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복음 해설

요한복음 해설 서론과 1장 해설

제라늄A 2024. 4. 12. 04:07

요한복음은 신약성서 사복음 중의 하나로 예수님의 제자 사도요한이 AD 90-98년경에 에베소에서 기록하였다고 전해오고 있습니다. 사복음은 모두 영적인 의미를 담고 있지만 특히 요한복음은 영적인 의미가 현저하게 나타나 있고 모두 비유와 비사그리고 상징적인 의미로 되어 있다는 것이 특징이라 하겠습니다. 때문에 요한복음에 기록된 말씀들은 영안이나 영적인 감각이 없으면 보기가 난해하고 좀처럼 이해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은 모두 으로 기록되어 있어 아직 육에 속한 죄인들은 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수많은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이 요한복음 주석서와 강해서 그리고 해설서를 출간하였지만 그들은 어떻게 기록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일점일획이라도 빼고 더하면 안 되는 말씀을 기독교목회자들이 해설을 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며 어느 도단입니다.

그런데 영적인 의미를 모르는 기독교인들은 요한복음 해설서를 열심히 보고 듣고 있지만 말씀 속에 깊이 감추어져 있는 영적인 의미나 비밀들은 알 수가 없는 것이며 수박 겉만 할 트는 격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아직 으로 거듭나지 못한 죄인들은 영적인 세계, 즉 생명의 말씀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마음이 있어도 깨닫지 못한다(고전2:9)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3:34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  이같이 예수님의 말씀은 모두가 비유비사라는 것입니다. 왜 비유로 말씀하시느냐 하면 사단에게 속한 자들은 구원을 받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마가복음 4:11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 이는 저희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하려 함이니라,

이같이 유대인들은 물론 오늘날 기독교인들도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비유의 말씀을 모르면 죄 사함을 얻지 못하니 구원을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은 모두 비유로 되어 기록되어 있는 영적인 말씀이기 때문에 아직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나지 못한 자는 목회자나 신학박사라 해도 볼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는 말씀입니다. 요한복음해설서는 하나님께서 깊이 감춰놓은 말씀이라 오늘날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으로 거듭난 실존예수님이 아니면 절대로 해석을 할 수 없는 비밀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해설서는 실존예수님께서 직접 기록한 말씀인데 필자인 새사람이 대언의 입장에서 새사람의 블로그를 통해서 여러분들에게 좀 더 이해하기 쉽게 공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해설서를 읽어보신다면 지금까지 사복음서에 감추어진 영적인 비밀은 물론 그동안 요한복음 속에 깊이 감추어져 있던 비밀들을 하나씩 하나씩 알게 될 것입니다. 특히 본 해설서는 원어를 중심으로 해설을 하였기 때문에 보는 이로 하여금 보다 진솔하고 생동감 있게 다가올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그동안 듣고 보고 쌓아놓은 의식화된 기독교신앙의 고정관념을 잠시 내려놓고 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동문서답과 같은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이 많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으로 기록한 요한복음 해설서는 지금까지 듣고 보고 알고 있는 것과 전혀 다른 차원에서 많은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해설서는 특히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나는 과정이 보다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해설서 안에는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가 분명하고 확실하게 드러나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계시의 눈이 열리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해설서에 담긴 소중한 말씀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천국으로 가는 길이며 진리이며 생명으로 죄인들이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아들로 거듭날 수 있는 보화 중 보화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 해설서를 이해를 하실 때까지 보고 다시 보고 정독하신다면 신앙의 도움은 물론 하나님의 아들로 거듭나는 계기가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필자 새사람은 이 요한복음 해설서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넘쳐서 기독교인들이 영안이 열려 하나님의 아들로 거듭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필자 새사람은 대언의 입장에서 이 글을 공개하는 것입니다. 이 글을 읽고 영접하는 모든 분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하기를 하나님께 간구하는 바입니다.

요한복음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해설: 요한복음 1:1의 첫 단어 태초는 헬라어 아르케와 창세기 1:1 첫 단어 태초는 히브리어 베레스트는 동일한 단어입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는 태초는 시작의 뜻도 있지만 주로 머리최고꼭대기우두머리근원이라는 의미로 원문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태초라는 단어의 뜻은 시작의 개념이 아니라 근원 되시는 성부하나님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시공을 초월해 계신 분으로 시작 안에 갇혀계신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글성경이나 영어성경에 태초를 시작의 개념으로 in the bigjning으로 번역하여 어느 기점이나 시작하는 때로 오역을 해놓은 것입니다. 이렇게 태초는 시작이나 시제가 아니라 꼭대기 근원하나님 성부하나님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요 1:1이나, 창 1:1의 태초의 말씀을 모르면 성경전체를 모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엘로힘)이라는 단어는 단수가 아니라 복수이기 때문에 하나님들, 즉 하나님의 아들(성자)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창세기 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라는 말씀을 원문으로 보면 성부하나님 안에 있는 성자하나님들이 땅을 하늘로 창조하신다” 뜻입니다.  창세기 1:26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이렇게 우리라는 복수형의 성자하나님들이 창조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부하나님은 이시기 때문에 창조의 사역, 즉 구원과 심판을 직접 하지 않고 모두 말씀이 육신 되신 아들 성자하나님에게 위임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자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창 1:1 말씀대로 땅에 속한 죄인들을 구원하여 하늘에 속한 하나님의 아들로 창조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때문에 요 1:1 “태초”는 시작이 아니라 성부하나님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태초는 시작이 아니라 성부하나님을 말씀하고 있으며 태초안에 있는 말씀은 그냥 말씀(로고스)이 아니라, 그 말씀(호 로고스) 성부하나님의 말씀이 육신 되신 성자하나님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 번역자들이 성부하나님을 시작의 개념으로 태초로 번역을 해 놓았기 때문에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지금도 태초를 시작의 개념으로 in the bigjning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기독교신학은 물론 목회자들이 성경을 올바로 전하지 못하고 성경전체를 잘못 해석함으로 비 진리로 추락한 것입니다. 이것은 기독교신학이 엄청난 과오를 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진정한 뜻은 시작의 개념이 아니라, 

