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27~31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 식물이 되리라, 또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식물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창세기 9:1~6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바다의 모든 고기가 너희를 두려워하며 너희를 무서워하리니 이들은 너희 손에 붙이 웠음이라, 무릇 산 동물은 너희의 식물이 될 지라 채소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 그러나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채 먹지 말 것이니라, 내가 반드시 너희 피 곧 너희 생명의 피를 찾으리니 짐승이면 그 짐승에게서, 사람이나 사람의 형제면 그에게서 그의 생명을 찾으리라,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
노아의 가족밖에 남지 아니한 이 땅 위에서 노아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부지런히 영원히 살지 못하는 자손을 번식시키는 일일까? 아니면 육신을 위하여 먹고 마실 농사를 짓는 것이 그의 일인가? 드넓은 땅 위에 경쟁자도 없고 지천으로 과실들이 널려있을 텐데 몇 식구 먹을 양식이 없어 고작 한다는 일이 포도나무 농사짓는 일이었을까? 진리의 생명으로 오신 예수는 인간이 먼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것이요, 썩어질 육신의 양식이 아니라, 영원히 사는 생명의 양식을 위하여 일해야 함을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6:27~29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 치신 자니라, 저희가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노아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그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을 경배하며 하나님의 창조의 섭리를 알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나님의 뜻은 노아의 가족을 통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씨를 이 땅에 파종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세상을 왜 물로 심판했는가? 악으로 오염된 세상을 쓸어버리고 의로운 노아를 통하여 새 세상을 열어가려는 섭리가 아니었는가? 성경을 대하는 이들은 너무나 단순합니다. 예수를 통해서 행하신 하나님의 일들을 다 기록하면 이 땅 위에 쌓아 둘 곳이 없다고 했습니다(요21:25) 그러니 필요하고 필요한 내용만 기록했을 것이 아닌가?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인간이 어떻게 구원받는가에 관한 것입니다.
그러면 포도나무 농사가 무엇이며 노아가 포도주에 취하였다는 말이 무엇인가, 노아가 지은 포도나무 농사란 무엇인가?
요한복음 15:1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예수는 자신이 참 포도나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먼저 노아의 포도나무는 식물성의 나무가 아닌 시적 은유의 표현임을 알자. 성경은 인간 구속의 길을 알려주기 위한 책이지 한가하게 일상적 이야기나 기록하자는 여유가 있는 책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인간 농사를 포도나무 농사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2:21 내가 너를 순전한 참 종자, 곧 귀한 포도나무로 심었거늘, 내게 대하여 이방 포도나무의 악한 가지가 됨은 어쩜 이뇨?
신명기 32:32~33 그들의 포도나무는 소돔의 포도나무요 고모라의 밭의 소산이라, 그들의 포도는 쓸개포도니 그 송이는 쓰며 그들의 포도주는 뱀의 독이요 독사의 독이라, 노아의 포도나무 농사는 마음을 개간하여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이며 하나님의 섭리가 무엇인지 깨닫기 위한 구도의 과정을 포도나무 농사에 비유한 것입니다. 노아의 축복은 아담의 축복과 동일합니다. 창세기 1:28 하나님이 그들(아담)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창세기 9:1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하나님은 제 2의 조상이 된 노아에게 어떻게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깨닫기를 원하셨습니다. 아담을 통한 에덴에서의 하나님의 섭리가 빗나갔으므로, 노아를 통해 새로운 인류를 이 땅 위에 농사하길 원하셨는데 그 과정을 포도나무 농사로 비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 포도나무 예수를 믿어 그 안의 부활의 진리를 깨달으면 열매 없는 포도나무인 우리가 그에게 접붙여진 포도나무가 되어 풍성한 열매를 낼 것입니다.
요한복음 15:4~5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진리를 향해 가는 구도자는 포도원에 진입한 작은 여우를 잡아야 합니다. 아가 2:15 우리를 위하여 여우 곧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 우리의 포도원에 꽃이 피었음이니라,
에스겔 13:4 이스라엘아, 너의 선지자들은 황무지에 있는 여우 같으니라, 노아가 포도나무 농사를 하였다는 것은 참 진리로 표현되는 그리스도 안의 인류 구원의 비밀을 깨닫기 위해서 구도함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노아는 포도나무 농사를 하였고 포도주를 마시고 포도주에 취하여 벌거벗고 잠을 잡니다. 이 말을 문자대로 해석을 하면 안 됩니다. 창세기 9:21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마태복음 26:27~28 또 잔을 가지 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성경 상의 포도주는 진리며 속죄의 보혈과 대속을 상징합니다. 피 흘림은 생명입니다. 인류의 죄를 대속하는 생명으로 오신 예수가 없는 구약에서는 이 생명의 상징을 포도주로 대신하였습니다. 예수가 오시지 아니한 구약의 마당에 노아가 포도주를 마시고 취한 것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깨닫고 황홀경의 상태에 있음을 나타내는 비유입니다. 노아가 먹은 포도주 술은 양조된 술이 아닙니다. 어찌 노아 같은 의인이 양조된 술에 취하여 벌거벗고 잠을 잔단 말인가? 성경을 신화를 읽듯 읽어서는 아니 되며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라도 알게 하시는 성령의 영의 양식으로 읽어야 합니다. 노아가 포도주에 취하고 벌거벗은 것은 하나님의 아들 안에 감 추인 인간 창조와 그 구원의 섭리의 진리에 취하여 그 은혜 속에 어린아이의 영적상태인 깨끗한 마음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신약의 120문도, 바울의 셋째 하늘, 요한의 하늘에 오른 상태처럼 몸은 이 땅에 있지만 황홀경과 무아경의 진리의 체험 속에 있음을 포도주에 취한 것과 벌거벗은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고후 12:1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계시록 5:1 내가 보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책이 있으니 안팎으로 썼고 일곱 인으로 봉하였더라,
사도행전 2:13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가로되 저희가 새 술이 취하였다 하더라, 신앙의 세계에서 벌거벗음의 상징은 흠과 티가 없는 깨끗함의 상징입니다. 아담도 타락 전에 벌거벗었는데, 이는 심성의 천진성과 깨끗함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노아 같은 당대의 의인이 술에 취해 벌거벗고 남근을 드러냈겠는가?
성경에서 어린아이가 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음도 신체의 유약함이 아닌 도덕적 순진성과 깨끗함을 회복한 구도자를 의미함입니다. 노아가 진리의 말씀의 술에 취하니 이것을 성경은 벌거벗은 자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천진난만함과 흠과 티가 없는 정화된 깨끗한 마음이 되었음의 뜻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이 진리의 포도주에 취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선과 악의 의식을 가진 인간은 늘 갈등 속에 살아갑니다. 갈등 속에 일어나는 가슴의 자리를 초월하여 그리스도의 의식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이는 생명이며 사랑입니다.
(원문 출처:새사람 블로그) s,
'새사람의 신앙 고백' 카테고리의 다른 글
노아의 때는 오늘날 기독교의 때와 같다. (0) | 2024.10.05 |
---|---|
노아의 방주는 내가 건축해야 할 방주이다. (0) | 2024.10.05 |
노아는 방주를 왜 산(山)에다 지었을까? (0) | 2024.10.04 |
노아의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 (0) | 2024.10.04 |
나는 여자의 후손인가 뱀의 후손인가? (0) | 2024.10.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