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이 말하는 예수님의 탄생

※ 예수의“음성”을 듣고 행하는 자가 구원을 받는다 ※

제라늄A 2021. 9. 22. 21:11

요 5:25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음성”은 지금 살아 있는 “실존 예수”가 전하는 말씀을 “음성”이라 합니다.“음성”을 듣는 자는 반드시 영적으로 “죽은 자”(마8:21)가 살아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생명이 없는 육신의 존재를 “죽은 자”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성경말씀을 들으면 신앙인들이 어떻게 “행”해야 할지 모르는데 “음성”을 직접 듣고 말씀을 들으면 “행”해야 할 것을 명확히 알려 주기 때문에 그대로 “행”하면 됩니다.“음성”을 듣고, 말씀대로 "행함"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이 될 때까지 변화를 받아 거듭나는 것입니다. 즉 현재 “실존 예수”를 믿는 다 해서 모두 거듭나는 것은 아니라  현제 “실존 예수”의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직접 듣고 “믿고, 행하는 사람”이 거듭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재 “실존 예수”의 말씀을 듣기까지는 하는데 “행”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말씀만 듣는 다면 절대로 거듭나지 않습니다. 거듭나지 못하면 영원히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거듭나지 못하면 천국은 소유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 이 말씀을 읽으시는 이유는 “행”하기 위해서고 말씀대로 살기 위해서 보는 것입니다. 듣는 것으로 끝나는 것은 지식입니다.  2000년 전의 유대인의 예수가 왜 “예수”인가 하면 하나님의 생명이 없었던 “죽은 자”인 12제자들을 살렸기 때문에 “예수”인 것입니다. 자기가 구원자라고 해도 하나님의 아들이라 해도 하나님의 생명이 없는 “죽은 자”를 살리지 못하면 “예수”가 아닙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늘날도 “예수”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영적으로 죽은 영혼을 살리면 그가 바로 “예수”인 것입니다. 지금도 누가 영적으로 죽은 내 영혼을 살리면 그가 바로 “예수”입니다. 또한 사람들은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심판 하신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은 아무도 심판하시지 않고  오직 그 심판을 아들 “예수”에게 모두 위임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심판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예수님”이 한다는 것입니다. 이 “예수”는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 한 자가 “예수”입니다. 이 “예수”가 심판도 하고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심판하는 권세를 모두 “예수”에게 위임한 이유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공경 하는 것처럼 아들 “예수”를 공경하게 하기 위해서 심판의 권한을 모두 아들 “예수”에게 주셨습니다.“예수”를 하나님과 같이 동등하게 공경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모든 심판의 권한을 아들 “예수”에게 넘겨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육체가 없으시고 “예수”는 육체가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처럼 공경하기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사람의 “영혼”을 심판을 하시기 때문에 두려운 것입니다. 그 심판의 권세를 오늘날 인간이신 “실존예수”에게 모두 넘겨줬으니  아들을 공경하고 두려워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의 백성들이 구원을 받지 못하고, 믿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들어도 “행”치 않는 것은 하나님과 같이 아들 “예수”는 공경하는 공경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즉 신앙인들이 거듭나지 못하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지 못하는 이유는 심판의 권세를 “예수”가 가지고 있다는 것을 믿지 않고 모르기에 아들을 공경하지 않기 때문에 결국 구원에 이르지 못하고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이 “예수”는 하나님께서 생명을 주셔서 오늘날 구원자 “예수”로 세운자입니다. 하나님은 이 아들, 현재의 “실존 예수님”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들을 믿지 않고서는 사람들의 영혼이 살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아들을 영접해서 말씀을 듣고 변화되지 않는 것은 아들 “실존 예수”를 하나님처럼 믿고 있지 않아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들 “예수”의 몸 안에만 계십니다. 그래서   요 14:9 예수를 본 자는 하나님을 보았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아들 “실존 예수”는 이리 보아도 사람이요 저리 보아도 사람이요 저나 나나 똑같기 때문에 아무리 보아도 사람처럼 보이지 하나님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들의 믿음이고 믿는다 말하면서 실제로는 믿지 않고 있으니 구원을 받지 못하고 죽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 “예수”는 하나님과 같이 믿어야 사람들이 거듭날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심판과 구원의 권세”를 모두 아들 인간 “예수”에게 위임했기 때문입니다. 아들을 공경치 않는 것은 곧 하나님을 공경치 않는 것이고 아들을 공경하는 자가 바로 하나님도 공경을 하는 것입니다.

