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자신이 온 전생이나 죽어서 가는 내생이 어딘지도 모르면서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천국으로 간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천국을 들어간다는 것은 기독교인들의 주장이며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전생, 현생, 내생을 오고 가며 윤회하고 있다는 사실조차도 모르면서 천국은 갈 수 있다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지금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전생이나 윤회를 전적으로 부정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위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성경에 기록된 전생과 윤회에 대한 말씀들을 모두 삭제해 버리고, 기독교에는 전생과 윤회가 없다고 신학교리로 정해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이 세대들을 위하여 전생과 윤회의 말씀들을 성경 속에 부분적으로 감추어 놓으셨고, 또한 자연만물에 나타난 자연계시를 통해서도 전생과 윤회를 항상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농부가 지난해에 추수한 볍씨를 봄에 심어야 여름철에 벼가 자라 가을에 곡식을 맺는 것이며, 가을철에 추수한 볍씨를 겨울 동안 곳간에 저장하여 내년 봄에 다시 심어야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인간들도 전생에 있던 육신이 죽으면 그 안에 들어 있던 영혼(생명)이 다시 현생에 육신의 옷을 입고 태어난 것이며 현생에서 육신이 입고 있던 몸이 죽으면 영혼이 내생에 다시 육신의 옷을 입고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의 몸을 벗고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나면 천국으로 들어가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나지 않게 됩니다. 결국 전생과 윤회를 부정하고 있는 것은 기독교의 교리이며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해서 전생과 윤회를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제부터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전생과 윤회의 말씀들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전도서 1:4~9~11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일을 후에 다시 할 찌라, 해 아래 새 것이 없나니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 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우리 오래전 세대에도 이미 있었느니라, 이전 세대를 기억함이 없으니 장래 세대도 그 후 세대가 기억함이 없으리라,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인간들이 오고 가는 윤회에 대하여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들이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면서 돌고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이 세상에 태어난 영혼이 떠나가고, 이 세상을 떠났던 영혼이 다시 오는 것이지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즉 사람이 입고 있던 옷이 낡아지면 헌 옷을 벗고 새 옷으로 갈아입듯이 전생에 존재하고 있던 영혼이 현생에 육신의 몸을 입고 태어나는 것이며, 현생에 존재하고 있는 사람이 입고 있던 육신이 죽으면 육신의 몸을 벗고 그 영혼이 다시 육신의 몸을 갈아입고 내생에 태어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은 새 것이 하나도 없으며 이미 이전세대, 즉 전생에 있던 것들이 현생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며, 현생에 존재하고 있는 것들은 다시 장래에 내생에 존재할 것들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죄 많은 인간들을 전생과 현생과 내생을 오고 가게 하며 돌리고 있는 것은 사람들의 죄를 깨끗이 씻어주고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나게 하여 천국으로 인도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현생에서 신앙생활을 올바르고 진실하게 하여 자신이 지은 모든 죄를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깨끗이 씻고 하나님의 아들로 거듭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현생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자신 안에 있는 욕심과 탐심을 버리지 못하고 오직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한다면 다시 고통과 괴로움이 계속되는 내생에 태어나 많은 고통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전도서를 통하여 해 아래 새 것이 없다고 하신 것은 이 세상에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난 하나님의 아들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또한 사람들이 전생을 모르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이전세대 즉 전생을 기억하지 못하도록 하셨기 때문입니다. 