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과 성신...

성령을 받아야 예수님을 따를 수 있다.

제라늄A 2020. 6. 25. 20:36

 

요 13:36-38 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지금은 내가 어찌하여 따라갈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언제는 예수께서 나를 따르라 해놓고  이제 와서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고  후에는 따라오리라 하시니 이것이 무슨 말씀인가, 그래서 예수께서 요한에게 말씀합니다.  계 21:6-7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

위에 말씀같이“나를 따르라”는 예수의 부르심을 따라 제자들이 예수를 따릅니다. 예수를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고, 예수를 위해서는 어디든지 따라가겠다는 제자들에게 예수는 아닌 밤중에 홍두깨 같은 소리를 하는 것은 왜인가? “나를 따르라”던 예수, “주를 위하여 내 목숨까지 버리겠다”는 베드로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예수는 베드로에게 지금은 나를 따를 수 없다고 하십니다. 지금까지는 나를 따라왔는지 몰라도 이제부터는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따라올 수 없다고 하십니다. 그 길이 어떤 길이기에 따라갈 수 없는가?  베드로가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하고 묻는데, 예수는 대답하기를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하십니다.

베드로가 또 묻습니다. “주여 지금은 어찌하여 내가 따라갈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그런 베드로에게 예수는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처음에 따르는 것과 후에 따르는 것의 비밀을 반드시 알아야 우리의 신앙생활이 헛되지 않은 것입니다. 예수의 제자들의 행적을 추적해보면  예수께서“지금은 나를 따를 수 없다”는 말씀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의 제자들은 “성령”이 임하기 전에는 예수를 따를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처음 시작할 때는 그럴 수 있지만, 그것은 예수를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따르다”는 본래 “함께 같은 길에 있다”는 의미를 갖습니다. 그러면“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

후에 따르는 방식은 어떤 것일까?  예수는 제자들에게 부모형제 삶의 터전을 모두 버리고 나를 따르라 해놓고, “네가 지금은 나를 따를 수 없다”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따르게 했던 그 예수는 무책임하게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어 버립니다. 제자들은 닭 쫓던 개가 지붕을 쳐다보듯 예수를 따르던 제자들은 허공이나 쳐다보란 말인가?  신앙인은 “나를 따르라”는 말이 무엇일까를 다시 깊이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예수를 따름은 자기 목숨을 바쳐 예수를 따르겠다는 베드로처럼 그렇게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께서는 너희가 지금은 따를 수 없지만 후에는 따를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무슨 뜻인가?  후에는 따를 수 있다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여기서 후(後)란 두 번째 방식이 찾아올 때를 말합니다.

“알파”시대가 떠나서 “오메가“시대에 이르렀을 때를 말합니다. 그때는 예수의 육신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영”(그리스도)을 따르는 때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예수는 처음에는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를 따릅니다. 그러나 어느 시점에 이르면, 미안하지만 너희는 나를 따를 수 없다고 선언하십니다. 그렇게 따르는 것은 따르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따르는 모든 방식은 결국 닭 울기 전에 세 번 부인하는 것밖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너희가 거듭나기 전에는 모두 예수를 부인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진실을 제자들에게 이해시킬 수 없기에 제자들의 희망인 예수 자신이 십자가에서 죽어버립니다. 그렇다면 이제“나를 따르라”는 말씀은 어떻게 제자들에게 들려져야 하는가?  거기서의“나”는 그들이 따르던 예수에게서 비로소 “나”에게로 전환되어야 합니다.

요 14:3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예수는“기름 부음”의 형태로 “그리스도”로, 우리에게로 다시 오셔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가 그의 제자들에게 지금은 나를 따를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 이유는  제자들은 아직 성령을 받지 못한 상태이기 때문에 하늘의 소리를 들을 수 없는 것은 물론 예수를 진실로 따를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 상태로는 예수의 죽음의 길을 따른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로 갈 수는 더더욱 없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의 따름으로는 닭 울기 전에 예수를 세 번 부인하는 것밖에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가 부활 승천하시고 오순절에 성령으로 다시 오셔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시니  그들의 영적인 상태는 완전히 백팔십도 달라졌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령(그리스도)이 강림하신 후에  그들은 말씀을 깨닫는 것은 물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복음을 전하는 모습을 사도행전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는 말씀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나를 따라오려거든 너를 부인하고 네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의 부르심을 받았더라도  성령(그리스도)이 우리 안에 임하기 전에는  그리스도를 따를 수 있는 것은 처음 방식밖에는 없습니다.

그를 위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믿음은 보이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오늘날 신앙인들이 이런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목자가 이끄는 대로 가는 것밖에 모릅니다.“내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바치겠습니다.”는 고백, 헌신하겠다는 고백, 온몸으로 충성하는 방법밖에 또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십자가 죽음 없이 성령을 받기 전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거기까지가 전부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우리는 예수를 떠나보내고 대신 예수의 영(그리스도)이 오셔서 계실 거처를 내 안에 예비하는 일을 먼저 선행해야 합니다. 예수는 이 사실을 잘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요 14:23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

이와 같이 후에는 성전 밖에 있는 예수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받은 성전(나) 안에 있는 나를 따르도록 예수께서 방향을 바꾸어 주십니다. 그래서 아무도 나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나에게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요일 2:27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너희를 미혹하는 자들(목사)에 관하여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썼노라, 이같이 후에는 성전밖에 있는 예수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성전(나)안에 있는 성령을 따르도록 예수께서 방향을 제시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신다는 것을 반드시 명심해야 합니다. 기름부음을 받은 자는 내 안에 계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야 합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성경 말씀을 뱀처럼 통째로 삼키기만 할 뿐  소나 양처럼 새김질하지는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새김질 하지 않는 짐승을 제물로 받지 않으신 것처럼 새김질하지 않는 교인들도 제물로 받지 않으실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원문 출처:새사람 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