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이 질문은 거대담론 같으나 막상 답변을 하려면 신학자들도 질문이 애매함으로 답변을 할 수가 없고 성경을 읽고 막연히 믿고 있을 뿐 하나님을 분명히 알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불확실하게 알고있다는 것은 구원이나 영생 그리고 천국의 존재 여부도 불확실하다는 뜻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평소에 신앙생활을 하면서 늘 궁금하고 알 수 없었던 것이 바로 하나님의 대한 의구심이었습니다. 정말 하나님이 계실까? 이런 생각은 아마 누구나 한 번쯤 생각해 보았을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 목회자들도 하나님을 분명하게 드러내어 답변하지 못하고 자신의 신학적 지식과 관념으로 답변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아는 자는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된 자만이 하나님을 알 수 있고 하나님에 대하여 말할 수 있는 것이며 아직 “예수”가 되지 못한 인간들은 하나님에 대하여 알 수 없고 볼 수도 없기 때문에 의구심이 생기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에 대해서 증명할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님이며 또한 그로부터 낳음을 받은 제자들과 오늘날의 거듭난 자들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만일 죄 인된 인간들이 하나님에 대하여 듣거나 공부를 하여 알 수 있거나 볼 수 있다면 그 하나님은 참 하나님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영”(靈)이신 하나님은 “육”의 눈으로 볼 수 없고 학문을 통해서 알 수 있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목회자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교인들에게 소개도 하고 가르치기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목회자도 하나님을 믿고 예수를 믿고 있는 인간이며 아직 영생에 이르지 못한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해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목회자들은 단지 신학교나 성경을 통해서 공부한 것을 관념이나 지식적으로 알고 있을 뿐 하나님의 실체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세계나 신(神)의 영역은 아직 거듭나지 못한 죄인들은 볼 수도 없고 알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해서 증명할 수 있고 말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낳음을 받아 예수님과 사도들 그리고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난 자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인들은 죄인 된 몸으로 하나님을 알려고 하거나 목회자는 아직 거듭나지 못한 상태에서 하나님에 대해 기독교인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는 것은 절대로 아니 되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아직 거듭나지 못한 죄인들은 하나님을 보면 죽게 되어 있고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함부로 말해도 죽게 되어 있습니다. 출애굽기의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호랩 산에 계신 하나님을 직접 보면 죽기 때문에 모세를 대신 보낸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직 세상이란 “애급 교회”나 “광야교회”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을 보려고 하거나 알려고 해도 안 되고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망령되이 불러도 안 되는 것입니다.
그보다 하나님에 대해서 아직 분명히 모르는 상태에서 기독교 목회자들이 하나님을 증거 한다면 그 증거는 거짓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증명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난 오늘날 “실존 예수님”이신 하나님의 아들들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신 “실존 예수님”이 직접 오셔서 하나님에 대해서 말씀을하고 증명한다 해도 아직 거듭나지 못한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실존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도 보아도 무슨 말씀인지 이해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물론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올바로 듣지 못한 것은 할례 받은 영적인 눈과 귀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내가 하는 말을 “저희는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마음이 있어도 깨닫지 못한다”라고(막8:17~18) 말씀하신 것입니다.
때문에 지금 “실존 예수님”이 오셔서 오늘날 기독교인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말씀을 전하며 증명한다 해도 기독교인들은 들을 귀가 없으면 들을 수가 없고 이해조차 하지 못한 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보고 듣는 자 중에 혹시 독자분이라도 “실존 예수님”이 전하는 “영”(靈)의 말씀을 이해하거나 들을 수 있는 사람이 혹시 있을 수도 있다는 가정 하에 새사람인 필자는 하나님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신”(神)은 곧 하나님을 말하며 하나님은 삼위일체 곧 “성부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부 하나님”은 영체이시며 “성령 하나님”은 거룩한 말씀이시며 “성자 하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오늘날 인간 “실존 예수님”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 인간들이 하나님을 볼 수 있고 그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자는 오직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오신 오늘날 “실존 예수님”이나 그의 말씀으로 거듭난 자들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실존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은 거듭난 자 외에는 아무도 알아볼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유대 종교지도자들 앞에 “실존 예수님 ”이 있어도 알아본 사람은 12제자 이외는 없었습니다. 이같이 오늘날에도 기독교인들 앞에 “실존 예수”가 계셔도 알아볼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그럼 누가 알아보는가? 예수님의 12제자들과 같이 예수님의 말씀을 받고 장성한 자로 성장하면 그때 예수가 누구신지 자신이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필자인 새사람도 이와 같은 경로를 통해 지금까지 왔기 때문에 “실존 예수”를 담대하게 전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말씀의 실체이신 “성부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성자 하나님”이신 인간 예수로 오신 것입니다.