요즈음 심령학자들이 사람들에게 최면을 걸어서 잠재의식 속에 있는 전생을 부분적으로나마 조금 보고 느끼게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서를 통해서 인간들의 전생을 더욱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1:4~5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복중에 짓기 전에 이미 알고 계셨고, 태에서 나오기 전에 구별하여 선지자로 세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 중에 어미의 태에서 나오기 전은 이미 예레미야의 생명이 잉태된 후이기 때문에 현생이라 할 수 있으나 어미의 복중에 짓기 전은 예레미야의 생명이 어미의 뱃속에 잉태되기 전을 말하기 때문에 분명히 전생을 말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복중에 짓기 전이라 함은 사람의 몸에 씨가 잉태하기 전이라는 말로써 예레미야가 어머니의 뱃속에 생명이 잉태하기 전부터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예레미야가 전생에 있을 때부터 이미 알고 계셨으며, 어미의 태에서 나오기 전에 구별하여 열방 중에 선지자로 세우셨다는 말씀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11장 15절의 말씀을 통하여 오리라한 엘리야, 즉 하나님께서 말라기서를 통하여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엘리야가 이미 와 있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전생에 존재하고 있던 엘리야가 이 세상에 다시 왔다는 것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라기 4:5~6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마태복음 11:14~15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 귀 있는 자는 들을 찌어다.
마태복음 17:11~1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일을 회복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였도다. 인자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으리라 하시니 그제야 제자들이 예수의 말씀하신 것이 세례요한인 줄 깨달으니라, 말라기서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말라기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엘리야 선지자를 다시 보내서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분리된 너희의 마음을 하나로 만드시겠다고 약속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말라기를 통해서 약속하신 말씀대로 오리라한 엘리야, 즉 하나님께서 다시 보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엘리야 선지자가 세례요한의 몸으로 이미 너희 앞에 와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약속대로 다시 오신 세례요한은 광야에 있는 자들을 향하여 회개하라고 외치며 주님이 오실 수 있도록 주의 길을 예비하며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고 있는데, 이것은 광야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도록 그들의 잘못된 신앙과 더러워진 마음을 깨끗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러한 세례요한의 외침을 외면하고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보내 주신 세례 요한의 외침을 들었다면 예수님도 영접하였을 것입니다. 애급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자들은 모세의 능력을 보지 않고는 출애굽(탈출)을 할 수가 없고, 광야에 있는 백성들은 요한의 외침을 듣지 않고는 가나안의 예수께로 나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유대인들이나 오늘날 기독교인들도 전통적으로 지켜오는 유전이나 기독교의 신학교리 때문에 요한의 외침을 듣지 못하고 예수님의 음성도 들을 수가 없어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전생과 윤회에 대하여 모두 부정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욥기서나 예레미야서 등을 통하여 전생에 대하여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으나 신학교리로 의식화된 고정관념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볼 수 있는 눈과 들을 수 있는 귀가 모두 가려져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날 때에만 볼 수 있고, 거듭난 하늘의 비밀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욥기서는 전생을 더 구체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욥기 3:11~19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죽어 나오지 아니하였었던가, 어찌하여 내 어미가 낳을 때에 내가 숨지지 아니하였던가, 어찌하여 무릎이 나를 받았던가, 어찌하여 유방이 나로 빨게 하였던가, 그렇지 아니하였던들 이제는 내가 평안히 누워서 자고 쉬었을 것이니 자기를 위하여 거친 터를 수축한 세상 임금들과 의사들과 함께 있었을 것이요, 혹시 금을 가지며 은으로 집에 채운 목백들과 함께 있었을 것이며, 또 부지중에 낙태한 아이 같아서 세상에 있지 않았겠고, 빛을 보지 못한 아이들 같았었을 것이라, 거기서는 악한 자가 소요를 그치며 거기서는 곤비한 자가 평강을 얻으며 거기서는 갇힌 자가 다 함께 평안히 있어 감독자의 소리를 듣지 아니하며, 거기서는 작은 자나 큰 자나 일반으로 있고 종이 상전에게서 놓이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욥기서를 통하여 욥이 출생하기 전의 전생에 대하여 분명하고도 확실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상기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동방의 의인이라는 욥에게 사단을 통해서 욥의 모든 재물과 자녀들을 거두게 한 후 몸에 악창까지 나게 하여 심한 고통을 받을 때 한말입니다. 