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2:1-11 사흘 되던 날에 갈릴리 가나에 혼인이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 예수와 그 제자들도 혼인에 청함을 받았더니 포도주가 모자란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희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 그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거기 유대인의 결례를 따라 두 세통 드는 돌 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구까지 채우니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 같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맞보고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엇 도다 하니라, 예수께서 이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해설: 1장에서는 계속 이튼 날 이튼 날이라고 하면서 2장에 와서는 “사흘 되던 날”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의 뜻은 “이튼 날”은 “광야”를 상징하며 “사흘”은 “가나안”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3일되던 날”에 가나안에 혼인잔치가 있다는 것은 “애급 광야 가나안”까지가 “3일”인데 가나안에서 혼인잔치가 이루어지는 상황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3일”만에 부활하신 “3일”은 신앙인이라면 반드시 “애급 광야 가나안”까지가 “3일”입니다. 사실 이 말씀은 오늘날 기독교인들에게는 출 애급도 못한 영적상태라 해당이 되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러나 천국을 가는 길은 이러한 과정이 있다는 것을 꼭 아시고 이 글을 보시기 바랍니다. 먼저 “애급”이란 세상교회에서 출 애급해서 “광야”에서 구름기둥과 불기둥 즉 징계와 모진 훈련을 받고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고 “가나안”에 입성하는 자들에게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천국의 기초를 놓기 위해 이 땅에 오셔서 최초로 행한 기적이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일이었습니다. 그 때에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가 잔치 집에 “포도주”가 없다고 했는데, 예수님의 답변은 참으로 우리 상식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기상천외한 답변을 하셨습니다.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 하였나이다”입니다.
어머니에게 “여자여”라고 한 점도 그렇거니와 천국의 주인이신 예수님이 혼인집의 “포도주”가 없는 것이 예수님과는 상관이 없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예수님이 “포도주”를 만드실 줄을 알았으므로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고 당부했고, 결국 “포도주”는 예수님에 의해 만들어졌으며 “혼인잔치”는 기쁘고 성대하게 치러졌습니다. 아무도 모르게 마리아와 예수님만 암묵적으로 통하고 있었던 “혼인잔치”였습니다. 그럼 암묵적으로 통하고 있었던 “혼인잔치”의 비밀은 무엇인가? “혼인잔치”에 쓰이는 “포도주”는 오늘날의 “실존예수님”의 말씀으로 선포되는 생명의 말씀을 뜻합니다. 그리고 “혼인 잔치 집”이란 하늘의 “영”(靈)과 인간 “육”(肉)이 한 몸으로 만나서 영생의 몸을 얻는 오늘날의 기름 준비된 “슬기로운 다섯 처녀”와 같은 “정결한 처녀”가 신랑을 맞이하는 “천국혼인잔치”를 뜻합니다. 영생을 선물로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깨달아(고전14:19)야 하는데 그 말씀이 기름(말씀) 준비한 슬기로운 5 처녀이며 “포도주”라는 것입니다.
그 말씀의 “포도주”가 없다고 했을 때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라고 했다면 이는 무엇을 뜻하는가? 예수님은 자기 어머니를 보고 여자라고 하면서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반박을 하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은 어머니에게 이 “혼인잔치”는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고 또 나는 아직 내 “때”가 이르지 않아 “포도주”를 만들 수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는 것은 나는 아직 생명의 말씀으로 죽은 영혼을 살릴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하시는 일은 생명의 말씀을 가지고 죽은 영혼들을 살려서 하나님의 아들로 거듭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직 “때”가 아니기 때문에 “포도주”를 만들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언제 “포도주”를 만들 수 있는가? 그 “때”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고 “그리스도”로 부활한 다음에 “포도주”를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천국혼인잔치”를 완성시키게 됩니다.
