울이 되도록 간절히 기도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죽음을 앞에 놓고 불안해하고 괴로워하는 것은 예수님 안에 “인성” 즉 아직 “혼적”인 요소가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내가 이를 위하여 이때에 오게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이때에 죽기 위하여 왔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인데 이 말씀은 예수님이 지금 이렇게 죽게 되는 것은 이미 하나님의 계획에 각본 속에 정해져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죽음은 피할 수도 없고 피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안에 있는 “혼적”인 존재가 모두 죽어야 “그리스도”의 생명, 즉 100%로 “영적”의 생명으로 부활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알고 계신 예수님은 죽음을 각오하시고 하나님께 아버지여, 아버지여 이름을 영광스럽게 해달라고 기도하시는 것입니다. 이때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해주시겠다는 음성이 들린 것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이미 하나님의 생명을 주어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셨고 다시 영생 즉 영원한 생명을 주어 “그리스도”가 되게 하여 주시겠다는 뜻입니다.
때문에 예수님의 “혼적생명”이 모두 죽어야 “영적생명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부활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고 말씀하신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하늘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소리를 예수님 곁에 서서들은 무리는 하늘에서 “우뢰”소리가 울렸다고도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천사”가 저에게 말하였다고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똑같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도 사람의 “영적”인 상태와 그 차원에 따라 듣는 것이 다르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애급”의 존재는 애급의 소리로 들리고 “광야”의 존재는 광야의 소리로 들리고 “가나안”의 존재는 가나안의 소리로 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 소리가 난 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요 “가나안”의 너희를 위한 소리라는 것이니라”고, 말씀하시면서 이제 이 세상의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 임금이 쫓겨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세상임금이 쫓겨나는 것은 곧 예수님 안에 “영”과 함께 있는 “혼”(프쉬케)이 쫓겨나는 것을 “비유”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들은 육신 안에는 “혼”(프쉬케)만 들어 있지만 예수님의 육신 안에는 “혼”(프쉬케)과 “영”(프뉴마)이 함께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지금까지 예수님 안에서 임금 노릇을 하던 혼(프쉬케)적 존재는 심판을 받고 쫓겨나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안에 “영”과 함께 존재하고 있는 “혼”이 모두 쫓겨나야 예수님께서 100%의 “영”이 되어 “그리스도”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혼”의 존재가 죽고 예수님 안에 있는 “영”이 열두 제자들 안에서 부활될 때 제자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로 부활(거듭)하게 되며 예수님은 “그리스도”로 부활(거듭)하게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예수님은 한 알의 밀이 떨어져 죽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게 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2:32-34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이렇게 말씀하심은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심 이러라, 이에 무리가 대답하되 우리는 율법에서 그리스도가 영원히 계신다함을 들었거늘 너는 어찌하여 인자가 들려야 하리라 하느냐 이 인자는 누구냐,
해설: 예수님은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이렇게 말씀하심은 예수님이 어떤 죽음으로 죽을 것을 무리에게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땅에서 들려서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다는 말씀은 예수님이 죽으시고 다시 부활하셔서 많은 사람을 구원하시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무리가 대답하되 우리는 율법에서 그리스도가 영원히 계신다함을 들었거늘 너는 어찌하여 인자가 들려야 하리라 하느냐면서 그러면 너는 누구냐고 묻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나 그리스도는 절대로 죽지 않고 영원히 계신다고 믿고 있는데 너는 어찌하여 인자, 즉 하나님의 아들이 죽는다고 말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자(예수)가 죽는 다고 말하는 네 정체는 도대체 무엇이냐고 묻는 것입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이나 오늘날 기독교인들도 하나님의 아들의 실체에 대해서 전혀 모르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은 신성(영)과 인성(혼)을 소유하고 있는 “인간예수”를 말씀하고 있는 반면에 유대인들이나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믿고 있는 “인간예수님”은 본래 남자의 “씨”를 받지 않고 마리아 몸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잉태하여 태어나신 분으로 오직 “신성”만 있는 존재로 오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이나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믿고 있는 예수는 죽을 수도 없고 죽어서도 안 되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분명히 죽으셨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부활하셨다”(요2:22)고 요한복음은 “죽은 자 가운데”를 여러 곳에서 말씀하고 있는데도 유대인들이나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죽은 자 가운데”란 뜻이 무슨 말인지 전혀 이해를 못하고 예수님은 그냥 죽었다가 부활한 것으로만 알고 있지 더 이상은 알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죽은 자 가운데”라는 뜻은 “영”이 없는 “혼”의 존재인 제자들이 진리의 말씀으로 죽고 부활하면 제자들이 “영과 혼”을 소유하는 “인간예수”로 부활한다는 뜻이며 이때 “영과 혼”을 소유했던 “인간예수님”이 죽고 부활하면 “혼”은 죽고 완전한 “영”으로 “그리스도”로 부활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2:35-36예수께서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두움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두움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바를 알지 못 하느니라,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떠나가서 숨으시니라,
해설: 예수님은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빛” 가운데 다녀 “어둠”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고 명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어둠”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바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빛”은 예수님을 말하고 “어둠”은 아직 거듭나지 못한 존재, 즉 예수님을 죽이려는 유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예수님은 아직 내가 너희 가운데 있으니 내가 있을 동안 나와 함께 다녀 유대제사장이나 바리새인들에게 잡히지 않게 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생명으로 가는 길조차도 모르는 삯꾼목자들인데 만일 이들에게 잡혀서 교리와 기복신앙으로 의식화되면 이들에게서 벗어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될 것이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이 항상 계시는 것이 아니라 떠날 때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예수님이 계실 동안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고 그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듣고 영접하여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나서 너희도 예수가 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떠나서 숨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몸을 감추신 것은 예수님께서 아직 할 일이 남았기 때문에 지금 죽으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2:37-43이렇게 많은 표적을 저희 앞에서 행하셨으나 저를 믿지 아니하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가로되 주여 우리에게 들은 바를 누가 믿었으며 주의 팔이 뉘게 나타났나이까 하였더라,저희가 능히 믿지 못한 것은 이 까닭이니 곧 이사야가 다시 일렀으되 저희 눈을 멀게 하시고 저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였음이더라,이사야가 이렇게 말한 것은 주의 영광을 보고 주를 가르켜 말한 것이라, 그러나 관원 중에도 저를 믿는 자가 많되 바리새인들을 인하여 드러나게 말하지 못하니 이는 출회를 당할까 두려워 함이라 저희는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