욥이 처음 시험에는 주신 자도 여호와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라고 하면서 시험을 잘 이겨냈으나, 고통이 가중되니까 욥도 별 수 없이 자신이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을 몹시 후회하면서 간접적으로 하나님을 원망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욥은 첫째, 자신이 어미의 태에서 죽어서 나오지 않은 것을 원망하고 있으며 둘째, 어미의 태에서 나왔다 해도 자기가 어미의 젖을 빨지 않았다면(죽었다면) 지금 전생에서 평안히 누워 자고 있었을 것이라고 전생을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셋째, 욥이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다면 지금 그곳(전생)에 있는 임금들과 의사들과 함께 편히 있었을 것이라고 전생을 그리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넷째, 욥은 자기가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다면 부지중에 낙태한 아이와 같이 혹은 아직 세상에 태어나지 않아 빛도 보지 못한 아이들과 함께 있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섯째, 욥은 상기의 말씀을 통해서 자신이 태어나기 전의 세계(전생)를 소개하고 있는데 그곳은 악한 자들의 소요도 없고 곤비한 자도 평강을 얻으며 갇힌 자도 감독자의 소리를 듣지 아니하며 거기서는 작은 자나 큰 자나 동일하며 종들도 상전에게 자유스러운 곳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전생을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으나 기독교인들은 기독교의 교리로 말미암아 전생을 무조건 부정하며 인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전생을 말하면 무조건 이단자로 배척을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처사는 기독교인들이 말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 권위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신학교리가 절대 권위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증거하여도 그 말씀이 교리에 어긋나면 이단으로 정죄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과 사도들이 하나님의 백성인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오류 없이 그리고 진실하게 전파하였으나, 유대인들은 이단자로 취급을 하며 온갖 핍박을 한 것은 바로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유대교의 교리 때문이었습니다. 이상의 말씀과 같이 기독교는 전생이나 윤회가 있다는 것을 부정하고 있지만 하나님은 전생과 윤회가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만일 하나님의 말씀에 전생과 윤회가 없다면 하나님의 공의(公義)가 존재할 수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과 공의로서 인간들 어느 누구에게나 공평하시며 편견이 없으신 분이신데 현실은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자연 만물의 생성과정이나 사람들이 이 세상에 태어날 때의 상황이나 조건을 살펴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공의로우신 분이라면 인간들이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어느 누구나 동일한 조건과 다 같은 환경에서 태어나게 하셔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은 열악한 환경에서 태어나 멸시와 천대를 받으며 고통 속에서 살아가며, 어떤 사람은 좋은 환경에서 태어나 항상 존경을 받아가며 편안히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현실을 바라보면서도 하나님이 공의(公義)로우신 분이라고 말할 수 있단 말인가? 지금도 어떤 아이는 종이나 거지의 아비로부터 태어나 날 때부터 종이나 거지의 신분이 되어 많은 고통과 천대를 받고 살아가며, 어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주인의 신분이나 왕의 신분으로 태어나 존경을 받으며 풍요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또한 어떤 민족은 좋은 환경에서 백인으로 태어나며 어떤 민족은 열악한 환경에서 검둥이로 태어나 멸시천대를 받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사람이 태어나는 모습도 각기 다른데 어떤 사람은 키가 커서 걱정을 하며 반대로 어떤 사람은 키가 작아서 걱정을 하고 어떤 여자는 얼굴이 미인으로 태어나 사람들의 시선을 끌며 살아가고 어떤 여자는 태어날 때부터 추한 모습으로 태어나 평생을 고민하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어떤 사람은 건강하게 태어나 장수하며 행복하게 사는데 어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불구의 몸이나 병약한 몸으로 태어나 평생을 괴로움과 고통 속에서 불행하게 살아가거나 단명하여 이 세상을 떠나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을 바라볼 때 좋은 환경에서 태어나 행복하게 잘 살고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공의로우신 하나님 혹은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찬양할지 모르지만 불우한 환경과 열악한 조건을 가지고 태어나 평생을 괴로움 속에서 불행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공의로우신 분이라 말할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현생만 바라본다면 하나님처럼 편견이 많고 불의한 하나님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일들은 성경을 통하여 말씀하고 있는 인간들의 전생과 하나님의 공의(公義)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원문 출처:새사람 블로그) 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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