그러나 지금 예수님의 영적상태는 “혼인 잔치 집”에 “포도주”가 없어도 상관할 일이 아니라고 하셨으며 이는 아직 “때”가 아니기 때문이라고 분명히 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어머니를 어머니라고 하지 않고 “여자”(정결한 처녀)라고 한 점은 그만큼 창조완성의 시대를 갈구한 깊이 숨은 고백이 들어있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이 어머니보고 “여자”라고 했을까? 이것을 설명하자면 거대담론이 됨으로 간단히 요점을 설명하자면 창세기 “6일 창조”에서 여섯째 날에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를 창조했는데 동일한 사람으로 창조한 것이 아니라 수컷과 암컷으로 창조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씨”를 소유한 “남자의 씨”를 받아야 하는 “여자”를 분명히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남자”는 “씨”를 가지고 있는 자이며 “여자”는 “남자”로부터 “씨”를 받아야 할 밭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여자는 “남자”로부터 “씨”를 받아서 잉태되어야 “여자가 남자(예수)”로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이 예수로 탄생하는 과정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정결한 처녀동정녀마리아”의 영적상태로 깨끗해지면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잉태)하여 인간 “동정녀마리아”의 여자(인간)에서 남자(예수)로 탄생하는 것입니다. 고전 11:3 여자(인간)의 머리는 남자(예수)요,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그리 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이렇게 단계적으로 성장과정을 말합니다. 이런 말씀은 오늘날 기독교 신학박사라도 생소한 말씀이라 이해를 못 하지만 “축생”이나 “세례요한”의 영적상태에 계신 분들은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이 말씀을 기록하는 것입니다.
상기의 말씀에 “여자”는 오늘에 오실 땅의 독보적 존재 인간육체를 뜻 합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남자”가 기름 준비된 “슬기로운 다섯 처녀”(여자)에게 임해오는 것입니다(마25장) 이러므로 예수님이 어머니를 향해 말씀하신 “여자여”라는 호칭은 단순히 어머니에 대한 사사로운 호칭이 아니고 “동정녀마리아” 여자영적상태에서 성령으로 잉태하여 “남자”(예수)를 낳아 창조의 관점에서 최대로 높인 공적인 호칭입니다. 하나님은 천국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진행형으로 계시며 항상 “실존예수”의 “영”으로 하늘에서 이 땅으로 내려오셔서 기름 준비된 “슬기로운 5 처녀”에게 임함으로 “인간 신부”와 “하늘의 신랑”과 하나가 됨으로 인간이 신적존재인 인간 “실존예수”로 탄생하는 것입니다. 이같이 하늘의 남자(예수)가 땅의 여자(인간)와 한 몸을 이루어 그때마다 창조는 진행되기 때문에 예수님이 “여자여”라고 하셨을 때 여자는 보다 완성도 높은 창조의 개념과 창조의 의지가 강조된 단어였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진정으로 만드셔야 하는 완성의 “포도주”는 오늘날 생수와 같은 포도주 즉 생명의 말씀이 됩니다. 성경은 인간을 위해 주어진 생명책입니다. 그러므로 땅에 사는 인간이 천국의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결코 하늘의 신랑이 천국의 주인이 아닙니다. “슬기로운 다섯 처녀”가 기름(말씀) 준비했을 때 하늘의 신랑이 이 땅으로 내려와 인간과 함께 “혼인잔치”를 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2:24 남자가 부모를 떠나 여자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룬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구체적으로 보이는 이 땅과 여자(인간)를 알면 성경이 보이며 창조완성의 오메가가 보입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은 “알파인 하늘과 남자(예수)”만 알고 있으므로 창조완성의 “오메가 인간여자”(실존예수)를 전혀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에 유대인의 결례란 말씀은 예배의식을 말씀하고 있는 것인데 연회장에 “포도주”가 떨어져 두세 통 드는 돌 항아리 여섯에다 물을 채워 “포도주”를 만드는데 두세 통 드는 돌 항아리는 질그릇으로 만들어진 인간의 존재를 말합니다. 물이 얼마큼 들어가느냐 하면 “두세 통”들어간다는 것입니다. “둘”이라는 것은 “둘째 날 광야”를 말하고, 물이 가득 차는 것을 “셋째 날 가나안”을 말합니다. 그래서 “두세 통 드는 돌 항아리”라고 합니다. 이 “두세 통 드는 돌 항아리”가 몇 개 있느냐 하면 6개가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두세 통 드는 돌 6 항아리”에 물을 가득히 채우라고 말씀하십니다.
