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2:25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예수님께서는 육체는 살아 있다 하나님의 “영”이 없는 자를 성경에서는 죽은 자라고 말씀하십니다(마8:22) 하나님의 생명이 없는 즉 “영”이 없는 “혼”의 존재를 모두 죽은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육체는 살아있으나 “영”은 죽었으며, 자유인으로 사는 것 같았지만, 실상은 죄의 종으로 살아온 것이 지난 삶의 실존이었다고 히브리서 기자는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히브리서 2:14~15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라, 마태복음에 죄의 실체가 사람의 몸(흙) 속에 육체라고 증거 합니다. 주검이 있는 곳에 독수리들이 모이느니라(마24:28) 독수리는 “혼”의 목자이며 예수를 만나지 못한 인간은 존귀한 자라도 “영”이 죽어있는 자들이 “주검”이고 이들을 잡아먹는 것이 마귀인 거짓목자인 “독수리”인 것입니다. 하지만 이 보다 더 깊은 의미는 육체의 비밀입니다.
독수리는 말씀의 “씨”를 먹는 마귀의 악한 존재를 상징합니다. 이 마귀는 “영”이 죽어 있는 오늘날의 “혼”의 존재인 기독교인들을 먹고 삽니다. 주검이란 “영”과 “육”이 분리되어 죽은 몸을 말합니다. 이 몸은 흙으로 지어졌으며 그 흙은 이미 한 번 심판을 받아 종신토록 마귀에게 준바 된 것이라고 창세기는 증거 합니다. 너는 종신토록 흙을 먹을지니라(창3:14) 하지만 이 육체의 비밀은 감추어졌습니다. 오직 요엘서에서 말한 복음 외에는 그 비밀을 알 수 없습니다. 요엘 2:23 시온의 자녀들아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며 즐거워할 찌어다. 그가 너희를 위하여 비를 내리시되 이른 비를 너희에게 적당하게 주시리니 이른 비와 늦은 비가 전과 같을 것이라, 마당에는 밀이 가득하고 독(몸)에는 새 포도주와 기름이 넘치리로다.
예수님께서 그 제자들과 함께 하시면서 친히 가르쳤음에도 제자들도 이 비밀을 깨닫지 못하다가, 후에 성령께서 가르치셨을 때, 그 육체의 비밀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다고 합니다. 마귀는 죄의 본질과 실체가 몸속 육체에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도록 사람들을 혼미케 하였고. 하나님은 하나님의 지혜로 복음의 때까지 이를 감추셨습니다. 또 마귀는 사람들로 죽기를 무섭게 하여 육체를 멸하는 길을 알지 못하게 했습니다.
때문에 결코 사람 스스로는 죄의 본질과 실체가 그 몸 안에 숨겨진 육체(옛사람)라는 것을 성령의 가르치심이 아니면 알 길이 없습니다. 이 육체의 비밀을 깨닫지 못할 때 본질의 죄를 해결할 길이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죄의 종으로 일생에 매여 살 수밖에 없는 것이 모든 인간들의 실존입니다. 그러면 이 육체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습니까? 바로 예수와 함께 죽는 것입니다(갈2:20) 마귀가 무엇으로 육체의 비밀을 사로잡아 종노릇 하게 했습니까? 마귀는 사람들이 죽기를 무서워하게 한 장본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귀의 실체를 알면 역설적으로 죽는 것입니다.
이제 문제는 어떻게 육적인 존재를 죽일 수 있겠습니까? 종교지도자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만났을 때, 예수님께서 거듭남의 비밀을 말씀을 하셨지만, 니고데모는 영적 출생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을 육적으로 두 번 태어나야 하는가?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처럼 육체의 죽음도 우리의 실제적인 육체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 죽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몸을 드리신 공로로 인해 우리는 물리적으로 육체를 예수처럼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영적으로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어 장사 지내는 믿음의 행함을 할 때 육체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바로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는 그 길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그런데 마귀는 인간이 죽기를 무서워하게 하므로, 이 육체의 비밀을 깨닫지도 또 믿음의 행함도 못하도록 한 것입니다. 그런데 “영의 법”은 육체 가운데 살 때 살았으나 죽었던 것이고 자유 했으나 죽어있는 자였습니다. 하지만 진정한 자유인이 되려면 반드시 죽고 부활해야 합니다. 그러면 죽는다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사도바울은 이를 “영의 법”이라고 증거 하며 그리스도를 참 남편으로 삼아 그분을 향해 날마다 자기를 포기하여 그분으로 이 몸 가운데 주인으로 사시게 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육체를 멸하여 생명을 얻었으면 이제는 세상의 빛에서 생명의 빛에 이르고 땅의 생명에서 하늘의 생명에 이르게 된다고 증거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죽고 부활이 되는 것일까요? 육체를 멸할 때는 아무리 죽으려고 애를 써도 내 의지로는 죽을 수 없고 이것은 오직 내 안에 계신 “성령”의 도움으로만 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5장 열 처녀 비유 중에서 기름(말씀) 준비한 “슬기 도운 5 처녀”에게 하늘의 신랑이 임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자는 “성령”이 함께하심으로 “육체의 자아”를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죽으면 부활하는데 이때 “그리스도”이신 신랑이 임하는 것입니다. 내가 죽는 것은 내 마음대로 죽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행함은 “바울은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자라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시니라”(고전3:6) 우리는 죽어야 된다는 것을 알지만 자의적으로 죽을 수는 없고 “슬기 도운 5 처녀”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내 안에 이루면 내 안에 계신 “성령”께서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죽는 것은 자기의 주권을 완전히 포기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나를 위하여 하지 않고, 주님을 위하여 하고 주님이 내 몸의 주인으로 주님의 뜻대로 쓰시도록 내어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온전히 “그리스도”의 생명만 나타나기를 원한다고 고백한 사도바울처럼 자기 생각을 버리는 것입니다. 자기 욕심을 버리는 것입니다. 자기 감정을 버리는 것입니다. 주님을 향해 모든 것을 포기하고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격수양이 아닙니다.
이것은 반드시 육체가 멸해져 그 몸속에 “그리스도의 영 성신”을 모신 사람이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모시지 않고도 얼마든지 이를 행할 수 있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힘써 자기의 “의”를 세우려고 하는 것입니다(롬10:2~3) 먼저 육체를 멸하여 그리스도의 생명과 함께 우리 “영”의 씨(혈통)를 받으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 “생명”을 받았다면 사도바울의 고백과 같이 “나는 날마다 죽노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육신은 후패하나 내 속사람은 날로 새롭구나(롬7:24) 이러한 고백이 나와야 합니다.
(원문 출처:새사람 블로그) 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