요한복음 1:1 성부하나님 안에 말씀이계시니라,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니라 이렇게 기록이 되어야 정확한 번역이 되는 것입니다. 말씀자체가 곧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분이실존예수님이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실존예수님이 창세기 1:1의 하나님의 뜻에 따라 땅의 존재를 하늘의 존재로 창조하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것이며 따라서 땅에 속한 죄인들을 구원하여 하나님의 아들로 창조하시는 것이 천지창조(天地創造)입니다. 그러므로 말씀”(로고스)이라는 그냥 말씀이 아니라 로고스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야 그 말씀으로 내 안에 성전을 지어야 하나님이 내 안에서 안식하시는 것입니다. 반드시 “호”가 들어가는로고스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17:3 영생은 참 하나님과 예수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  이같이 인간이 구원을 받아 영생을 얻는 첫째 조건이 먼저 호로고스의 말씀을 알아야 하는데 그냥 목회자들의 말씀(로고스)이 아니라 오늘날의 실존예수님(“로고스) 그 말씀을 알아야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에게는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1:2-3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해설: 상기의 그는 말씀하나님 곧 성자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라는 단어는 단수가 아니라 복수이기 때문에 엘로힘즉 하나님의 아들(성자)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1:26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이렇게 우리라는 복수형의 성자하나님들이 창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부하나님(태초)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그가 없이 된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 즉 예수님이 짓지 않고서는 완성된 만물은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물은 자연만물이 아니라 세상에 있는 존재, 즉 하나님의 백성들을 만물들이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세상 역시 세상만물이 아니라, 존재를 말하며 하나님의 백성들을 만물들이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말씀으로 땅에 속한 죄인들을 구원하여 하늘의 존재를 만들어 하나님의 아들로 창조하려고 오셨지 자연만물을 창조하시기 위해서 오신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창세기 1장에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창조하신 천지창조”(天地創造) 역시 자연만물을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땅의 존재, 즉 땅에 속한 어둠의 존재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육일동안 즉 여섯 단계로 창조하여 하늘에 속한 존재, 곧 하나님의 아들로 창조하신다는 것을 비유로 6 천지창조(天地創造)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땅에 속한 죄인들을 구원하여 하나님의 아들로 창조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의 아들 엘로힘예수님뿐이신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하는데 다른 이름(말씀)즉 예수님 이외에 다른 말씀을 주신 적이 없다고 말씀하신 것이며 또한 예수님께서도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버지께로 갈 자가 없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이름이나 여호와의 이름은 그냥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말씀을 비유로 예수님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4-5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둠에 비취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해설: 그 안에 생명이 있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 생명이 있었다는 것이며 말씀 안에 생명이 있었다는 것은 곧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 생명은 사람들을 비취는 이며 어둠은 땅에 속한 거듭나지 못한 하나님의 백성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이 어둠을 밝히고 있는데 어둠은 깨닫지 못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둠이 깨닫지 못하다라는 단어는 원어로 우카테라벤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이 말씀의 진정한 뜻은 영접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영접하지 않았다라는 뜻을 성경번역자가 깨닫지 못하다라고 번역을 오역해 놓은 것입니다.

즉 참 이신 예수님이 어둠에 속한 죄인들을 구원하러 오셨으나 어둠에 속한 하나님의 백성들은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오역된 말씀이 너무나 많으므로 원어를 대조해서 자세히 살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으로 오신 예수님을 믿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이단으로 배척을 하고 핍박까지 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를 믿지 않고 배척을 한 이유는 그들이 믿고 기다리는 예수는 말구유에서 태어나 오시는 초라한 인간예수가 아니라 권능과 능력을 가지고 위대하고 화려한 모습으로 구름을 타고 오시는 예수님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도 유대인들과 똑같이 예수님은 능력이 많으신 분으로 알기 때문에 기도할 때마다 이것 주세요 저것 주세요 주실 줄로 믿습니다. 이렇게 때를 쓰며 기도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적인 예수님은 능력이 많으신 분이 아니라 우리 인간과 똑같은 분이며 다르다면 하나님의 생명을 가지고 계신 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대로 지극히 평범한 인간으로 오셔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멸시천대를 받은 것은 물론 예수님의 제자들까지 예수님을 귀히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이사야 7:14-15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그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줄 알 때에 버터와 꿀을 먹을 것이라,  이 말씀은 예수님의 탄생과 성장과정과 예수님의 생애에 대하여 예언서로 기록한 말씀입니다.