물을 가득히 채워서 “포도주”를 만드는 이 사건은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애급세상교회”에서 출애굽을 해서 “광야의 불기둥과 구름기둥” 즉 징계와 연단의 과정을 통과하면 “가나안혼인잔치”에 입성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창세기 “6일 천지창조”는 땅의 어둠의 존재들을 하늘의 존재로 만드는 것이 창세기 “6일 천지창조”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에 이르지 못한 어둠의 존재인 물고기나 짐승들이 한 단계씩 여섯 번 거듭나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과정을 “6일 천지창조”라 말합니다. 6일이란 뜻은 창세기의 천지창조의 땅이 하늘로 변하는 과정이며 “육일창조” 나 “여섯 항아리”는 똑같은 의미가 있는 것이며 “여섯 항아리”에 물을 꽉 채웠을 때 거듭나는 것입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거듭난 자 안에 안식하는 거와 같은 영적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날의 개념이 아니라 영적인 단계로 성장해서 하나님의 아들로 성장하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물을 아구까지 채우라는 것은 즉 하나님의 말씀으로 내 안에 꽉 채우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말씀으로 “6 항아리”에 꽉 채워야 그 말씀으로 죽은 영혼들에게 희생의 “피” 즉 복음을 주어 구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본 문장에 연회장에 “포도주”를 주라는 뜻은 말씀으로 성장하여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됐을 때 복음의 말씀을 전하는 것을 상징적으로 “포도주”를 주라는 것입니다. 이 “포도주”란 예수님의 “피”를 상징한 것이며 모든 사람이 예수님의 피(복음)의 공로로 구원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씀을 전해주는 입장은 예수님의 희생의 피(복음)를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찬식에 사용하는 “떡과 포도주”는 예수님의 “살과 피”로 상징한 것입니다. 먹는 자의 입장은 “살”을 먹고 복음을 주는 자는 희생의 “피”를 주는 것입니다. 이때 연회장에서는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든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라고 하객들이 말하는데 이 말씀의 영적의미는 여기서 말하는 “낮은 포도주”는 거듭나기 전에 내놓은 말씀(물)을 말하며 “좋은 포도주”는 하나님의 아들로 거듭난 후 내어놓는 생명의 말씀(생수)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는 오늘날 목회자들은 자기가 전하는 말씀이 최고요 진리라고 하지만 좋은 “포도주”를 먹고 보니 먼저 먹은 말씀은 아주 수준이 낮은 젖먹이 수준이고 별거 아닌 말씀인데 신랑 당신은 지금 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왜 이제야 진리의 참 말씀을 주느냐 즉 당신이 주는 말씀이 진짜 최고다 하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시며 뜻은 세상에서 고통당하고 진리를 찾아 헤매는 고아, 과부 , 나그네와 같은 사람들에게 “포도주”를 주라고 부르신 이유인 것입니다. 즉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라는 것입니다. 다시 종합해서 한 마디로 말한다면 하나님의 백성들은 끊임없이 말씀으로 양육을 받아서 장성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서 세상에서 진리를 찾아 방황하는 자(고아, 과부, 나그네)들에게 참 진리의 복음을 주어서 구원시키라는 것입니다. 이같이 물이 항아리에 아구까지 꽉 차 있을 때 희생의 피 즉 복음을 전해야 된 다는 것입니다.