입술로만 공경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행함”으로 공경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현재의 인간 “예수”를 공경하지 않는 것은 상관이 없으나 아들 "예수"를 공경하지 않는 것이 곧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아들 “예수”를 "공경"하지 않는 것은 곧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들 몸 안에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예수”의 몸 안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다면 그것은 아들이 아니며 구원자 “예수”도 아닙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말씀을 들었기에 영생을 얻었다는 것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5:24)라는 말씀을 가지고 하는 말씀입니다. 말씀을 보면 영생을 얻었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고 멸망의 길에서 생명의 길로 옮겼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의 “음성”을 직접 듣는 자들은 어떤 자들일까? 그것은 바로 "행하는 자"들입니다. 듣는 것은 다 같이 듣지만 듣는 다고 모두 “영생”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듣고 어떻게 믿느냐?  심판의 권세를 가진 “실존 예수”의 말씀을 하나님 말씀처럼 들어야 합니다.

아들을 하나님처럼 “공경”하는 자, 그 자가 아들 “예수님”을 하나님처럼 믿고 아들의 “음성”을 듣는 자입니다. 기준은 여기에 있습니다. 아들 “예수님”의 말씀을 듣긴 들어도 믿긴 믿어도 하나님처럼 “공경” 하지 않는 자는 믿어도 들어도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현재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 “실존 예수님”을 어떻게 믿고 “공경”하는가? “공경”의 척도는 무엇으로 측정하는가? “공경”의 척도는 바로 “행”함으로 측정이 됩니다. 100% 믿고 “공경”하는 자는 행하게 되어 있습니다. 행하지 않는 자는 10% 단 1%도 믿지 않고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믿고, 들은 결과는 자동적으로 “행”함 으로 나타납니다. 필자의 글을 읽으시고 댓글을 달고 공감을 누르시는 다섯 분들은 “행할 때” 믿는 자요, 듣는 자라 하는 것입니다. 곧 “공경”하는 만큼 듣고 “행”하게 되어 있습니다. 왜 말씀을 읽고 깨닫기까지는 하는데 “행”하기 까지는 안 되느냐 하면 “실존 예수”가 하나님 같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사람 같이 보이기 때문에 “공경심”이 없는 것입니다. 그만큼 “아들 예수의 심판”의 권세를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그 “아들”이 심판을 언제 하느냐?  지금 현제 하나님의 실체이신 “말씀”이 심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 1:1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니라,   지금 하나님의 실체이신 “말씀”이 “구원”을 시키고 있는 것이고 살리고 있는 것입니다. 심판과 구원은 “말씀”이 심판이요 “말씀”이 구원입니다.“말씀”의 실체가 곧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지금 이 “말씀”을 읽고 “행”하는 자는 구원이요,“행”치 않는 자는 모든 것이 심판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행함”이 중요한 것입니다. 믿고 들은 결과가 “행함”이고 “행한 것”이 “생명의 열매”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바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사람들이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필자의 글을 읽고 깨달으시고 "공감"을 눌러주시는 다섯 분 중의 두 분은 오랜 신앙의 연륜을 경험하신 분들로 자신의 "행함"을 감사함을 필자에게 보이셨습니다. 두 분은 "80대" 노인들이신데 그 중에 한 분은 한국에 사시고 한분은 미국 시애틀에 사시는데 시애틀에 사시는 이 분은 두 번씩이나 필자에게 “행함”을 보이셨습니다. 이것은 누가 “행함”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본인 자신이 필자인 "새사람"을 하나님 같이 보이기 때문에 감사함으로 “행함”을 나타내 보이시는 것입니다. 이같이 “행함”이 자신에게 스스로 나타나는 것이 “구원과 영생”을 확실하게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원문 출처:새사람 블로그)