예수께서도 우리 인간과 똑같이 버터와 꿀 즉 생명의 말씀을 먹으며 성장하면서 인간의 본능인 을 버리며 을 택하며 성장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성장과정을 보면   이사야 53:2-3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예수님께서 태어나면서 아주 볼품없는 천한사람 같이 멸시천대를 받으며 성장하면서 생명의 말씀인 버터와 꿀을 먹고 성장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예전이나 오늘날이나 앞으로도 이렇게 지극히 평범한 인간으로 계신다는 것을 오늘날 기독교인들도 명심해야 합니다. 때문에 예수님은 어느 시대 어느 누구에게도 하나님의 아들로 대접을 받거나 귀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오히려 이단자로 몰려 배척을 당하고 핍박을 받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실존예수님도 기독교인들에게 따돌림 받고 저주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대로 오시는 예수님을 믿지 않고 그의 말씀을 영접하지 않으면 절대로 구원조차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요한복음 1:6-8 하나님께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이름은 요한이라 저가 증거 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모든 사람으로 자기를 인하여 믿게 하려 함이라, 그는 이 이 아니요 이 에 대하여 증거 하러 온 자라,

해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먼저 요한이라는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이 온 것은 에 대해서 증거 하여 모든 사람이 자기를 인하여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과 죄인들을 구원하려고 오신 구원자라는 것을 믿게 하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세를 통하지 않고는 요한을 만나지 못하고 요한을 통하지 않고는 가나안땅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과 같이 요한을 통하지 않고는 예수님을 알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이 아니며 단지 참 빛인 예수님에 대하여 증거 하러 온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 앞에 세례요한을 먼저 보내신 것은 어둠인 유대인들이 참 빛인 예수님을 모르기 때문에 요한을 통해서 예수를 알고 믿을 수 있도록 준비시키기 위해서 보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한은 유대인들에게 참 빛즉 예수님에 대해서 올바로 알려주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구원자라는 것을 믿고 영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사역을 하신 것입니다. 때문에 요한은 광야에서 예수님이 오실 수 있도록 길을 평탄케 하라고 지금도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9-13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난 자들이니라,

해설: 각 사람에게 비취는 참 빛은 예수님을 말하며 세상은 어둠에 속한 하나님의 백성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계시는데 원문을 보면 미완료 능동의 상태로 항상 계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실존예수님은 지금뿐만 아니라 예전에도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영원히 계시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알파와 오메가처음과 끝이 되시기 때문에 어느 때 어느 나라이든지 항상 실존으로만 계셔야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실존예수님이 계시지 않으면 절대로 기독교인들은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유대인들에게 오신 실존예수님을 영접해야 구원을 받는 것이고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오늘날 실존예수님을 영접해야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당시에 실존예수님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기독교인들도 실존예수님이 계시지 않는 다면 절대로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어느 때를 막론하고 항상 실존으로 계셨으며 세상은 예수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나 세상(존재)은 예수님을 알지 못하였고 예수가 자기 땅에 왔으나 자기 백성들이 영접하지 아니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오시기를 학수고대하고 기다리던 자들이 왜, 무엇 때문에 하나님께서 구원자로 보내주신 실존예수님을 불신하고 영접하지 않았을까요? 