이 상태가 되어야 계시의 눈이 열려 목회자의 자격이 될 수 있고 영적인 자녀를 양육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과 같이 구원자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이때가 되면 하나님의 곡간에서 구약과 신약을 마음대로 꺼내서 영적으로 가난한 자(고아,과부,나그네)를 먹이고 양육하는 단계에 도달하고 선지자의 반열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가나혼인잔치”는 사실 “광야”에서 모진 징계와 훈련의 시험을 통과한 “가나안”에 입성한 자에게 해당되는 말씀이며 아직 출 애급도 하지 못한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에게는 해당이 되지 않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일과 표적은 모두 “요나의 표적”으로 죽은 영혼을 살려서 하나님의 아들로 거듭나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시니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게 된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예수님이 행하는 표적이나 이적을 보아야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인정을 합니다. 때문에 예수님은 “가나혼인 잔치”에서 물로 “좋은 포도주”를 만드신 것을 시작으로 하여 수많은 표적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표적을 보고 자신을 믿는 자들에게 음란하고 패역한 자들이라 말씀하시면서 내가 행한 표적은 모두 “요나의 표적”즉 죽은 영혼을 살리는 표적뿐이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2:12-17 그 후에 예수께서 그 어머니와 형제들과 제자들과 함께 가버나움으로 내려가 거기 여러 날 계시지 아니하시니라,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의 앉은 것을 보시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어 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비둘기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해설: 예수께서 가나 혼인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후 예수님의 어머니와 그의 형제들과 제자들과 함께 가버나움으로 내려가 그곳에 잠시 머무시다가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워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 것입니다. 유월절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하고 있는 하나님의 배성들을 광야로 구원해 낸 날을 기념하기 위해 하나님께 제사드리는 절기로 7일 동안 무교병을 먹으며 처음 태어난 어린양을 골라 두었다가 니산월(7월) 14일 밤에 잡아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르고 고기는 구워 먹는 날을 말합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물론 구원받은 백성들이라면 예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영원토록 하나님께 드려야 할 제사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회가 유월절 제사를 드리지 않고 있다는 것은 목회자들이 임의로 유월절 제사를 폐지했거나 아니면 기독교인들은 애굽에서 아직 구원조차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유월절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성전 안으로 들어가 보니 성전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의 앉은 것을 보시게 된 것입니다. 이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팔아 돈을 치부하는 자들은 오늘날은 물론 예수님 당시나 그 이전에도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삯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을 팔고 사는 목회자들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하나님의 성전 안에서 “소, 양, 비둘기”를 팔고 있습니다. 그런데 “소, 양, 비둘기”는 실제의 짐승들이 아니라 “하나님, 예수, 성령”을 비유하여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소”는 “하나님”을 말하며 “양”은 “예수님”을 말하며 “비둘기”는 “성령”을 비유하여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은 화가 나서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성전 안에서 “소, 양, 비둘기”를 팔고 있는 자들을 모두 내어 쫓으시며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고 경고하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전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팔아먹는 자들은 유대인들만이 아니라 오늘날 기독교에도 계속 있고 앞으로도 계속 있을 것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고 팔지”말라고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잠언 23:25 진리를 사고 팔지 말며 지혜와 훈계와 명철도 그리할 찌니라, 이 말씀은 진리를 “사고 팔지”말며 지혜와 훈계와 명철도 “사고 팔지” 말라는 것입니다. 진리는 곧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며 지혜와 훈계와 명철도 모두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사고 팔지”말라고 하시는 것은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지금 하나님의 말씀을 “사고 파는”자들이 있기 때문에 하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돈을 주고 “사고 팔면” 안 됩니다. 그런데 예전이나 오늘날이나 한결같이, 성전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사고 팔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고 파는”것은 곧 거룩하신 하나님을 “팔고 사는”것입니다. 왜냐하면 요 1:1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니라, 말씀자체가 곧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왜”성경은 이런 말씀을 기록했을까?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 예전이나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팔고 사는” 자들이 있기 때문에 이런 말씀을 기록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 말씀을 보시는 목회자들은 당연히 구약의 율법인 기업이 없는 레위인(성전 일)에게 사례비 운운하며 항변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자체가 불법이라는 것입니다. 이사야 55:1-3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말씀)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복음)을 사라,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헌금)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서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하나님의 말씀을 매매하는 자들은 이 세상에 목사 말고는 아무도 없습니다. 오늘날 교회 예배당은 말씀 매매하는 슈퍼마켓입니다. 파는 자는 목사이고, 사는 자는 교인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파는 목회자들은 먼저 교단에 가입을 해야 하고 그 교단에서 발행하는 자격증이 있어야 목회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는 자는 감히 하나님 말씀을 팔 수 없게 한다고 이미 계시록에 기록된 말씀이다.