요 1:1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라, 말씀의 실체가 곧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태초(아르케) 즉 “성부 하나님” 안에 말씀이 함께 계셨기 때문에 말씀이 곧 하나님이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태초”는 원문에 헬라어 “아르케”로 기록되어 있으며 히브리어 “베레스트”는 “태초”라는 시제의 뜻도 있지만 “근원 우두머리 최상”의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태초”라는 단어의 뜻은 시제 보다 근원, 우두머리 즉 “성부 하나님”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창 1:1 태초에 하나님(복수)이 계시니라, 이 말씀의 뜻은 창 1:1 성부 하나님 안에 “성자 하나님들”이 계시니라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부 하나님” 안에 계시던 말씀의 실체이신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오심으로 예수님은 육신 안에 말씀이 잉태되어 오신 것을 오늘날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예수님은 성령으로 육신이 잉태되어 태어나셨다”라고 “성탄절”을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의 실체가 되신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오신 “실존 예수님”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유대인들에게 오셨으나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알아보는 사람은 물론 믿는 사람조차 없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물론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12제자들도 예수님께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할 때 “예수께서는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하느냐”라고 예수께서 제자들을 책망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성부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통해서 자신을 드러내어 증명하신 것입니다. 때문에 예수는 하나님의 증거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후4:4)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 자신을 예수님의 몸을 통해서 드러내셨기 때문에 “예수님의 실체는 곧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실체는 예수님”인 것입니다. 문제는 말씀의 실체이신 하나님께서 육체를 입고 오신 분이 오늘날 예수님의 몸으로 오셨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인 유대인들이나 오늘날 기독교인은 자신들에게 오신 예수님을 보고도 몰랐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비밀이” 곧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비밀은” 모두 예수님 안에 감추어져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 알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들도 오늘날 “실존 예수님”을 아는 것이 영생이라(요17:3)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실존 예수님”을 보는 것은 곧 하나님을 보는 것이며 예수를 아는 자는 곧 “영생”에 이른 자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영생에 이르러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오신 예수님은 낳고 낳고의 역사를 통해서 오늘날도 “실존”으로 오셔서 계신데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유대인들과 같이 영안이 없어 “실존 예수”를 보지 못하고 예수가 오시지 않았다고 지금도 구름 타고 오실 예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난 “하나님의 아들들”만이 알 수 있고 증명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알려면 먼저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난 오늘날 “실존 예수”를 찾아야 합니다. 그러면 오늘날 하나님의 아들을 통해서 하나님을 분명하게 알 수 있고 하나님을 직접 보고 얼굴과 얼굴을 맞대며 만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성경을 보는 “영안”이 없으면 하나님을 보여 주어도 보지 못하고 하나님에 대해서 아무리 설명을 하고 증명을 해도 들을 수 조차 없다는 것입니다. “소경”은 보석을 손에 쥐고 있어도 보지 못하는 것과 같이 아직 하나님이 생명으로 거듭나지 못한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을 알려고 하거나 하나님을 논하는 자체가 무리이며 하나님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안팎”(계5:1)으로 기록된 성경을 읽을 수 있는 “영안”이 없어 읽어도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때문에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을 보려고 하지 말고 오늘날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난 “실존 예수님”을 “구하고 찾고 두드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구원은 하나님께서 “실존”으로 계실 때만이 구원이지 하나님이 안 계시는데 누가 구원을 시키겠습니까? 목사는 구원을 시킬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모두 “실존 예수”에게 나타내셨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예수님이 지금 기독교인들 앞에 와 계신다 해도 “영안”이 없으면 알아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실존 예수님”은 지금 여러분 가까이에 계십니다. 천국 비유에 나오는 “형제 중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예수님께” 한 것이라고 했고 “너희는 손님 대접하기를 즐거워하라 부지중에 천사가 왔다 갔느니라”(마25:40)
그러므로 형제 중 지극히 작은 자란 사람의 이목을 전혀 끌지 못하는 보잘것 없는 자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필자인 “새사람”이 만난 “실존 예수”를 독자 분들에게 알려드리는 것입니다. 사실은 필자인 새사람이 이 사람이 “실존 예수”를 다 알려 드려도 믿을 사람은 한 사람도 없고 “실존 예수님”의 말씀을 영접하여 장성한 자로 성장하면 그때 그분이 누구신지 본인 자신만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계 2:17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돌(예수)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말씀)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이같이 말씀을 받고 깨달은 자만 그분이 누구신지 본인만은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원문 출처:새사람 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