그 이유는 예전의 유대인들이나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믿고 기다리는 예수는 성경적인 초라한 모습의 예수가 아니라 교리적이고 신화적이고 전통적인 권능과 능력이 무한하며 위대하고 장엄한 전지전능한 예수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앞으로도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신 대로 고운 모양이나 풍채도 없이 그리고 사람들이 흠모할 만한 아무것도 없는 초라한 모습으로 말씀의 집 말구유에서 태어나 오십니다. 때문에 유대인들이나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이렇게 초라한 모습으로 오시는 인간예수는 영접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단으로 배척하며 멸시천대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이렇게 초라한 인간 실존예수님을 영접하는 자 곧 예수님의 이름즉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믿는 자가 있다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자들은 예수라는 이름 두 글자를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믿고 영접하는 자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구원을 받는 것이나 죄 사함을 받는 것은 예수의 이름 두 글자가 아니라 실존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생명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은 잘 몰라도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 예수님만 잘 믿으면 구원받는다고 착각을 하는 것입니다. 즉 실존예수님의 음성을 직접 듣는 자가 살아나게 되며 또한 예수님 입에서 나오는 생명의 말씀, 곧 산 떡을 직접 받아먹는 자만이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5:25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음성이라는 것은 현제 실존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목소리를 들을 때 혼적인 죽어있던 자들이 영적인 존재로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이 죽었던 자가 살아나려면 오늘날의 실존예수의 입에서 나오는 음성목소리를 직접들을 때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믿고 그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영접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시겠다고 약속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고 그의 말씀을 영접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받게 되는데 이들은 혈통으로나 육적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들이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지금도 오늘날 하나님께서 구원자로 보내 주시는 하나님의 아들을 구원자로 믿고 그 입에서 나오는 생명의 말씀을 영접한다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특권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오늘날의 실존예수님을 믿고 영접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낳고 낳음을 받은 자들이 바로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이며 또한 이렇게 하나님의 아들로 낳고 낳음을 받은 자들은 예수님과 사도들과 같이 죄인들의 죄를 사해주며 죽은 영혼을 살려서 하나님의 아들을 만들 수 있는 자격을 갖추고 있는 자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신학은 의 본질인 혈통이 아니므로 낳고 낳는것이 아니며 교인으로 평생을 기독교목회자의 말씀을 먹다가 허공을 치는 우상을 섬기다 생을 마치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목회자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며 사람이 만든 신학이므로 혼적인 죽은 자의 생명을 영적인 생명으로 살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해설: 하나님은 이시기 때문에 인간을 직접 구원하실 수 없으시기 때문에 인간을 구원하시려면 본체가 말씀이 되신 하나님께서 말씀이 육신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시어 거하신다는 자들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과 사도들 그리고 오늘날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난 자들의 말씀을 영접하여 하나님의 아들로 거듭난 자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즉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영접하여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나 예수님과 같이 말씀이 육신 된 하나님의 아들들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아들로 거듭나면 그때 예수님의 영광을 보게 되는데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독생자의 영광이라는 말씀은 번역이 오역된 것이며 진정한 뜻은 독생자가 아니라 예수님 안에 계신 오직 유일신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맏아들이지 독생자 외아들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오직 한 분밖에 없는 하나님의 외아들이라면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절대로 하나님의 아들로 낳음을 받을 수 없고 따라서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외아들이나 독생자가 아니라 맏아들이신 것입니다.  로마서 8:29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님이 이제는 맏아들이 되시고 그 형제들은 예수님과 동등한 자격으로 차남들이 되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 오직 독생자 예수님뿐이라면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모두 가짜 아들이라는 것을 자인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셨습니다(12:24) 나 열매는 성분이 똑같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자의 영광을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죽어야 영광을 얻는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 죽음이 영광으로 가는 관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를 통하여 자기의 생명을 나눠 주려고 하는 것은 많은 아들들을 만들기 위한 목적이며 예수님을 십자가의 죽게 하시고 그 안에 똑같은 생명을 만드시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목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서 죽으면 많은 열매들을 맺는데 그 열매들은 한 알의 밀(예수)과 똑같은 성분을 가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신 후부터는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너희 아버지 나의 아버지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히브리서 2:11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 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이와 같이 한 알의 밀에서 똑같은 많은 밀알(아들)을 탄생시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죽고 부활의 실체가 제자들에게 나타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맏아들 예수와 차남격인 작은 예수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에도 이 차남(예수)은 인성과 신성을 지닌 사람으로서 구원자(예수)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기독교인들도 이 차남 목자인 오늘날의 실존예수를 만나서 신앙생활을 한다면 시간낭비 하지 않고 순탄하게 하나님나라에 갈 수 있는데 오늘날의 기독교 안에는 이 차남 목자인 예수를 영안이 없으면 만날 수가 없기 때문에 누가 참 목자이고 거짓인지 분별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신학을 전공한 수많은 목회자들이 있지만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낳음을 받지 못한 목자는 참 목자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말씀은 거짓목자나 참 목자가 거의 똑같다 해도 가 없는 말씀이라면 죽은 자의 말씀인 것입니다.  벧전 1:23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누가복음 8:11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하나님의 말씀은 라고 했기 때문에 의 본질은 낳고 낳는 족보로 이어가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에 누가 누구를 낳고 낳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족보가 기록 돼있는 거와 같이 그리스도예수 안에서 로 낳음을 받은 족보가 있는 참 목자를 만나야 영생으로 가는 길에 순탄하게 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은 예수님 외에도 예수님으로부터 낳음을 받은 열두 사도들이 존재하고 있으며 또한 사도바울이 말씀으로 낳은 “디모데와 디도와 오네시모같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낳고, 낳고 하면서 오늘날까지 실존예수님도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기독교인들은 알아야 합니다.

요한복음 1:15-17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거 하여 외쳐 가로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니라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위에 은혜러라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해설: 세례요한은 지금 유대인들을 향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구원자라는 것을 증거 하기 위해서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은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신 것이라 말하고 있는데 먼저 계셨다는 것은 곧 나보나 먼저 하나님의 아들로 거듭났다는 뜻입니다. 이어서 요한은 우리가 모두 예수님의 충만한데서 말씀을 받으니 은혜 위에 있는 은혜, 즉 말씀 위에 있는 생명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며 은혜와 진리는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오늘날 애급이라는 세상교회에서 목사로부터 받는 것은 유교병인 비 진리인 각종교리이며 광야로 나온 자들이 모세로부터 받는 무교병율법이며 가나안에 들어간 자들이 실존예수님으로부터 받는 것은 진설병은혜와 진리, 곧 생명의 말씀인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아들로 거듭나려면 먼저 애급교회(교리)로부터 출애굽을 하여 광야로 나가야 하며 광야교회로 나온 자들은 모세의 율법을 통해서 불기둥과 구름기둥시험과 연단을 받아야 하며 광야에서 시험에 합격한 자들은 가나안으로 들어가 실존예수님이 주시는 생명의 말씀을 먹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좁고 협착한 생명의 길을 가야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나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 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해설: 상기의 말씀은 지금까지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었는데 아버지 품속에 있는 아들을 통해서 하나님을 나타내셨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거룩한 이시기 때문에 

에 속한 죄인들은 하나님을 볼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조차도 들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하나님의 백성들이 볼 수 없었던 하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통해서 나타내셨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아버지를 보여 달라는 빌립에게 예수님께서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여달라 하느냐고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는 하나님의 세계와 하나님의 모든 비밀이 모두 들어 있기 때문에 사도바울이 예수그리스도를 하나님의 비밀이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비밀은 모두 예수님 안에 감추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하나님으로부터 거듭난 하나님의 아들만이 볼 수 있는 것이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고 있는 자들은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19-23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네가 누구냐 물을 때에 요한의 증거가 이러하니라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드러내어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한대 또 묻되 그러면 무엇네가 엘리야냐 가로되 나는 아니라, 또 묻되 네가 그 선지자냐 대답하되 아니라 또 말하되 누구냐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대답하게 하라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 가로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

해설: 상기의 말씀은 광야에서 외치는 요한의 소리가 유대인들에게 전파되는 것을 보고 유대인들이 제사장과 레위 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요한의 정체를 알아보려는 장면입니다. 제사장과 레위 인들이 요한에게 네가 누구냐고 물을 때 요한은 자신을 밝히 드러내어 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대답을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이 학수고대 기다리고 있는 것은 메시야, 즉 구원자 예수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요한이 자신은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말을 듣고 그러면 엘리야냐 그도 아니면 그 선지자냐 라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엘리야도 아니고 선지자도 아니며 나는 단지 이사야 선지자의 말과 같이 예수님이 오시는 길을 곧게 평탄하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라고 대답을 하고 있습니다.