이렇게 삯꾼목자들이 성령(말씀)을 돈을 받고 파는 것은 성령을 사가는 사람들이 있어서 파는 것입니다. 성령을 돈, 즉 헌금을 내고 사가는 자들은 자칭 기독교인이라 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그런데 삯꾼목자들이 팔아먹는 성령은 이름만 성령이며 실상은 더럽고 추한 귀신의 “악령”들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악령”을 “성령”이라 믿고 돈으로 사가는 것은 집에다 곱게 보관하려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다시 몇 배로 남겨서 되팔기 위해서입니다. 그것은 돈으로 산 “성령”을 천국 가는데 사용하고 전도하는데 사용하고 자기 사업하는데 사용하고 아이들이 대학 들어가는데 사용하고 병들었을 때 사용하는 등 만병통치약처럼 아무 곳에나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이들은 그 “성령”이라는 “악령”에 때문에 자신도 속고 남들도 속이면서 배나 더 지옥자식이 되며 또한 다른 사람도 지옥자식을 만드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성전 안에서 돈 바꾸는 자들은 환전상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목회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하여(비 진리)하나님의 형상을 입혀야 할 하나님의 백성들을 “가이사”의 형상 곧 마귀의 자식으로 바꾸고 있다는 것을 비유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상을 엎으셨다는 것은 제사 드리는 상, 즉 말씀을 선포하는 강대상을 엎어버렸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제사장이나 목회자들이 성전 안에서 하나님을 팔아서 장사하는 제사장(목사)들을 보시고 화가 나서 채찍을 만들어 모두 내어 쫓으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기독교목회자들은 지금도 변함없이 성전 안에서 하나님을 팔아서 돈을 치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은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전을 사모하며 교회를 위해 열심히 충성봉사 하는 것은 자신들의 욕구를 채우려는 욕심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의 백성들이 교회를 위해서 열심히 충성하고, 봉사하고, 전도를 하고, 예물(헌금)을 드리는 목적이 모두 하나님께 복을 받으려는 욕심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의 전을 사모한다는 것은 그 안에 욕심이 많다는 것이며 때문에 그 욕심으로 말미암아 자신을 멸망하게 만든다는 뜻입니다.
요한복음 2:18-22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예수께 말하기를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뇨,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 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죽은 자 가운데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및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해설: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격한 말씀과 성전에서 행하신일들을 목격하고 예수께 말하기를 네가 성전에 들어와 이런 행패를 부리니 우리에게 무슨 표적을 보이겠느냐고 말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말을 들으신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성전을 “3일” 만에 짓겠다는 말을 듣고 예수님에게 이 성전은 46년 동안이나 걸려서 건축하였는데 네가 “3일” 동안에 다시 지을 수 있냐고 항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3일”의 의미가 차원적 중요한 영적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먼저 예수님이 십자가부활이 “3일”이며 “애급, 광야, 가나안”길이 “3일”길이며 노아방주가 “3층”으로 차원적으로 지어졌고 예루살렘성전이 “3층”으로 지어졌고 사도바울이 “3층천”하늘나라를 다녀왔고 이밖에도 성경전체의 흐름은 “3일”의 영적의미가 차원적으로 다르게 수많은 말씀이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 잡혀 죽게 된 동기가 46년 동안지은 성전을 “3일”만에 성전을 짓겠다고 하신 말씀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유대인들에게 잡혀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되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람이 46년 동안 지어 놓은 예루살렘 성전 건물을 헐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 안에 가감된 비 진리로 46년 동안 지어놓은 잘못된 성전을 헐어버리라는 것을 비유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성전이나 오늘날 기독교는 사람의 손으로 건축해 놓은 건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백성들 몸 안에 건축한 영적인 사람성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전 3: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이렇게 사람의 몸이 하나님의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반드시 자신 안에 진리의 말씀으로 성전을 건축해야 하나님이 오셔서 안식하실 때 천국은 내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천국은 어디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물론 오늘날 기독교인들도 “실존예수님”이 주시는 생명의 말씀을 받아서 자신 안에 성전을 건축하는 것이 아니라, 거짓목회자들이 주는 가감된 비 진리로 육적인 성전을 건축하고 있으면서 진리로 성전을 짓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예수님은 