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말씀 1

※ 성경에서 말하는 살아있는 자와 죽어있는 자 ※

제라늄A 2020. 1. 14. 03:56

 

                             성경에서 말하는 살아있는 자와 죽어있는 자  ※   

성경의 핵을 이루는 결론은 부활이라 할 수 있으며 만약에 기독교에 부활이 없다면 기독교는 열매 맺지 못하는 나무와 같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다시 말해서 성경 66건이 모두 해명되고 그 예언이 실상으로 이루어진다 한 들 또 그리스도의 강림이 목전 도래한다고 해도 부활이 없다면 우리가 신앙을 할 필요가 있겠는가, 

 

우리 신앙인들의 최대의 소망은 부활에 참예하는 것입니다. 과연 이 부활의 참 모습은 무엇일까?  믿다가 죽어간 성도들의 시신들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는 것이 부활일까? 음부에 잠들어 있는 혼백이 깨어나는 것이 부활일까?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부활이라는 것은 무덤에 장사한 죽은 시체들이 벌떡 일어나거나 시체가 썩어 한줌의 흙으로 돌아간 그 땅에서 다시 홀연히 죽은 자들이 나타날 것이라는 등 너무나도 허구적인 관점으로 부활을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러한 부활을 말하지 않고 있습니다. 성경을 내세워 무지한 성도들에게 마치 진리인 마냥 허구를 말하는 무리들의 말은 결코 진실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부활이라는 정확한 실체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죽음에 대한 정확한 개념을 필요로 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문자를 사용하여 문자의 이면에 하나님의 진정한 뜻을 밝혀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대의 흐름에 권세와 물질에 눈이 어두운 무지한 종교 지도자들은 문자라는 껍질만 만지다 결국은 알맹이를 말하지 못하고 껍데기를 참인 냥 성도들에게 거짓으로 말하고 있으니 결코 화를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사5:20) 우리는 죽음을 무수히 보아왔습니다. 이 지상의 인간이 탄생하는 순간 동시에 죽음이 결정되었던 사실을 하나의 진리로 받아들였다. 물론 영웅호걸이라도 죽음 앞에는 예외가 없었습니다.

 

죽음이란 어떠한 인간도 뛰어 넘을 수 없는 영원한 장벽으로 남게 된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 한 분 만이 사망의 장벽을 뛰어 넘어 영생의 지평을 우리들 앞에 열어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의 부활과 영생이 오늘날 우리에게 믿을 만한 사건으로 부각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죽음의 옥에 갇힌 우리들에게는 죽음이라는 장벽을 뛰어 넘어 생명의 도 곧 영생의 진리를 깨닫고자 함이 차라리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속의 하나님의 영생의 도가 진정 살아 있다면 이제 끝 날에 보혜사 성령께서 우리의 눈을 가리고 있는 어둠을 걷어내시고 우리에게 영생의 도를 밝게 보여주실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사망의 권세를 물리치기 위해서는 먼저 죽음의 의미를 알아야 하겠습니다.  마 8:22 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중대한 사실 한 가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육신이 죽어 매장되어야 할 죽은 자와 그 시신을 장사할 죽은 자들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은 당초에 죽은 자들이 있었고 그 죽은 자들 가운데서 한 사람이 또 죽어(육적으로도) 시신이 되었음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일단 모든 사람을 죽은 자로 규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 중의 한 사람이 죽었으니 죽은 자가 다시 죽었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이 육신이 살아 움직이는 자를 가리켜 죽었다 한 그 죽음과 그들 가운데 육신의 호흡이 끊어져 시체가 되어버린 자를 가리켜 죽었다 한 그 죽음을 구분해서 말한다면 육체는 살아있으나 하나님의 영(말씀)없는 죽은 자와 실제로 육체가 죽어 죽은 자설명하기로 합니다. 이 두 가지 죽음 가운데서 하나님의 영이 없는 육신은 살아 있으나 하나님의 생명의 없는 죽은 자를 가리켜 말함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선악과는 절대로 먹지 말라는 금령내리셨습니다.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죽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담은 금령을 어기고 죽음을 취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담은 930살까지 이르도록 육신이 살아 움직였으니 아담이 그 실과를 따 먹었는데도 살았다는 것은 육신의 죽음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아담은 두 가지 죽음을 경험하게 되었고(영적죽음과 육적죽음) 예수님 제자의 부친 또한 두 가지 죽음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은 누구나 영적으로는 죽어 있으므로 언젠가는  육체의 죽음을 맛볼 수 밖 에 없는 것이 현실이며 운명임을 부인할 길이 없습니다. 이 땅에서 사는 사람들은 영이 죽어 있는 상태를 몰랐으므로 육체의 죽음만을 죽음으로 생각하고 오직 육체의 죽음을 뛰어 넘기 위하여 고독과 단절의 밀실에서 진정한 생명을 이미 상실한 채 몸부림치다가 결국 인간의 비애를 맛보아 온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에 예수님께서 오시어 인간이 안고 있는 문제의 실마리를 풀어주시기 위해 약속으로 모든 것을 남기셨으나 이 날까지 성경의 약속이 밀봉되어 그 어누 누구에게도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니 어찌 인생들이 영생의 도를 깨달을 수 있을 것인가! 잎만 무성한 채 열매 없는 나무 마냥 풍진 세월에 시달려 고목이 되어버린 나무가 있습니다. 이 빛바랜 고목이 오늘날 기독교의 현실 또는 나아가 이 시대 모든 종교계현실이라면 이제 고목의 뿌리에서 새로운 순이 나야 합니다.

 

그 길만이 이 시대의 기독교가 부활하는 길이며 나아가 신앙인들이 참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길입니다. 이제 약속이 응하는 이 시대에 곧 죄악이 영속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는 이 시대에 영생의 샘이 열려 사망을 향해 흐르고 이 부활의 생수를 마시는 자마다 죽음의 영원한 골짜기에서 신음하는 자들에게 부활의 기회가 주어진 것입니다.

 

롬 5:12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아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으며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나 아담과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사람에게도 사망이 이르게 된 것입니다. 아담은 하나님으로부터 영생의 약속을 받았다. 선악과를 먹지 않았다면 그에게 죽음이란 결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죽음택하였습니다.

 

하나님과의 언약을 파하고 사망의 길을 택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아담의 죽음 가운데 원인적인 죽음 곧 영적인 죽음입니다. 또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곧 죽은 자로다 하는 말도 이와 같은 상태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 후 아담은 정한 수한을 누리다가 육신도 죽어 그의 자손에게 시신을 남겨 놓고 생을 마감합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언급해온 죽음은 앞에서 언급한 육체의 죽음말한 것입니다. 한 인간이 심장이 멈추고 호흡이 끊어진 상태 즉 육신의 죽음입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육신의 죽음이 영혼의 죽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이러한 죽음의 상태를 이해했으니 영적인 죽음 우리를 지배하고 있음을 알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예수님의 약속이 있으므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라는 말씀을 좇아 썩지 아니할  곧 항상 있고 살아 있는 말씀으로 죽었던 영이 새로 부활된다면 새로운 생명의 시작을 맞이했으며 나아가 거룩한 영들이 신랑으로 찾아올 때에 신부로서 신랑을 맞이하여 진정한 영생을 맛볼 수 있게 됩니다.

 

(원문 출처:새사람 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