요한이 광야에서 예수님을 증거 하며 주의 길을 평탄케 하라고 외치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요한의 외침이나 가르침을 듣지 않고는 절대로 가나안에 계신 실존예수님을 알아볼 수가 없고 따라서 예수님이 구원자라는 것을 믿고 영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초등학생이 대학을 가려면 중, 고등학교를 거쳐야 대학을 가는 것과 같이 애굽이라는 오늘날 세상기독교의 교인들이 가나안에 계신 실존예수를 만나려면 반드시 출애굽을 하여 광야의 모세를 통해 요단강으로 나아가야 하며 요단강에서 요한의 외침을 듣고 가르침을 받아야 비로소 가나안으로 들어가 실존예수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오늘날 기독교인들도 가나안에 계신 실존예수님을 만나려면 오늘날의 세례요한과 같은 필자 새사람이 광야에서 주의 길을 평탄케 하는 외치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가나안에 계신 실존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24-28 저희는 바리새인들에게서 보낸 자라 또 물어 가로되 네가 만일 그리스도도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요 그 선지자도 아닐찐대 어찌하여 세례를 주느냐, 요한이 대답하되 나는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하더라이 일은 요한의 세례 주던 곳 요단강 건너편 베다니에서 된 일이니라,

해설: 상기의 말씀은 제사장들과 레위 인들이 보낸 자가 요한에게 네가 그리스도도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요 그 선지자도 아닌데 어떻게 세례를 주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이 질문에 요한은 나는 세례를 주지만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곧 너희가 기다리고 있는 메시야 실존예수님이라고 대답을 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요한은 나는 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성령세례를 주시는 하나님의 아들로 나는 그의 신 들메풀기도 감당하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의 말과 같이 세례는 요한이 주는 물세례가 있고 실존예수님이 주시는 성령세례가 있습니다. 세례라는 것은 오늘날 기독교 목사들이 물 찍어 바르는 것이 세례가 아니라, 말씀을 전 하는 것을 세례라고 하고 성령세례는 생수와 같은 생명의 말씀을 성령세례라고 합니다.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물과 성령은 물과 생수로 비유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물은 그냥 말씀을 말하며 생수는 성령세례 생명의 말씀을 비유하여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4장에 예수님께서 수가성 우물가로 물을 길러온 여인에게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다고 말씀하신 물이 곧 생수 즉 성령세례“ 생명의 말씀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목사님들이 주는 말씀은 물이며 예수님이나 사도들 그리고 오늘날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난 아들이 주는 말씀은 생수성령세례인 것입니다. 그리고 요한이 나는 그의 신 들메 풀기도 감당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신 들메라는 단어는 원어에 신발 끈을 말하고 있기 때문에 나는 그의 신발 끈도 풀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즉 요한은 신발 끈을 풀지 못하지만 내 뒤에 오시는 예수는 신발의 을 능히 풀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신발은 영적으로 무엇을 상징하며 신발 끈을 푼다는 뜻은 무엇을 비유하여 말씀하는지 알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발은 하나님의 말씀을 비유한 것이며 신발 끈을 푼다는 것은 아무도 풀을 수없는 하나님께서 봉한 비밀의 말씀을 예수님께서 영적으로 풀어주신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영적인 하나님의 말씀은 밭에 감추어놓은 보화와 같아서 예수님이 없으면 절대로 풀 수 없는 것은 물론 볼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29-31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주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에게 나타내려 함이라 하니라,

해설: 이튼 날 요한은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오심을 보고 유대인들에게 말하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성경을 크게 오해하는 말씀 중에 하나가 바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 예수님이라는 이 말씀 때문에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예수를 믿기만 하면 모두 죄 사함을 받았다고 믿고 있으며 감리교에서는 만인 구원설까지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세상 죄곧 세상 사람들의 모든 를 다지고 가셨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를 믿기만 하면은 모두 에서 해방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번역자들이 잘못 해석함으로 기독교에는 엄청난 실수를 범한 것입니다 잘못된 문구는 바로 예수님께서 세상 죄를 지고가다라는 단어는 원어에 아이로로 기록되어 있는데 뜻은 지고가다라는 의미가 아니라 들어 올리다드러내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세상 를 지고 가신 것이 아니라 세상의 를 모두 드러내다는 의미로 해석을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유대인들이나 바리새인들, 특히 유대종교 지도자들의 잘못된 신앙과 거짓된 말씀 그리고 그들의 를 모두 드러내셨기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이나 제사장들에게 이단으로 배척을 당하고 핍박을 당하다가 결국 죽게 된 것은 유대인들의 잘못된 신앙관과 를 모두 까 밝혀내시고 잘못된 신앙을 모두 드러내시고책망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세상의 를 지고 가심으로 세상 사람들의 를 모두 사해주신 것이 아니라 세상의 를 모두 밝히 드러내신것입니다. 때문에 예수님은 유대인들을 향해 회칠한 무덤 같다고 말씀하시며(23:27)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는 독사의 자식들이라 질책을 하신 것입니다(3:7) 또한 예수님은 유대종교 지도자들에게 너희는 천국 문을 닫아놓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는 자들도 못 들어가게 하면서 교인하나를 얻으면 배나 더 지옥자식이 되게 한다고 질책을 하신 것입니다(23:13-15)