해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많은 표적을 저희 앞에서 행하셨으나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전혀 믿지 아니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행하신 표적은 “육신적”이고 “외면적”인 표적이 아니라 모두 “영적”이고 “내면적”인 표적이라는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육신적”이고 “외면적”인 표적을 보여주었다면 유대인들이나 바리새인들도 모두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며 구원자라는 것을 믿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볼 수 없고 알 수 없는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그리고 그동안 말씀 속에 감추어져있던 영적인 비밀들을 모두 드러내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들이라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은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사야가 가로되 주여, 우리에게 들은 바를 누가 믿었으며 주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습니까? 저희가 능히 믿지 못한 것은 이 까닭이니 곧 이사야가 다시 일렀으되 하나님께서 저희 눈을 멀게 하시고 저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요12:40) 이 말씀을 보면 놀랍게도 하나님의 백성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마음을 강팍하게 하여 말씀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게 하신 분이 곧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나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이 말씀을 이해할 수가 없겠지만 사실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귀와 눈을 멀게 하신 것은 시편 14:1-3 “어리석은 자의 마음에 하나님이 없어 마음이 부패해지고 그 소행은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기 때문에 하늘에서 하나님이 인생을 굽어 살피시며 하나님을 찾는 자가 혹시 있는가하여 찾아보니 모두 욕심과 기복신앙에 치우쳐서 하나님을 찾는 자가 없는데 하나도 없도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스스로 보고 말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통해서 주의 영광을 보고 주를 가르켜 말한 것이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관원 중에도 예수를 믿는 자가 더러 있었지만 바리새인들을 인하여 드러나게 말하지 못한 것은 자신들이 유대교회에서 이단으로 몰려 출교를 당할까 두렵기 때문에 말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속으로는 알고 믿었으나 입을 다물고 말하지 못한 것은 저희가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이들은 하나님 보다 사람을 더 두려워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2:44-47예수께서 외쳐 가라사대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며,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두움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 찌라도 내가 저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
해설: 예수님께서 지금은 가만히 말씀을 하지 않으시고 큰 소리로 외치시는 것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을 믿지도 않고 듣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하나님을 믿는 것”이며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하나님을 보는 것”이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구원과 심판을 모두 예수님에게 위임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것이 곧 하나님을 믿는 것이며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은 곧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기 때문에 무릇 나를 믿는 자는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려는 것이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어둠은 세상의 기복을 채워주는 삯군목자들을 말합니다. 이렇게 어둠의 존재인 삯꾼목자들은 할 수만 있으면 참 목자를 따라 생명의 좁은 길을 가고 있는 택한 자들도 미혹하여 실족하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빛”이 있을 동안 “빛”을 믿고 그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영접하여 “빛”으로 거듭나야 하는 것입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 할 찌라도 내가 저를 심판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려고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3장에서는 예수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않지만 예수를 믿지 않는 자, 곧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이름)을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은 것이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백성들의 구원과 심판은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믿고 영접하느냐 부인하느냐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2:48-50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나의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저를 심판하리라,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나의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줄 아노라, 그러므로 나의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이르노라 하시니라,
해설: 예수님은 심판을 내가 직접 하지 않는다고 말씀을 하셨지만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는데 곧 내가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저를 심판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하나님 백성들의 구원과 심판은 모두 예수님이 하신 “말씀”에 의해서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내가 하는 말은 자의로 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나의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신 것이기 때문에 나는 아버지의 명령이 곧 영생인줄 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내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말하는 것이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도 자의로 말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에 따라 그리고 아버지께서 예수님께 명하신 그대로 말씀을 하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인간들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은 물론 성경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의 말과 행동도 모두 하나님께서 주관 하신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