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1:35-39 또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예수의 다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좇거늘 예수께서 돌이켜 그 좇는 것을 보시고 물어 가라사대 무엇을 구하느냐 가로되 랍비여 어디 계시 오니이까 하니(랍비는 번역하면 선생이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와 보라 그러므로 저희가 가서 계신데를 보고 그 날 함께 거하니 때가 제10시쯤 되었더라, 상기의 말씀은 이튿날이 되어 요한은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있다가 “예수”의 다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른이 되신 예수님을 보고 왜 “어린 양”이라고 말할까,
그 이유는 예수님은 육신이 태어 난지는 30년이 지나 이미 어른이 되어 있지만 예수님의 “영”은 지금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예수님 안에 성령이 임(잉태)함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갓 태어난 아기 예수의 영적 상태이기 때문에 “어린 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동정녀 마리아 몸에서 성령의 잉태로 갓 태어난 아기 예수를 “어린 양”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예수”는 어린 “영”을 말하고 “예수 그리스도”는 장성한 “영”을 말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사도바울은 예수의 “영”에 머물지 말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성장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엡4:13)
요한의 두 제자가 그가 곧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는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좇아가고 있는데 예수께서 돌아서서 요한의 두 제자가 자신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물어 가라사대 너희가 무엇을 구하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요한의 두 제자는 예수님께서 “너희가 무엇을 구하느냐”는 말씀을 듣고 말하되 랍비여 어디 계십니까?라고 묻고 있습니다. 여기서 좀 이상한 것은 예수님은 요한의 제자들에게 “너희가 무엇을 구하느냐”라고 묻고 있는데 요한의 제자들은 뜬금없이 예수에게 “어디 계시냐”라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의 두 제자의 말을 들으신 예수님은 그러면 와서 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예수를 믿고 찾는 목적은 대부분이 예수님께 무엇을 구하거나 얻으려고 찾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의 제자들은 무엇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어디 계시냐며 예수님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오늘날 기독교인들도 예수님께 무엇을 구하기 전에 먼저 예수님이 어디 계신가를 찾고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먼저 만나야 예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것을 알 수 있고 또한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다른 예수”나 “삯꾼 목자”를 통해서 구한다면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것은 절대로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요한의 제자들은 지금 앞에 계신 예수님과 대화를 하면서도 예수를 보고도 모르기 때문에 예수님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찾고 있는 요한의 두 제자에게 와서 나를 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가서 직접 보고 확인한 후 예수님과 함께 거하니 때가 “10시”쯤 되었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때가 “10시”가 되었다는 것은 요한의 제자가 “영적”으로 장성해저서 이제는 만날 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요한의 제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즉 이미 장성한 자로 성장했다는 뜻입니다.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찾을 수 있고 만날 수 있었던 것은 그동안 요한의 가르침을 받아 장성한 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만일 이들이 요한의 가르침을 받지 않았다면 예수께서 “너희가 무엇을 구하느냐”라고 물었을 때 세상 것을 구했을 것이고 예수를 찾지도 않고 만날 수도 없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광야에서 주님이 오시는 길을 예비하게 하고 그의 첩경을 평탄하게 하시는 “세례 요한”의 외침이나 가르침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주의 길”을 예비하며 첩경을 평탄케 했다는 것은 그동안 비 진리의 전통 유전과 신학 교리 그리고 율법으로 굳어진 신앙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모두 깨고 부수어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준비시켰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기독교인들도 “실존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들으려면 먼저 오늘날 기독교 유전과 신학 교리 신앙에서 하루속히 벗어나 “세례 요한”과 같은 오늘날의 “세례 요한”의 가르침을 받아야 오늘날 “실존 예수님”의 실체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오늘날의 “실존 예수”를 모르는 것은 아직 세상 교회에서 출 애급(탈출)도 하지 못한 세상교회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실존 예수”와 대화를 하면서도 그분이 누구신지 도무지 모르고 이상한 이단으로 보는 것입니다. 상기의 말씀에 때가 제 “10시”가 되었다는 것은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그동안 “세례 요한”의 가르침을 받고 장성한 자로 성장했기 때문에 “실존 예수님”을 만날 때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요 1:40-42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좇는 두 사람 중에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라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다 하고 (메시아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가라사대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
“세례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좇는 두 사람 중에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안드레는 예수를 만난 후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가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시몬 베드로도 그동안 예수님을 찾고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신앙생활을 하면서 학수고대하며 기다리며 찾은 것이 세상의 물질이나 돈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구원자”로 보내주시는 “실존 예수님”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그렇게 기다리고 찾던 “실존 예수님”이 지금 그들 앞에 계시다는 것과 그 예수님을 만난다는 기쁨이 얼마나 컸을까요? 안드레는 베드로를 데리고 예수께로 가니 예수께서 보시고 가라사대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게바는 곧 베드로라는 뜻인데 시몬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그의 말씀을 듣고 훈련을 열심히 받아 “시몬”이 거듭나서 “베드로”가 된 것입니다. 안드레와 시몬은 그렇게 기다리고 찾던 “실존 예수님”을 만난 후 그의 집과 아내와 전토를 모두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며 가르침을 받아 “하나님의 아들”로 거듭나서 사도들이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오늘날 기독교인들도 “신앙의 길”을 가려면 예수님의 말씀대로 오늘날 기독교 유전과 거짓된 신학교리 신앙에서 하루속히 벗어나 “세례요한”과 같은 오늘날의 “세례요한”의 가르침을 받아야 오늘날 “실존 예수님”의 실체를 구주로 믿고 그의 말씀을 듣고 훈련을 열심히 받아 “시몬”이 거듭나서 “베드로”가 된 것처럼 오늘날 기독교인들도 거듭나야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원문 출처:새사람 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