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9:33-36 예수께 이르러는 이미 죽은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 그 중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이를 본 자가 증거 하였으니 그 증거가 참이라 저가 자기의 말하는 것이 참인 줄 알고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라, 이 일이 이룬 것은 그 뼈가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리라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 민수기 9:12 그 뼈를 하나도 꺾지 말아서 유월절 모든 율례대로 지킬 것이니라, 요한복음 5:39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 하는 것이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유대교 종교의식에 따라 사람의 죽은 시체의 “뼈”를 꺾어야 종교적인 의식인데 오직 예수의 “뼈”만은 꺾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예수의 “뼈”를 꺾지 안 했는가, “뼈”는 예수님이 영생을 주시는 “생명의 말씀”을 “비유”하기 때문입니다.
구약에서 유월절에 희생된 어린양은 예수님을 상징했으며, 따라서 신약의 예수님은 유월절 어린양으로 오셔서 십자가에서 희생되셨습니다. 그런데 구약의 유월절 어린양도 그 “뼈”를 하나도 꺾지 말라고 했듯이, 예수님이 십자가형을 받으셨을 때도 유대군병들이 예수님의 다리 “뼈”를 꺾지 아니했다고 했습니다. 그 당시에 다른 범죄자들은 다리 “뼈”를 꺾는 것이 유대인들의 관례였으나 예수님은 그 “뼈”가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리라 한 성경을 응하게 한 것이라고도 했습니다. 왜 사람의 “뼈”는 꺾는데 예수님의 다리의 “뼈”는 꺾지 말아야 하는가? 하나님께서는 “영”이시기 때문에 말씀의 실체가 되시는 분이 육신을 입고 오신 분이 예수님이므로 보이는 예수님의 몸체를 이루고 있는 “살과 피와 뼈”등은 모두 예수님의 말씀을 “비유”합니다. 즉 보이는 몸체가 사실적으로는 “말씀”이라고 하는 “비유”로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의식을 베푸실 때 “떡과 포도주”라는 것은 “살과 피”인데 예수께서 이는 내 “살”이요 내 “피”라고 하실 때도 곧 그와 같은 이치에서입니다. “떡과 포도주”가 예수님의 “살”과 “피”를 “비유”했으나, 그같이 “비유”로 된 예수님의 “살”과 “피”가 또한 본질적으로 진리의 “말씀”을 상징한 “비유”이고 예수님의 “살”도 말씀이요, 예수님의 “피”도 말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기독교인들에게 복음을 주시는 입장은 영적으로 “죽은 자”들을 살리기 위하여 예수님의 희생이 따르는 “피와 포도주”를 주시는 것이며 기독교인들이 먹는 입장에는 예수님의 “살과 떡”을 먹고 살아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흘리고 죽으신 것은 “물”도 말씀이요 “피”도 말씀이므로 기독교인들을 살리기 위한 희생의 “물과 피”를 흘리신 것입니다. 이것이 “살과 피, 떡과 포도주 오늘날 기독교에서 행하는 성찬식”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의 “피”의 공로로 구원받았다고 “피”자체를 믿고 “피”가 무슨 영적으로 어떤 의미인지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유월절 어린양으로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물과 피”를 쏟아내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예수님이 지신 그 십자가를 본받아 오늘날 기독교인들도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예수님이 주신 “비유의 말씀”에서 죽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실제 그 육체가 죽임을 당했으나 하나님의 백성들인 기독교인들에게 부탁하신 십자가의 뜻은 기독교인들의 육체가 실제 죽어야 함을 뜻함이 아니고, 기독교에서 받은 거짓된 “신학”의 말씀으로 지어진 거짓된 육체의 성전을 헐어버리라는 깊은 내용의 말씀입니다. 2000년 전 예수님께서 유대종교 지도자들에게 46년 된 예루살렘 성전을 가리키며 저 성전을 헐면 3일 만에 다시 짓는다고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2:19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전을 가리키며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3일 동안에 일으키리라 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 건물을 헐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 안에 “비 진리”로 잘못 지어놓은 성전을 헐어버리라는 것을 “비유”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성전이나 오늘날 교회는 사람의 손으로 건축해 놓은 건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백성들 안에 건축한 영적인 성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받고 액면 그대로 그 말씀대로 살면 영생인 줄 알았으나, 그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오히려 예수님이 주신 “비유”의 말씀에서 반드시 옛사람이 죽어야 부활을 받는 영생이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육체로 죽고 육체로 부활하셨으나 그것은 “비유”일 뿐이고 “비유”이기 때문에 오늘날 기독교인들에겐 영적으로 죽고영적으로 부활하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육체로 죽고 육체로 부활을 하셨으나, 오늘날 기독교인들에게는 그것이 영적으로 죽고 영적으로 부활됨을 반드시 명심해야 합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이 주신 말씀에서 죽고, 다시 예수님이 주신 말씀에서 부활하여 영생하라는 뜻입니다. 죽어야 부활이 있는 것이고 죽지 아니하면 부활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주신 말씀에서 죽고 예수님이 주신 말씀에서 부활하는 것이 영적 죽음이요, 영적 부활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몸체를 이루는 “살과 피와 뼈”가 모두 동일하게 “말씀”을 뜻합니다. “살과 피와 뼈”는 “비유”이고 “말씀”은 본질입니다.
그러면 “뼈”는 무엇을 “비유”하는가? 예수께서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라”고 했을 때 “물”도 말씀이요 “성령”도 말씀입니다. 그럼에도 여기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라는 것은 “물”은 하위개념이고 “성령”은 상위개념임을 누구나 알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몸체를 구성한 “살과 피와 뼈”등에서 유독 “뼈”를 꺾지 않고 손상을 입히지 않는다는 기록에서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의 “뼈”야 말로 가장 상위개념의 말씀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살”은 “애급”기독교에서 먹는 말씀이고 “피”는 기독교에서 탈출 “출 애급”한 “광야”교인들이 먹는 말씀이고 “뼈”는 “가나안”에 입성한 자들이 “실존예수”에게 직접 받아먹는 “생명의 말씀”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이 “비유”로 가지고 오신 동일한 말씀을 뜻하는 “살과 피”는 하위 개념의 말씀이라면 “뼈”라고 하는 말씀은 상위개념의 말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창세기의 아담이 갈비뼈로 만든 “산자의 어미 하와” 오늘날의 “실존예수님”의 “살 중에 살과 뼈 중에 뼈”가 생명의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죽으실 때 “물과 피”를 쏟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비유” 속에는 반드시 깊이 감춰진 본질의 말씀이 있기 때문에 그 진리의 말씀을 일컬어 “꺾이지 않아야 할 뼈 중에 뼈”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비유”의 말씀에서 옛사람이 죽는 것이고, 그로부터 다시 부활하는 것은 “비유” 속에 감춰진 진리의 “새 말씀”으로 새사람으로 부활하는 것이 됩니다. 즉 예수님의 말씀이란 반드시 옛사람은 죽어야 그 안에는 반드시 “새사람”으로 다시 살게 되는 진리의 말씀이 감춰져 있다는 뜻에서 꺾으면 안 되는 “뼈 중에 뼈”가 있다고 한 것입니다. “뼈”란 몸 전체를 받쳐 주는 핵심 골격이 아니던가? 다시 말해 죽음을 위해 영생이 있음이 아니고 영생을 위해 죽음이 먼저 있어야 하는 것이고, 본질을 살리는 것이기 때문에 먼저는 사망이요, 나중은 영생입니다.
(원문 출처:새사람 블로그) 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