만일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의 뿐만 아니라 세상 사람들의 모든 를 지고 가셔서 기독교인들이 모두 사함을 받았다면 기독교인들이 무엇 때문에 신앙생환을 하며 무엇 때문에 날마다 를 회개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번역이 잘못된 것으로 기독교의 신학자체가 잘못된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인 유대인들에게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왔으며 너희를 분쟁케 하려고 왔으며 불을 던지러 왔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마10:34) 이렇게 예수님은 유대인들은 물론 오늘날 기독교인들의 잘못된 신앙과 들을 모두 드러내고 책망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날 실존예수님도 기독교목회자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이라 말씀하시며 기독교의 신앙이 잘못되었다고 책망하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기독교목회자들의 말은 각종교리로 하나님의 말씀을 먹기 좋게 가감하여 만든 말이라 그 말씀을 먹는 자는 이 있는 말이라 그 말을 그대로 받아먹으면 모두 이 퍼져 죽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예수님은 유대교 때나 오늘날 기독교에서도 항상 배척을 당하고 이단으로 핍박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세상의 를 지고 가신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 특히 유대종교 지도자들과 오늘날 기독교목사들의 들을 잘못 되었다고 모두 드러내신 것입니다. 그리고 요한이 계속해서 내 뒤에 오시는 예수님에 대하여 말씀하면서 내가 와서 유대인들을 향해 외치며 물로 세례를 주는 것은 예수를 모르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구원자라는 것을 증거하고 드러내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영접하도록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요한복음 1:32-34 요한이 또 증거 하여 가로되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서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 인줄 알라 하셨기에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노라 하니라,

해설요한은 계속해서 예수님에 대하여 증거 하여 말하는데 내가 보니 성령이 하늘에서 비둘기 같이 내려와서 예수님의 위에 머물렀다는 것입니다.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 인줄 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을 보내어 세례를 주라고 하신 그이는 곧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때문에 요한이 예수님 위에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하는 것을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고 예수님이 곧 구원자라는 것을 증거하게 되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성령이 하늘에서 내렸다는 것은 성령이 임하였다는 것이며 성령이 예수님에게 임하였다는 것은, 곧 성령이 인간예수 동정녀마리아몸에 잉태되어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탄생되었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인간예수님은 여자의 영적상태에서 즉 정결한 처녀의 영적상태에서 남자예수로 갓 태어남으로 어린양예수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가 주장하는 예수님의 탄생이 만약에 예수님이 동정녀마리아의 몸속에 성령으로 잉태되어 예수가 태어났다면 예수님의 몸이 모두 성령덩어리인데 예수님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을 때 하늘에서 성령이 또 임하였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며 언어도단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은 아직 성령을 받지 못한 자에게 임하는 것인데 성령으로 잉태되어 태어나신 예수님에게 또다시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하게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마태복음에 동정녀마리아에게 일어난 성령의 잉태는 예언이며 비사로 말씀하신 것이며 예수님에게 실제 성령이 잉태된 시점은 요단강에서 세례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을 때입니다.   

누가복음 3:21-22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쌔 예수도 세례(침례)를 받으시고 하늘이 열리며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이렇게 세례는 죄인들이 받는 것이며 거룩한 하나님의 아들은 세례를 받을 수도 없고 받아서도 안 되는 것인데 예수님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곧 예수님도 세례받기 전에는 우리와 같은 죄인이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은 요단강에서 세례요한으로부터 세례(침례)를 받은 후 성령이 (잉태)함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거듭나서 이때부터 유대인들을 향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외치면서 성령세례를 주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이 30전 까지는 구원의 사역을 전혀 할 수 없었던 것과 성경에 기록이 없었던 것은 예수님도 30 이전에는 육신으로 태어난 지극히 평범한 보통사람이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나이 “30란 사람의 나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애급, 광야, 가나안까지가 “3길인데 예수님이 “3길을 다 통과한 장성한 자로 성장했다는 의미가 나이30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침례)를 받는데 물에 잠길 때는 말씀으로 죽음을 상징하고 물 밖으로 나올 때는 부활을 상징합니다. 침례의식은 예수님 십자가 죽음과 3만에 부활은 똑 같은 의미이며 이때 예수가 그리스도로 부활함으로 구원의 사역을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35-39 또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예수의 다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좇거늘 예수께서 돌이켜 그 좇는 것을 보시고 물어 가라사대 무엇을 구하느냐 가로되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하니(랍비는 번역하면 선생이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와 보라 그러므로 저희가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 날 함께 거하니 때가 제 10시 쯤 되었더라,