너희가 비 진리로 모래 위에 건축해 놓은 성전을 모두 헐면 내가 반석 위에 “3일”동안에 생명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옛 집을 헐지 않고는 새집을 지을 수 없듯이 비 진리로 건축한 성전을 헐지 않고는 진리로 새 성전을 지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천국을 가려면 기독교목회자들에게 받은 비 진리의 말씀으로 자신 안에 지은 성전 고정관념을 모두 헐어버리고 진리의 “새 말씀”으로 다시 성전을 건축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예수님은 목수의 아들 곧 하나님의 아들로 이 세상에 하나님의 백성들 안에 생명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기 위해서 오신 목수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3일”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전이 완성되는 기간, 즉 “3년” 혹은 “30년”을 비유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즉 예수님이 “3년”동안 제자들 안에 그의 입에서 나오는 생명의 말씀으로 성전을 건축하여 사도들을 양육하신 기간이 바로 “3일”이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비유의 말씀은 유대인들만 모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들도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 안에 “3년”동안 말씀으로 성전을 건축하신 후에 예수님께서 “혼적”인 죽은 제자들 몸 안에서 “영적”인 존재로 부활하신 후에야 제자들이 예수님이 그때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를 깨닫고 성경에 기록된 말씀과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들을 모두 믿게 된 것입니다. 좀 이해하기가 어렵지만 다시 말씀드려서 “혼적”인 제자들이 “영적”인 “예수”로 부활(거듭)했고 “예수”는 죽은 제자들 안에서 “그리스도”로 부활(거듭)하신 것입니다. 문제는 유대인들이나 오늘날 기독교목회자들도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성전이나 예수님이 말씀으로 건축하는 영적인 교회를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영적”인 성전은 건축하지 않고 교인들에게 건축헌금을 받아서 건물 성전과 교회만을 크고 화려하게 건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기독교목회자들은 세상교회, 즉 건물성전만 지을 것이 아니라 목회자자신 안에 먼저 하나님의 말씀으로 건축되는 “영적”인 성전을 건축해야 자신도 살고 교인들도 살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목회자 자신도 죽어있는 상태에서 교인들을 살린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오늘날 기독교목회자들이 부활(거듭)자체를 모르고 있습니다. 이렇게 자신 안에 “영적”인 교회가 건축되면 그 후에 교인들 안에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영적”인 성전을 건축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오늘날 목회자들 가운데는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을 할 수 있는 하늘의 건축면허를 소지하고 있는 오늘날의 “실존예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늘의 건축 면허를 소유한 참 목자는 오늘날 기독교 주변에는 항상 “실존예수님”과 오늘날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난 하나님의 아들들이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2:23-25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 이름을 믿었으나 예수는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 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또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시므로 사람에 대하여 아무의 증거도 받으실 필요가 없음이니라,
해설: 예수님께서 유월절 동안 예루살렘에 계시면서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많은 사람이 그의 말씀을 믿었으나 예수는 저희를 믿거나 신뢰하지 아니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자신이 행하신 표적을 보고 믿는 사람들의 마음이 어떠하다는 것을 이미 알고 계시고 또한 표적을 보고 자신을 믿는 사람들은 육신적인 존재로 그 속에는 욕심이 많다는 것을 모두 알고 계시기 때문에 이런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증거나 인정도 받을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표적과 이적”을 바라고 믿는 자들은 음란하고 패역한 자들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마12:39)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기독교인들도 거짓목회자이든 삯꾼목자이든 관계없이 표적을 행하거나 욕심을 채워주면 벌떼와 같이 몰려가 예수님처럼 믿고 섬기는 것이 오늘날 기독교인들의 현실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행하신 모든 표적은 오직 “요나의 표적”으로 죽은 영혼을 구원하고 살리는 일만 하시지 무슨 “기적이나 표적”을 베풀거나 다른 일은 하는 예수라면 그 예수는 가짜예수가 틀림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진정한 참 목자라면 예수님이나 사도들과 같이 죄인들의 죄를 사해주고 죽은 “영혼”을 살려서 하나님의 “아들”로 거듭나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 3장으로 계속 =
(원문 출처:새사람 블로그) 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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