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12:33 나무도 좋고 실과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실과도 좋지 않다 하든지 하라, 그 열매로 그 나무를 아느니라,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에게 묻되 이러한 것들을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당신은 누구십니까? 너희는 내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는 도다. 너희는 오히려 유대 사람과 같이 되었도다(도마복음43)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그들을 구원하려고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믿고 따르며 항상 예수님과 함께 동고동락하면서 그의 가르침을 받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런데도 지금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도대체 “당신은 누구냐”라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의 가르침을 항상 받고 있으면서도 예수님이 도대체 누구인지 그리고 그 실체가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예수를 얼마나 잘 알고 잘 믿고 있습니까?
그리고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살고 있는 제자들도 잘 모르는 예수를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어떻게 그렇게 예수를 잘 알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오늘날 기독교인들을 언제 아들로 낳았다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말끝마다 아버지, 아버지라고 부르는데 정신병자가 아니면 그렇게 부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때문에 예수님은 오늘날 기독교인들의 신앙을 “고르반”신앙이라고 합니다.“고르반 신앙이란? 하나님이 인정하든 안 하든 관계없이 무조건 내가 믿기만 하면 된다는 신앙을 “고르반”신앙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뜻과 전혀 관계없이 자신이 믿고 하는 일은 모두 하나님의 뜻이며 하나님의 일이라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도 하나님이 예배를 받으시는 안 받으시는지 상관하지 않고 무조건 내가 예배를 드렸으면 받은 것으로 알기 때문에 예수를 열심히 믿고 신앙생활을 하였던 기독교인들에게 사후에 주님께서 뜻밖에 “나는 너를 도무지 모른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이 “지옥문 앞에서 이를 갈며 슬피 우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질문에 너희가 지금까지 나의 가르침을 받고도 내가 누구인지 아직도 모르냐고 책망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본문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을 알기가 이렇게 힘들고 알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영의 존재”이시고 제자들은 “육의 존재”에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알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장성한 자로 성장해서 하나님의 아들로 거듭날 때쯤 되면 그때야 예수의 말씀을 알아듣고 그 말씀이 확신이 오면서 아! 이분이 바로 “예수님”이구나 하는 것을 스스로 자신이 깨닫고 예수를 “얼굴과 얼굴”을 보듯이 똑바로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도 알고 하나님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거듭나기 전에는 절대로 알 수 없는 것이 “실존 예수님”의 실체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과 예수를 아는 것이 영생”(요17:3)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제자들이 매일 같이 예수님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았어도 예수를 모르기 때문에 “너희는 오히려 유대 사람과 같이 되었다”라고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상기의 본문의 말씀 같이 (도마복음43절) “그들이 나무는 사랑하되 그 열매는 미워하며 열매는 사랑하되 나무를 미워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뜻은 제자들이 “실존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는 그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같이 들리며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고 잘 섬기지만 예수님의 인간적인 육신의 삶을 볼 때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으로 보이지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겉모양은 저나 나나 똑같기 때문에 실망하여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이 아니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육신이 있기 때문에 배가 고프면 먹어야 하고 때로는 감기몸살 같은 병도 나고 보통사람같이 인간이기 때문에 슬퍼하고 괴로워하며 때로는 분을 낼 때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문제 때문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태어난 한 동네에서 함께 자란 형제들이나 동네 사람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고 구원자로 믿지도 않았던 것은 예수님의 육신과 인간적인 삶을 날마다 한동네에서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7장을 보면 예수님은 인간으로 태어나서 성장과정을 기록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사야 7:14-15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그가 악(惡)을 버리며 선(善)을 택할 줄 알 때에 미쳐 버터와 꿀을 먹을 것이라,
이 말씀은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 이사야 선지자로 하여금 이미 예수님의 탄생과 성장과정과 예수님의 생애에 대하여 예언서로 기록한 말씀입니다. 상기의 말씀은 예수께서도 우리 인간과 똑같이 성장하면서 생명의 말씀인 “버터와 꿀”을 먹으며 성장하면서 인간과 똑같이 인간의 본능인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하며 성장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성장과정을 보면 이사야 53:2-3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이같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태어나면서 아주 볼품없는 천한 사람같이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으며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며 오직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인 “버터와 꿀”을 먹고 장성 한자로 성장한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생명의 말씀”으로 성장한 예수께서 나이 30세에 요단강에서 “침례”를 받으신 후에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할 때 하늘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확증을 받으시고 구원의 사역을 시작하신 것입니다. 이때가 예수가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서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 예수”로 거듭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30세 전까지는 우리 인간과 똑같기 때문에 성경에 기록이 없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간의 본능인 악(惡)을 버리며 선(善)을 택하며 하나님의 말씀으로 장성한 자로 성장해서 “예수”로 거듭났다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께서 선지자들은 고향에서 인정이나 대접을 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유대인들은 물론 오늘날 기독교인들도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신성 적 삶이 완전할 뿐만 아니라 인성적인 삶도 흠이나 점이나 티도 없이 완벽한 전지전능하신 예수님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대로 오시는 예수님은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신 분이기 때문에 인간과 똑같은 육신을 입고 있기에 인성이나 그의 삶이 조금도 사람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때로는 실수도 합니다. 우리 인간과 다르다는 것은 예수님 몸 안에는 “말씀”의 실체이신 성령이 “안식”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는 예수님의 탄생은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동정녀 마리아”어머니 몸에서 성령으로 잉태해서 태어나신 분으로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죽은 지 나흘 된 썩어서 냄새가 나는 “나사로”를 살리셨으며 “소경, 벙어리, 문둥병, 중풍 병자”들을 모두 말씀 한마디로 고치시는 전능한 하나님의 아들로 알기 때문에 오늘날 기독교가 “우상 예수”를 믿고 있는 자체를 모르는 것이 오늘날 현제 기독교인들의 신앙입니다. 이 사람들이 사후에 기독교 목사들에게 사기당한 것을 알고 “지옥문 앞에서 이를 갈며 슬피 우는 자”가 될 것입니다.
(원문 출처:새사람 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