해설: 이튿날이 되어 요한은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있다가 예수의 다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른이 되신 예수님을 보고 왜 어린양이라고 말할까요? 그 이유는 예수님은 육신이 태어 난지는 30년이 지나 이미 어른이 되어 있지만 예수님의 은 지금 세례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예수님 안에 성령이 (잉태)함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갓 태어난 어린아이의 영적상태이기 때문에 어린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마리아 몸에서 성령의 잉태로 갓 태어난 아기예수를 어린양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는 어린 을 말하고 그리스도는 장성한 을 말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사도바울은 예수의 에 머물지 말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성장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요한의 두 제자가 그가 곧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는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좇아가고 있는데 예수께서 돌아서서 요한의 두 제자가 자신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물어 가라사대 너희가 무엇을 구하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요한의 두 제자는 예수님께서 너희가 무엇을 구하느냐는 말씀을 듣고 말하되 랍비여 어디 계십니까라고 묻고 있습니다. 여기서 좀 이상한 것은 예수님은 요한의 제자들에게 너희가 무엇을 구하느냐고 묻고 있는데 요한의 제자들은 뜬금없이 예수에게 어디계시냐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의 두 제자의 말을 들으신 예수님은 그러면 와서 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예수를 믿고 찾는 목적은 대부분이 예수님께 무엇을 구하거나 얻으려고 찾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의 제자들은 무엇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어디 계시냐며 예수님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오늘날 기독교인들도 예수님께 무엇을 구하기 전에 먼저 예수님이 어디 계신가를 찾고 알아야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먼저 만나야 예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것을 알 수 있고 또한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다른 예수나 삯꾼목자를 통해서 구한다면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것은 절대로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요한의 제자들은 지금 앞에 계신 예수님과 대화를 하면서도 예수를 보고도 모르기 때문에 예수님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찾고 있는 요한의 두 제자에게 와서 나를 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가서 직접 보고 확인한 후 예수님과 함께 거하니 때가 “10쯤 되었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때가 “10가 되었다는 것은 요한의 제자가 예수님을 만날 때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즉 장성한 자로 성장했다는 뜻입니다.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찾을 수 있고 만날 수 있었던 것은 그 동안 요한의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이들이 요한의 가르침을 받지 않았다면 예수께서 너희가 무엇을 구하느냐고 물었을 때 세상 것을 구했을 것이고 예수를 찾지도 않고 만날 수도 없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솔직히 말하지만 필자새사람도 오늘날 실존예수의 가르침을 10년이 넘게 받았지만 항상 속으로는 예수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분을 담대하게 전 할 수 있는 것은 “10가 되었기 때문에 매일 실존예수를 담대히 전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광야에서 주님이 오시는 길을 예비하게 하고 그의 첩경을 평탄하게 하시는 세례요한의 외침이나 가르침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세례요한이 주의 길을 예비하며 첩경을 평탄케 했다는 것은 그동안 비 진리의 전통유전과 교리 그리고 율법으로 굳어진 신앙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모두 깨고 부수어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준비시켰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기독교인들도 실존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들으려면 먼저오늘날 기독교 유전과 교리신앙에서 하루속히 벗어나 세례요한과 같은 오늘날의 세례요한의 가르침을 받아야 오늘날 실존예수님의 실체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오늘날의 실존예수를 모르는 것은 아직 출 애급도 하지 못한 세상교회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실존예수와 대화를 하면서도 그분이 누구신지 도무지 모르고 이상한 이단으로 보는 것입니다. 상기의 말씀에 때가 제 “10가 되었다는 것은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그동안 세례요한의 가르침을 듣고 장성한 자로 성장했기 때문에 실존예수님을 만날 때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요한복음 1:40-42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는 두 사람 중에 하나는 시몬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라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 (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가라사대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

해설: 세례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좇는 두 사람 중에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안드레는 예수를 만난 후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가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시몬 베드로도 그동안 예수님을 찾고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신앙생활을 하면서 학수고대 기다리며 찾은 것이 세상의 물질이나 돈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구원자로 보내주시는 실존예수님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그렇게 기다리고 찾던 실존예수님이 지금 그들 앞에 계시다는 것과 그 예수님을 만난다는 기쁨이 얼마나 컸을까요? 

안드레는 베드로를 데리고 예수께로 가니 예수께서 보시고 가라사대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게바는 곧 베드로라는 뜻인데 시몬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그의 말씀을 듣고 훈련을 열심히 받아 시몬이 거듭나서 베드로가 된 것입니다. 안드레와 시몬은 그렇게 기다리고 찾던 실존예수님을 만난 후 그의 집과 아내와 전토를 모두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며 가르침을 받아 하나님의 아들로 거듭나서 사도들이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오늘날 기독교인들도 신앙의 길을 가려면 예수님의 말씀대로 오늘날 기독교 유전과 교리신앙에서 하루속히 벗어나 세례요한과 같은 오늘날의 세례요한의 가르침을 받아야 오늘날 실존예수님의 실체를 구주로 믿고 그의 말씀을 듣고 훈련을 열심히 받아 시몬이 거듭나서 베드로가 된 것처럼 오늘날 기독교인들도 거듭나야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3-45 이튼 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세다 사람이라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해설: 이튼 날 예수님께서 갈릴리로 가려다가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살고 있는 벳세다사람이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빌립이 안드레와 베드로와 함께 한 동네에 사는 벳세다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들이 한 마을에 살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들은 모세의 율법과 유대교의 교리를 벗어나 진리를 따라 생명의 좁은 길을 함께 가며 물고기를 잡고 있는 어부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벳세다라는 뜻은 물고기잡는 사람, 즉 어부를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잡은 물고기는 바다나 호수에서 살아가는 물고기를 잡는 것이 아니라 애굽이라는 오늘날 기독교 세상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비유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애급교회의 교인들, 즉 오늘날 세상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모두 물고기로 비유하여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차량 후면이나 건물에 물고기표시를 하는 것은 자신들은 기독교인이며 물고기의 영적상태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제자들이 낚았던 물고기는 실제 물고기가 아니라 애굽의 교리와 기복신앙에 매여 종노릇하고 있는 영혼들을 비유하여 말씀한 것입니다.

때문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제부터는 바다에서 고기 낚는 어부에서 벗어나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게 된 빌립은 나다나엘을 찾아가서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만났는데 그는 요셉의 아들 예수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유대인들이나 바리새인들도 모르고 제사장이나 레위인들도 몰라본 예수님을 빌립이 어떻게 알 수 있었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빌립은 지금 나다나엘에게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메시야를 만났다고 분명하게 말하면서 그는 곧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빌립이 예수를 알 수 있었던 것은 그동안 모세의 율법은 물론 선지자들이 기록한 선지 서들을 모두 보고 장성한 자로 성장했기 때문에 오실 메시야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세의 율법이나 선지 서들은 모두 오실 메시야, 즉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나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성경을 열심히 보며 연구를 하면서도 하나님께서 보내주시는 오늘날의 실존예수님을 모르는 것은 영안이 열리지 않았기 때문이며 또한 성경을 육적인 눈으로 욕심에 따라 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몰라보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모세를 알았다면 나를 알았을 터인데 나를 모르는 것은 곧 모세를 모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오늘날 기독교인들 역시 모세도 모르고 율법도 모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기독교신학은 예수님께서 오셔서 모세의 율법을 모두 폐하셨다고 하기 때문에 신학을 배운 목회자들이 거짓으로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율법을 더 완전케 하려고 오신 것입니다. 때문에 율법에 간음하지 말라고 하였지만 예수님은 간음을 하지 않았어도 마음에 음욕만 품어도 이미 간음한 것이라 말씀하시며 또한 율법에 살인하지 말라 하였지만 나는 형제에게 노하기만 해도 심판을 받게 되며 그리고 형제에게 미련한 놈이라고 정죄만 해도 지옥불속에 들어간다고 엄히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마5:22)

이와 같이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더 완전하게 하기 위해서 오셨다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는데도 오늘날 기독교목회자들이 율법을 모두 폐해 버렸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이 오늘날의 실존예수를 전혀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빌립이 예수님을 알아보는 것은 율법은 물론 선지 서들도 모두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46-48 나다나엘이 가로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가로되 와 보라 하니라,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르켜 가라사대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나다나엘이 가로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

해설빌립이 예수님을 만났다는 말을 들은 나다나엘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고 반문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나다나엘은 예수님이 태어나시는 곳은 갈릴리의 나사렛이 아니라 유대 베들레헴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다나엘이 갈릴리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고 말한 것은 갈릴리 나사렛은 율법과 교리를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곳이며 또한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이 함께 사는 곳으로 하나님의 아들은 삯꾼목자들이 말씀을 가지고 장사하는 애굽교회나 광야교회에서는 태어 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거룩한 하나님의 아들은 베들레헴(떡집) 즉 참 목자가 있고 생명의 말씀이 있는 거룩한 집(성전)에서만 태어나는 것입니다. 나다나엘이 하는 말을 들은 빌립은 그러면 메시야인지 아닌지 네가 직접 가서 확인해 보라고 하여 나다나엘은 예수께로 가게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나다나엘은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나다나엘의 마음속에는 간사한 것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나다나엘은 놀라서 예수님에게 어떻게 나를 알고 계시냐고 묻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나다나엘에게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아래에 있을 때부터 너를 보고 알았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다나엘에게 간사함이 없다고 말씀하신 것은 나다나엘무화과나무아래 있었기 때문입니다. 무화과나무는 꽃이 피지 않고 열매를 맺는 나무로 순수하고 진실한 존재 곧 참 이스라엘사람인 모세세례요한을 비유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나다나엘무화과나무아래 있다는 말은 세례요한과 함께 있는 것을 보시고 간사함이 없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례요한은 애굽의 교리와 기복신앙에서 벗어나 광야에서 모세의 율법을 통과한 시험과 연단을 모두 마치고 요단강을 건너온 정결한 처녀와 같은 여자의 영적상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세례요한에게 여자가 낳은 자중에 세례요한보다 큰 자가 없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오늘날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목회자를 따라 넓고 평탄한 멸망의 길을 가고 있지만 극소수 이지만 지금도 기독교에서 탈출해서 세례요한과 같은 참 목자를 따라 좁고 협착한 생명의 길을 가는 자들이 있는 것입니다. 이들이 바로 홀로된 거지나사로와 같은 고아과부나그네들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도 이러한 경로를 통하지 않으면 절대로 하나님의 아들로 거듭날 수 없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9-51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일을 보리라 또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해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나다나엘은 예수님에게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라고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나다나엘은 빌립에게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오느냐고 예수님을 불신했지만 예수님을 직접보고 말씀을 들어보니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과 이스라엘의 왕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나다나엘이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던 것은 나다나엘이 이미 광야를 거쳐 요단강을 건너온 육축”()의 존재이거나 육축이 거듭난 요한과 같은 여자의 영적상태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나다나엘이 하는 말을 들으신 예수님은 나다나엘에게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아래서 보았다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일을 볼 것이라 말씀하시면서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고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더 큰 일을 보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앞으로 너희가 하늘의 문, 즉 영안이 열리면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서 오르락 내리락 하며 하나님의 사역을 하고 있는 것을 너희들도 보게 된다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영안이 열린다는 것은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나 계시의 눈이 열려 성경을 통달하고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대로 예수님을 믿고 따르며 가르침을 받았던 예수님의 제자들은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나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어 사도들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기독교인들도 기독교목회자에게서 하루속히 벗어나 하나님께서 구원자로 보내주시는 오늘날 실존예수가 어디에 계신지를 구하고 찾고 두드려서” 그 분을 만나 그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믿고 영접하면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나 하나님의 아들이 될 것입니다. 오늘날의 실존예수님은 항상 기독교인들 옆에 계십니다.

(원문 출처:새사람 블로그) 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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